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1부
대명상사는 거창하게 말해 무역회사지, 사실상 보따리상에 가까운 아주 작은 법인이었다.
사장 이하 열 명에 못 미치는 직원들이 사무실 하나를 차려놓고 미국과 동남아, 중국 등지를 오가며 일을 하는데, 직접 상품을 구입해서 판매하기도 하고 대리구매 및 거래중개도 하며 심지어 작은 생필품공장 하나도 운영하는 등 하는 일이 대중없었다.
이성욱 대리의 말에 의하면 국내에 이런 회사가 한둘이 아니란다.
“그래도 설마 마약밀매도 하고 있을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하아. 이런 구린 일을 한다면 월급이라도 많이 주지, 월 이백을 주면서 부려먹더니. 젠장. 아, 오해하지 마세요. 돈을 많이 받는다고 진짜 하겠다는건 아니구요. 어, 그러니까 제 말은...”
“무슨 말인지 압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성욱 씨 말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휴우, 그럼 이제 어쩌죠? 뉴욕에 착륙하는대로 바로 공항경찰에 신고를 해야할까요? 아, 어차피 다시 인형에 집어넣고 꿰매지 않는 이상 걸릴게 뻔하긴 하지만.”
“당연히 그래야죠. 신고를 하면서 신변보호도 따로 요청하는게 좋을겁니다. 미국 현지에도 이 마약을 받기로 되어있는 범죄조직이 있을 것 아닙니까. 마피아들 잔인한거 아시죠?”
“으으, 회사는 어떻게 될까요?”
“그야 풍비박산이 나겠죠. 어디까지 엮여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사장은 알고 있지 않겠습니까? 아, 함께 탑승한 당신 상사는 어떻습니까? 그가 다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모르겠습니다...”
멘탈이 깨져서 ‘이제 겨우 월급 두 번 탔는데, 회사가 날아가게 생겼어...’하고 중얼거리는 청년을 앞에 두고 나는 나대로 입을 다물고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심술궂은 과장이 인형 속에 숨겨진 물건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직원을 혼자 내려보내 수량을 체크하게 하는 위험을 감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자칫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겨 인형이 파손되고 탄로가 나기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두 명 다 모르고 있었다고 하기엔, 또 사장이 그런 위험을 감수했을까 싶은 것이다.
음, 뭐, 뉴욕에 도착해서 착륙하면 알겠지.
“이 인형들, 대명상사라고 했던가? 당신네 회사에서 생산한겁니까?”
“아뇨. 공장을 돌리는 법인이 따로 있습니다. 거기 사장이 우리 사장님하고 동향 친구랬나, 그럴겁니다. 미국 바이어한테 전달하고 계약을 따 오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보면 아시겠지만 이건 진짜로 평범한, 아니 사실 퀄리티도 참 형편없는 인형 아닙니까.”
“그건 그렇네요. 중국공장에서 대량으로 산다면 모를까, 인건비도 비싼 한국에서 굳이?”
“아, 제가 알기로 우리 거래처 공장은 중국에 있습니다.”
중국에서 생산된 마약을 한국으로 반입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수출하는건가?
한국이 동아시아의 마약유통 허브라는 얘기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한국 여권이 파워가 세서 밀입국용으로 수요가 많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중간에 경유지로 한국을 거치면서 택갈이로 빡빡한 검역을 피해가려는 셈인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공황상태에 빠진 이 불쌍한 청년 신입사원을 진정시켜 돌려보내야겠다.
나는 대명상사의 이름표가 붙은 다른 가방에서 인형을 하나 더 꺼내 배를 갈라 안에서 똑같은 봉투를 끄집어내며 멀거니 내 동작을 지켜보고 있는 이성욱 대리에게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신고한 이후 잠깐은 조사를 받으셔야겠지만 이성욱 씨 본인에겐 별다른 문제가 없을겁니다.”
