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1부
건물 1층의 카페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해 요기를 하면서 계획을 다시 점검했다.
사실 뭘 더 점검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계획이다.
에테르 폼으로 은신하고 들어가서 기회를 보아 문서를 놓고 나오는게 전부인데 여기에 따로 계획이 어딨겠어.
일단 들어간 다음에는 죄다 즉흥적인 임기응변이지.
남은 샌드위치의 마지막 한 조각을 한 입에 털어넣고 씹은 후 식은 커피와 함께 꿀꺽 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집어들었다.
“25달러 30센트입니다.”
샌드위치 하나에 커피 한 잔을 마셨는데 우리 돈으로 거의 삼만원에 가까운 가격이 나왔다.
뉴욕물가가 웬만한 관광지 물가 뺨친다더니 무시무시하구만 그래.
물론 돈을 얼마를 더 내든 내겐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니 아무 저항감없이 값을 치렀다.
“여깄습니다. 아, 여기 화장실이 어디 있죠? 혹시 따로 열쇠가 필요한가요?”
“입구 왼쪽 코너를 돌면 바로 있습니다. 잠겨있지 않으니 자유로이 쓰세요.”
화장실에 들어가서 은신하고 나와야겠네.
입구에 숨겨진 CCTV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뉴욕 한복판에 있는, 그것도 꽤나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은 건물에서 화장실에 들어간 사람이 나오는지 일일이 다 확인하진 않겠지.
은신을 하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려다가 멈칫하고 잠깐 고민 후 계단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래도 엘리베이터를 타서야 은신을 한 의미가 없겠지.
사람들 틈에 슬쩍 끼어서 올라갈수도 있겠지만 비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는건 너무 위험하다.
건물 안내도를 보니 게이트관리국은 건물의 2층부터 꼭대기층까지 무려 아홉 개 층을 통째로 쓰는데, 중요한 부서는 전부 고층에 몰려있었다.
그럼 어디 있는지 나와있지 않은 국장실도 그 부근 어딘가에 있겠지.
십층짜리의 별로 높지 않은 건물 계단을 오르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4층에서 5층으로 올라올 때 계단이 창살로 막혀있기는 했는데, 완전히 벽으로 막혀있는게 아니라서 시야는 충분히 확보되었기에 쉬프트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 건물은 위로 높지 않은 대신 옆으로 꽤나 넓었다.
게이트 관리국은 한국의 이능관리부처럼 중앙센터의 역할도 겸하는 기관이라서 구색맞추기로나마 이능력 측정실과 헌터 기본훈련실도 구비하고 있을테니 이 정도 건평은 되어야 했나보다.
뭐, 안내도에 의하면 그런 대형 시설은 모두 지하에 있는 것 같았지만.
“음, 최선은 국장 집무실에다 놓고 오는거지만... 역시 그건 무리였나.”
미리 준비해온 자료, 그러니까 전택영 사장이 꾸미고 있는 테러음모와 그걸 한국 정부에서까지 묵인하고 암암리에 지원했다는 의혹이 담긴 진술서를 가방에서 꺼냈다.
꼭대기 층은 철문으로 닫혀서 잠겨있었는데, 에테르 블레이드로 잘라서 열고 들어가지 못할건 없었지만 그렇게까지 해야할 필요는 느끼지 못해서 9층을 서성이며 둘러본다.
잠겨있는 방을 굳이 열고 들어갈 필요는 없고... 아, 저기 열려있는 사무실이 있네.
내가 운 좋게 제대로 찾았나보다.
사무실 안에 따로 분리된 방이 하나 더 있고 그 방 안에 들어가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꽤나 고급스러운 책상 위에 명패가 하나 놓여있었던 것이다.
바이스 디렉터의 번역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높은 직위가 맞겠지.
나는 그 책상 위에 잘 보이도록 진술서를 펼쳐놓고 이동식 저장장치도 옆에다 내려놓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 같은데, 돌아와서 발견하면 아마 비상이 걸리겠지?
어쩌면 건물을 봉쇄하고 침입자를 찾기 위해 수색을 할지도 모른다.
괜히 호기심에 이것저것 건드려보다가 흔적을 남길수도 있으니 바로 빠져나가는게 좋겠어.
“응? 이봐, 제이크. 내 방 문을 열어놨었나?”
“글쎄요. 모르죠 뭐.”
“젠장. 바깥에서 피자를 먹고 있었잖아. 냄새가 한번 배이면 잘 안 빠진다고. 원목 가구에다 최고급 쇠가죽 소파란 말이야. 신경쓰라고 내가 몇 번이나 강조를 했는데.”
