〈 84화 〉1부
1박에 120달러나 하는 꽤나 비싸지만 그렇다고 또 고급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름해서 돈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숙박계엔 적당히 가명을 썼는데, 신분증이나 여권을 제시하라는 요구는 없더라.
미국까지 날아오는 내내 자긴 했지만 워낙 잠자리가 불편해서 숙면을 취하진 못했던터라 늦은 점심을 먹고 아늑한 침대에 누워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벌써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말이 호텔이지 여관방이나 다름없는 방에는 컴퓨터가 비치되어있지 않아서 나는 호텔 로비의 검색용 공용 컴퓨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북마크되어있는 뉴스 사이트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게이트 관리국을 키워드로 검색하니 오늘 낮에 있었던 일들이 나오기는 나오는데, 상세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관리국 직원의 실수라... 역시 덮기로 한건가?”
내부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관리국 직원의 착각으로 빚어진 해프닝으로 발표가 난 것이다.
아예 다루지 않는 곳도 있었고, 대부분의 메이저 언론에선 단신으로 사소하게 다루고 있었다.
몇 군데 영세 언론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기는 한데, 사실 음모론을 제기하기에도 썩 만족스럽게 차려진 정황은 아니다보니 진지하게 의심스러워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미국에 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군.
사실 이렇게 되는게 상식적으로 당연하긴 했다.
미 연방정부가 한국과 비교해도 딱히 더 투명한 정부라고 할 수는 없었을뿐더러 시민들에게 투명하다고 해서 진짜로 국가기밀까지 숨김없이 대중에 공표한다면 그건 정부 자격도 없지.
물론 그 유명한 중앙정보국이 한국에서 따로 입수한 정보가 있다면 은신이능을 포함한 복수능력이 있는 헌터와 이번 사건을 연결지을수는 있겠지만 내가 테러나 범죄행각을 벌인 것도 아니고 따지고보면 일종의 내부고발을 한 셈인데 색출에 혈안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중요기관의 보안체계에 열적외선 카메라가 포함되겠네. 쯧, 설마 이런 일이 두 번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별 상관없겠지.”
진술서의 진위여부에 대해 격론이 오가더라도 네바다 게이트 기지 인근의 억제기에는 추가 경비인력이 배치되었을 것이고 테러모의는 무위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됐지.
기왕 값을 치렀으니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 아침에 귀국할 비행기를 알아봐야겠다.
여권이고 뭐고 없으니 돌아갈때도 꼼짝없이 밀항을 할 수밖에.
후련한 마음으로 카운터에 열쇠를 맡기고 외출을 알렸다.
방 안에 들어가 룸서비스를 불러도 되겠지만, 점심에 시켜먹은 샌드위치는 입맛이 달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영 별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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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밤거리는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피부색이 다양하다는 것 외엔 서울과 다를바 없었다.
저녁을 먹을 곳을 찾아 발길이 닿는대로 걸었다.
처음에는 코리안 레스토랑을 갈까 했는데 해외에서 파는 한식의 가성비가 최악이라는건 이미 악명이 높은 일이라 30달러 좀 넘게 남은 돈으로 해결이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돈이 더 필요하다면 슬쩍 훔치면 그만이겠지만 나름의 대의명분이 있던 아까와 달리 저녁밥 좀 더 좋은걸 먹자고 도둑질을 하는건 역시 내키지 않는 일이다.
음, 생각해보니 제대로 된 식당에서 먹기엔 좀 부족한 돈이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귀찮은 마음이 들어 그냥 근처의 햄버거집에 들어갔다.
미국까지 와서 패스트푸드라니.
“오,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많아?”
의외로 맛집인가, 여기?
가게 안은 늦은 저녁 혹은 야식을 먹으러 온 사람들로 우글거렸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빵과 패티 굽는 냄새에 섞여 땀냄새가 훅 풍겨온다.
혼잣말을 하면서 가게로 들어선 나는 땀냄새에 섞인 서양인 특유의 역한 체취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손으로 막으려다가 늦지 않게 정신을 차리고 급히 손을 내렸다.
비록 백인과 흑인의 체취가 독하다곤 하지만 티를 내는건 명백한 인종차별이고 실례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얼마나 불쾌하겠어?
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길게 늘어선 줄의 끄트머리에 가서 섰다.
숨을 몇 호흡 쉬다보니 그럭저럭 적응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한국이었다면 카운터에서는 주문을 받지 않고 완성된 음식을 내주기만 할테니 회전이 훨씬 더 빨랐겠지만 불행히도 여긴 무인판매기가 없어서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주문을 하기까지 거의 십여분 가까이를 기다려야 했다.
“어? 저 아저씨, 분명히 내 뒤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다가 나보다 늦게 주문한 사람이 먼저 음식을 받는걸 발견했으니, 욱하고 짜증이 나는 것도 꼭 내 잘못만은 아니겠지.
물론 나는 교양없이 즉각 목소리를 높여 항의하진 않았다.