이 순진한 청년은 반드시 신고하고 아는대로 증언하겠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분위기와 상황 때문인지 그는 나를 완전히 경찰이나 그에 준하는 수사관으로 믿는 것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에게 문제가 생길지 아닐지에 대해서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알았든 몰랐든 마약을 외국에서 반입해 들여온 운반자 본인이잖아?
여러모로 정상참작을 받아 면책이 될지도 모르지만 확실한건 아닌데... 뭐, 내 일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하는걸 보니 내 말대로 경찰에다 신고는 꼭 할 모양이니, 그거면 됐지.
“올라가 보세요. 너무 오래 있으면 의심할테니까. 아, 티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아무말 않고 인형 개수만 정확히 확인했다고 하겠습니다.”
이대로 위에 올라가 화물칸에서 수상한 사람을 발견했다고 승무원에게 신고할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그럴 위험이 크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이성욱 대리를 승객칸으로 돌려보내고 가방을 다시 정리해 넣었다.
다섯 개의 가방에서 인형 하나씩을 빼서 검사해봤는데 모두 마약으로 추측되는 가루가 감춰져 있었으니 다른 인형들도 모두 그럴거라고 추정하면 그 양이 꽤나 많은 셈이다.
주워들은 말로는 고품질 마약은 몇 킬로그램 단위만 되어도 가격대가 수십억대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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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깨다 하다보니 어느새 비행기는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엔진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몇 시간이고 계속 듣다보니 또 어느 정도는 적응이 되더라.
화물칸 안에는 스피커가 없는데다 소음도 심해서 여기까지 기내방송이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나는 비행기의 기울기에서 천천히 하강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혹시 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지 점검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니 이내 랜딩기어가 펼쳐지고 바퀴가 땅에 닿는 것이 느껴지고 활주로를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가방을 등에 메고 에테르 폼을 활성화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고 승객들이 내린 후 화물칸이 열릴때까지는 이십여분이 더 걸렸다.
화물칸이 열리고 공항 직원들이 장비를 동원해 짐을 내리려 할 때 나는 밖으로 쉬프트했다.
“어디보자... 저 밖으로 나가면 될 것 같은데...”
활주로를 걸어 공항 건물로 들어가니 대도시의 공항답게 사람이 우글거린다.
잠시 헤매다가 간신히 밖으로 나가는 출입구를 발견했다.
그냥 화장실같은데 들어가서 에테르 폼을 해제하고 자연스럽게 인파에 섞여나와도 상관없겠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거니까 되도록 공항 CCTV에 안 잡히는게 낫겠지.
그 때 출입국심사대 쪽이 소란스러워지면서 공항의 경비대가 우르르 뛰어가는게 보였다.
아, 지금 막 신고를 했나보네.
이거, 내일이나 모레쯤엔 뉴스에 나오겠구만.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호기심이 들었지만 그거 구경하자고 저쪽으로 들어가는건 좀 아니지.
모쪼록 일이 잘 풀려서 우리 이 대리가 큰 고초를 겪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공항을 나왔다.
음, 저게 도심까지 나가는 버스가 맞겠지?
여권은 발급조차 안 받았고 달러돈을 환전하지도 않았으니 천상 무임승차밖에 수가 없다.
배낭을 앞쪽으로 돌려메고 사람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재빨리 버스에 오른다.
사방에서 들리는 다양한 악센트의 영어와 서양인 특유의 노린내에 내가 지금 미국에 밀입국했다는 실감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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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능력자 및 외계업무를 전담하는건 국토방위부 산하의 연방 게이트 관리국이었다.
머지않아 독립부처로 승격된다는 이야기가 벌써 몇 년 전부터 돌았고 실제로 국장은 웬만한 중요부처의 장관 못지않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무척 중요한 기관이다.
그 기관의 본부가 뉴욕의 도심 한복판에 있었다.
여기 게이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위치를 이렇게 정했을까 싶다.
“게이트 관리국? 아, CGA. 30달러면 갑니다.”
“삼십불? 아무리 생각해도 바가지같은데... 아, 오케이, 오케이. 서티 달러.”