“저한테 그러셔도 별 수가 없습니다. 전 시키신 일을 하고 방금 복귀했는데요.”
어이쿠, 급히 몸을 비켜섰기에망정이지, 하마터면 부딪힐뻔 했네.
늦은 점심이라도 먹고 오는건지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백인이 열린 방문과 사무실 테이블 위에 놓인 피자박스를 보면서 따라오던 부하직원을 구박한다.
심드렁한 반응이 돌아오는걸 보니 평소 별로 권위있게 군기를 잡는 스타일은 아니었나보네.
그들이 사무실 문을 닫고 들어온 탓에 좀 곤란해졌다.
이걸 열고 나가면 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
이걸 어쩌지, 하고 잠시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방 안으로 들어갔던 중년인이 내가 올려놓고 나온 서류를 발견했는지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뛰쳐나온다.
“제이크! 지금 바로 이 건물을 봉쇄하게!”
“락다운이요? 갑자기?”
“누군가 내 집무실에 침입했어. 난 삼십분 전에 나왔지만 바깥의 사무실엔 겨우 오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지. 아직 건물을 빠져나가지 못했을지도 몰라.”
“알겠습니다. 탐지능력자의 파견도 요청하겠습니다. 삼십분이면 도착할겁니다.”
농담에 가까운 어조로 빙글거리던 제이크라 불린 부하도 상사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느꼈는지 딱딱한 목소리로 복명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다행히도 나는 그 틈에 열린 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탐지계열의 이능력자가 와서 수색을 한다면 적외선이나 열감지 탐지도 벗어나지 못하는 에테르 폼의 은신은 간단히 파훼될테니 그 전에 여길 나가야 한다.
아, 그런데 하필 계단으로 향하는 문도 그새 누가 닫아놨네.
주변을 둘러보니 이쪽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열고 나가기도 좀 애매한데.
빠르게 몇몇 사람들을 호출해 지시를 내리던 제이크는 이젠 전화기를 붙들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는데, 아까 사무실 안에서의 태도와 달리 의외로 직위가 높은 사람인 모양이다.
“지금 바로 특수군 대기조를 이쪽으로 보내! 은신계열, 혹은 공간계열 이능력자가 침입했다. CCTV, 블랙박스 가릴 것 없이 인근의 모든 영상을 중앙통제실로 보내고. 바로 움직여!”
“거기, 뭐하는거야? 문을 전부 닫으라고!”
“단순한 투명화 능력이 아니라 벽을 통과할 수 있는 이능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기체로 변해서 빠져나갔는지도 모르죠.”
“그런 이능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쯧, 아직 발현기전에 대해 밝혀진게 없으니 어떤 기상천외한 이능이 나와도 이상할건 없겠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봉쇄해.”
어... 이거 일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돌아가는데?
아무래도 내가 연방 게이트 관리국의 보안과 비상대응체계를 너무 얕보고 있었던 것 같다.
몰래 책상에 서류를 올려두고 태평하게 귀신놀음을 할 상대가 아니었어.
깜짝 놀랄것까진 예상했는데 저렇게 능숙하고 기민하게 대응할줄은, 하물며 이런 상황에 대비한 비상대응체계가 미리 갖춰져 있을줄은 몰랐거든.
건물 안에 갇힌 꼴이 된 나는 점점 초조해지는걸 느끼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 헤맸다.
젠장, 중요한 정보를 줬는데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될걸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드는거야?
“아, 혹시 모르니까 창문도 닫아. 체구가 작은 사람은 빠져나갈수도 있는 크기야.”
“여긴 9층입니다. 은신 이능이 비행게열의 이능으로 발전할수도 있을까요?”
“전혀 다른 계열의 복수 이능력자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잖아.”
창문을 닫으라는 지시에 나는 아직 열려있는 탈출로가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저들의 우려와 달리 훤칠한 키에 헌터다운 꾸준한 근력단련으로 평균 이상의 당당한 체구를 가지고 있는 나는 열린 창문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만큼 작지 않았지만 어쨌든 시야가 열려있는 이상 창 밖의 허공으로 쉬프트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으니까.
순간이동된 직후 땅으로 빠르게 낙하하겠지만 에테르 필드를 펼쳐 쿨다운 타임을 전부 초기화하는 기능을 이용해 곧바로 지상에 다시 쉬프트하면 된다.
좋아, 이론상 충분히 가능해.
짧은 순간에 머릿속으로 대강의 계산을 마친 나는 최악의 경우에도 에테르 쉬프트에 부가기능으로 달려있는 방어막 덕분에 내가 크게 잘못될 일은 없으리라 확신하고 계획을 실행했다.