주문한 메뉴마다 조리시간이 다를테니 뭐 그럴수도 있지.
메뉴판 가장 위쪽에 있던 기본 치즈버거 세트를 시켰는데 햄버거 조립하고 감자 튀기는게 뭐 그리 오래 걸릴 일인가 싶었지만 어쨌든 당장은 참았다.
“이봐요. 뭔가 실수가 있나본데, 내가 주문한건 언제 나오는겁니까? 잊어버렸나요?”
“기다리세요. 준비되는대로 나갈겁니다. 질서를 지켜주세요.”
“아니, 난 벌써 한참 전에 주문했다구요. 여기 영수증에 타임스탬프 안 보입니까? 나보다 더 늦게 주문한 사람들도 다 받았는데.”
“거 참. 치즈버거 세트였죠? 바로 해드리겠습니다.”
결국 못 참고 항의를 한건 주문 이후 거의 삼십여분이나 지난 시점에서였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못해 넘치도록 인내심을 발휘한거지.
이렇게 금방 되는걸 아직까지 안 준거면 분명 잊고 있었던게 맞나본데, 자기가 실수를 해놓고 사과 한마디 없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는건가.
카운터에서 언쟁을 벌이고 불쾌한 표정으로 종이봉투에 포장된 음식을 받아 돌아서니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몰려있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카운터에서 실수가 있었던거라고.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구태여 나서서 항변하기도 뭣해서 그냥 가게를 나오고 만다.
“아, 시발. 어쩐지 이상하더라.”
가게를 나와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목이 말라 콜라를 꺼내고 나서야 나는 진상을 알았다.
컵에 그려진 이거, 눈이 찢어진걸 표시한 이모티콘이잖아?
실수라기엔 너무 뻔뻔하더니, 고의로 무시한거였네.
나는 고개를 돌려 패스트푸드점의 위치를 기억해두었다.
그래, 주머니 가벼운 관광객에게 기부를 해주겠다 이거지?
마침 돈이 부족했는데 아무 죄책감없이 돈을 훔칠 곳이 생겨서 다행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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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방 안에서 뒹굴거리며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던 나는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더 견디지 못하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새벽과 달리 아직 돌아다니는 사람이 꽤 보이지만 음식점은 다 닫았겠지.
스물네시간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체인점이 아니었으니 그 가게도 아마 영업을 끝냈을거다.
“사장 잘못이라기엔 애매하지만... 아니지. 파트타임 직원을 잘못 뽑은것도 업보지 뭐. 큭큭.”
에테르 폼을 활성화하고 이동속도 보너스를 받으며 걸으니 도착은 금방이었다.
주차장에서 불이 꺼진 가게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적당한 빈 공간으로 쉬프트했다.
여긴 가로등의 불빛이 어슴푸레하게나마 들어와 사물을 분간할 수 있지만 금고를 열기 위해 저 안으로 들어가려면 불빛이 필요할 것이다.
아까 거리를 구경할 때 샀던 작은 손전등을 켜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장갑을 낀 손으로 계산대를 열고 안에 든 현금을 챙기자니 이건 낮에 가판대의 돈을 슬쩍할때와는 달리 누가 봐도 변명의 여지없는 도둑의 행색이라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태평양 건너 이역만리에 와서 온갖 진귀한 경험은 다 해보는구만.
“다 해서 대충 이삼백달러쯤 되는건가. 역시 영업 끝나고 정산을 해서 가져가는 모양이네.”
이걸론 영 분이 안 풀리는데, 안쪽 사무실에 있을 금고까지 다 털어야지.
나는 별 경계심없이 식당과 분리된 방의 문을 열었다.
삐걱, 문을 열고 손전등을 비추니 눈 앞에는 샷건을 겨누고 있는 웬 젊은 여자가 보인다.
어? 사람이 있어? 아니, 그보다 샷건?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도 사납게 눈을 빛내며 총구를 이쪽으로 겨누고 있는 젊은 여성의 얼굴이 그 짧은 순간에 눈을 거쳐 뇌리에 파고든다.
나는 순간적으로 공황상태에 빠졌지만 반사적으로 뒤쪽으로 쉬프트했다.
에테르 쉬프트의 최대 이동거리는 40미터나 되지만 도착지점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스킬만 사용한 것이라 몇 걸음정도 물러나는데 그쳤다.
그리고 그 직후, 타앙, 총성이 울린다.
진짜로 망설임없이 쏘는구만.
문을 열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거의 곧바로 쉬프트한건데.
문이 열려있는데다 나는 직선으로 뒤로 물러났기에 총구는 여전히 정확히 나를 겨누고 있었지만 에테르 쉬프트에 달린 방어막 덕분에 총알은 전부 튕겨나갔다.
“자,잠깐! 멈춰! 쏘지 마! 뭔가 오해가 있나본데...”
다급히 외치다가 말이 목구멍에서 턱 걸린다.
지금 난 도둑질을 하러 들어온거니까, 엄밀히 말하면 오해가 있는건 아니지.
다짜고짜 총부터 쏜 상대도 당황해서 중얼거린다.
그녀는 방어막에 총알이 튕겨나가는 것을 보지는 못했는지 내가 순간이동으로 총격을 피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 했다.
“수,순간이동? 아니, 텔레포터가 대체 뭐가 아쉬워서 도둑질을...”
“그게, 내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그 총부터 내려요. 난 무기가 없어요.”
두 손을 들고 말하니 상대는 총을 겨눈채로 경계를 풀지 않고 천천히 다가온다.
안에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여긴 가정집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라서, 불도 안 켜고 캄캄한 가운데 자고 있을줄은 몰랐지.
그녀는 내 가벼운 차림을 보고 무기를 숨길데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총구를 내렸지만 여전히 경계를 풀지는 않고 있었다.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에테르 블레이드로 간단히 제압을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무슨 진짜 강도도 아니고, 피를 볼 이유가 없다.
“오해? 무슨 오해요? 계산대를 여는 소리에 깬건데, 도둑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그... 돈을 훔친건 맞습니다. 맞는데, 어...”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되나.
저녁때 햄버거 먹으러 왔다가 인종차별을 당해서 기분이 상해 본때를 보여주러 왔다?
내가 들어도 참 궁색하기 그지없는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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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은 가게의 사무실에서 잠을 자던 여자의 이름은 베티 밀러라고 했다.
내가 그녀를 진정시키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간신히 경찰에 신고하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이능력자라는 점이 의외로 이 설득이 성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꼭 헌터가 되지 않더라도 이능력자가 돈을 벌지 못해 범죄에 빠져들 일은 흔치 않은 것이다.
베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일에 대한 복수로 여길 털러 들어왔다는건가요?”
“사소한 일이지만 정말 굉장히 기분이 나빴거든요.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배상을 요구할만한 큰 일도 아니고 해서...”
“당연히 배상을 요구할 수 있죠. 레이시즘은 민감한 문제라구요.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그 종업원 이름은 기억하나요? 명찰에 적혀있었을텐데. 내게 알려주면 삼촌에게 말해서 당장 자르라고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체적으로 배상금을 챙겨가려던 짓이 올바른건 아니에요. 알죠?”
“물론이죠. 반성하겠습니다. 그 종업원 이름은, 어, 마이크였나? 맞아, 마이크였어요.”
그녀는 인터넷 언론 여러곳에 기사를 써서 고료를 받아먹고 사는 프리랜서 기자라고 했다.
목표는 커리어를 쌓아 대형 언론사에 입사하는 것.
뉴욕 외곽의 아파트에서 사는데, 가스관에 문제가 생겨 해당 라인 전체에 대피명령이 내려진 탓에 잘 곳이 없어서 삼촌의 가게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된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인터넷을 쓸 때 그런 사고에 대해 지역 단신 뉴스를 본 기억이 나는 것도 같다.
“계산대에서 가져간 돈도 전부 돌려놓으세요.”
“아, 크흠.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머쓱한 기분이 들어 과장된 동작으로 주머니에 있던 지폐를 잡히는대로 전부 꺼내서 사무실 책상에 턱 올려놓았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돈도 얼마쯤 섞여있었겠지만 골라낼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람이 없는줄 알고 그 흔한 복면도 하지 않고 맨 얼굴로 당당히 들어왔으니 이건 빼도박도 못 한다.
목격자 입을 막거나 선처를 비는 수밖에.
죽이거나 위협해서 입을 막기엔 저 여자, 너무 예쁘게 생겼는걸.
내가 순순히 돈을 돌려주니 완전히 경계가 풀린 베티가 바깥의 디스펜서에서 콜라 두 잔을 따라와서 내게 한 컵을 내밀며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터 초이? 뉴욕엔 관광을 오셨나보죠?”
“뭐, 그런 셈이죠.”
“이해가 아주 안 가는건 아니지만, 욱하는 그 성격을 고치는게 좋을거예요. 이능력자는 범죄에 연루되면 가중처벌을 받는다구요. 아, 혹시 헌터로 일하시나요?”
“예. 여기선 아니고, 한국에서...”
그녀는 갑작스레 마주한 이 밤손님과 대화하는 것이 퍽 즐거운 것 같았다.
솔직히 나 같았으면 설령 사정을 이해해주고 신고없이 보내더라도 무서워서 이렇게 친근하게 대할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참 대범한 여자다.
직업이 기자라서 그런가?
다니는 회사 이름같이 구체적인 신상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도 긴장이 풀리면서 방금 전에 내게 샷건을 쐈던 이 아가씨가 친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한국에서 온 텔레포터? 어...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요. 혹시 오늘 낮에 게이트 관리국에 다녀오지 않았나요?”
딱 이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젠장.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블레이드를 발출해 베어버릴뻔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