건물 밖의 9층 높이에 해당하는 허공으로 쉬프트하니 발 아래가 휑하다.
즉시 에테르 필드를 전개해 쿨타임을 초기화했지만 그새 벌써 몇 미터나 떨어지고 있었다.
아래를 바라보면서 빠르게 내려설 곳을 찾아 훑었다.
차도는 당연히 안 되고, 보도블럭이 깔린 인도도 보행자가 많아서 좀 곤란해.
거의 절반 가까이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인적이 드문 골목을 목표로 쉬프트할 수 있었다.
쿠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시멘트로 된 바닥이 쩍 갈라진다.
“이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낙하하는 운동에너지를 무효화하진 않나보군.”
달리면서 에테르 쉬프트를 사용해본 적은 꽤 많았는데, 그 정도로는 체감이 잘 되지 않았지.
역시 에테르 쉬프트는 순간적으로 워프게이트를 여는 원리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만약 허공으로 이동하고 지체없이 다시 지상으로 쉬프트했다면 아무런 충격없이 사뿐하게 내려설 수 있었겠지만, 이미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쉬프트하면 그 운동에너지는 어디로 사라지는게 아니라 단순히 통로를 통과한 것처럼 내 몸을 매개로 그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특성 덕분에 얻은 무한에 가까운 주문력을 계수로 하는 3초짜리 방어막이 있으니 이번엔 문제가 안 되었지만, 반드시 기억해 놓아야 할 사항이었다.
“오대기 느낌인가? 엄청 빠르네.”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새 밴을 타고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와 건물 입구에 차단선을 치고 안으로 돌입하는 군인들을 보면서 나는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전화로 지원요청하는걸 내가 방금 봤는데, 한 오분은 됐나?
이 정도면 바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콜 떨어지자마자 달려왔다는 소린데.
저 중에 탐지능력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비태세가 장난이 아니다.
나는 에테르 폼을 해제하고 대낮의 난데없는 소란에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틈에 섞여들었다.
“뭐야? 저기서 테러라도 일어난건가? 아니면 인질극?”
“글쎄. 저건 뉴욕 시경의 스왓 팀이 아니라 군인들 같은데? 아, 내가 알기로 저 건물은 연방 게이트관리국에서 통째로 쓰는 건물이야. 신비로운 외계유물을 다루다가 뭔가 사고라도 일어난게 아닐까? 왜, 에너지가 폭주했다던가, 괴물들이 쏟아져 나온다던가.”
“큭큭큭, 자네 영화취향은 잘 알겠군. 하지만 게이트 관리국은 연구소가 아냐. 그냥 이능력자 관련 사무를 처리하는 책상물림 공무원들이라고.”
지나가다가 구경꾼에 합류한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며 현장을 바라보았다.
이거 이 정도로 일이 커졌으면 뉴스에도 나오겠네.
진술서 내용을 읽어보면 자기네를 도와주려고 한걸 알아차리긴 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한국정부와 정보를 공유하며 거래를 하려고 하면 내 신상이 특정될 수도 있겠어.
역시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탓이다.
돌이켜보니 계단을 올라갈 때 4층과 5층이 철창으로 봉쇄되어 있었잖아?
그렇다면 5층 이상은 계단으로 오르내리지 않고 오직 엘리베이터로만 오갈수 있게 해놓았다는 뜻인데 그 과정에서 출입을 통제하는 어떤 조치가 더 되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외부의 민간인사가 들락거릴수 있는 곳이 4층까지라면 9층의 중요 간부 집무실 책상 위에 떡하니 서류를 올려놓고 나온건 그야말로 관리국의 보안체계를 농락한거나 마찬가지지.
“어쩌면 쓸데없는 짓을 한건지도 모르겠어... 양심제보를 위해선 그냥 신분을 숨기고 우편으로 부치는 정도로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야.”
재미는 있었지만.
씁쓸하게 중얼거리면서 사건현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린다.
일을 마치면 인근 관광이나 좀 하다가 공항으로 돌아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찾아서 숨어들 생각이었는데, 일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니 아무래도 미국에 좀 더 머물러야 할 것 같다.
만약 관리국에서 내가 놓고간 서류의 내용보다는 침입사실 자체에 주목하여 공개수사를 벌일 낌새가 보인다면 위험을 좀 더 감수하더라도 접촉을 해보는게 나을 것이다.
여행을 간다고 나온 기간은 넉넉하게 남았으니 아직 여유는 충분했다.
가만있자, 달러가 얼마나 남았지?
일단 숙소를 잡고 상황을 지켜보면서 고민을 좀 더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