택시기사의 석연찮은 요구에 따로 따지지 않고 십불짜리 지폐 석 장을 턱하니 내놓은건 저게 내 돈이 아니라 가판대에서 슬쩍 집어온 돈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 여럿 살리러 온 참이니까 약 백 달러정도 훔친건 용서가 되겠지?
그렇게 멋대로 억지합리화를 하고 가책을 지워버린 참이다.
기왕이면 은행에서 돈을 넉넉히 환전해왔으면 좋았을텐데, 더 중요한걸 챙기느라 깜빡했지.
배낭 속에 따로 챙겨온 서류봉투 안에는 울릉도 게이트기지 남쪽 평원에서 벌어졌던 쉴롭사태의 전말과 억제기의 기능, 외양까지 자세히 묘사된 증언이 들어있었다.
나아가 네바다 게이트 전진기지 인근에도 억제기가 있으며 최근 그걸 파괴해 개척을 늦추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고발까지.
한영사전을 뒤져가며 애써 작성한 문서다.
게이트 관리국에 은신 상태로 들어가서 국장 집무실 책상 위에 이걸 올려놓고 나오면 끝.
조악하고 단순한 계획이지만 사실 이것 이상으로 뭘 할게 없다.
믿으면 여러 사람 살리는거고, 안 믿고 무시하면 대가를 치르는거고.
억제기를 찾아 지키기만 해도 테러계획엔 애로사항이 꽃피는데, 그 정도에 막대한 비용이 들 리도 없으니 웬만하면 이 출처모를 증언 하나로도 방지가 가능할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관광객이죠?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 가깝긴 한데, 길이 막혀서. 한 시간 정도? 아, 괜찮다면 라디오를 틀어도 될까요?”
바가지를 좀 씌운게 아닌가 미심쩍지만 택시기사의 태도는 무척 친절했다.
억양이 약간 낯설긴 하지만 그럭저럭 알아듣는데 지장없는 영어라서 대화를 나누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나는 수동적인 리액션 말고는 딱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유쾌하게 떠들어댄다.
“보통 관광객들이 찾는 곳은 몇 군데로 정해져 있는데, 손님은 좀 특이하시네. 혹시 파크사이드 호텔에 묵습니까? 거기가 바로 CGA 옆 건물인데.”
“글쎄요. 아직 숙소는 안 정해놔서요.”
“주머니사정이 괜찮더라도 거긴 피하는게 나을겁니다. 서비스가 개판이라고 악평이 자자한데, 용케도 안 망하고 계속 영업을 한단 말이야. 자고로 서비스업이라는건... 아, 잠깐만요. 들으셨습니까? 한국 관련 뉴스가 나오는 것 같은데.”
“응? 그래요? 그럼 소리 좀 키워주실래요?”
이렇게 떠들어대면서 용케도 라디오 뉴스까지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네.
한국 뉴스라니까 나도 호기심이 들어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앵커의 발음은 택시기사의 발음보다 훨씬 더 또박또박하고 선명해서 거의 놓치는 부분 없이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약 한 시간 전, JFK 공항에서 발각된 생물학 테러미수 소식을 속보로 전해드립니다. 인천발 뉴욕행 비행기로 입국한 한국인 승객이 자신의 짐에 마약이 숨겨져있다는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아니, 잠깐만. 마약이 숨겨져 있다는 신고라는걸 보면 이거 그 일이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생물학 테러시도라니.
어... 확실히 내가 그 가루의 정체를 확인한건 아니었지.
인형 속에 은밀히 숨겨져 있으니까 밀가루는 아니겠다 싶었고 포장된 모양새를 보고 영화나 드라마의 마약밀매 장면을 떠올려 섣불리 단정했으니까.
하지만 생물학 테러라니,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앵커는 심각한 목소리로 ‘마약으로 신고된 것은 세균으로 확인되었으며 현재 공항은 봉쇄된 상태다’라면서 ‘정확한 사실은 추가정보가 들어오는대로 보도하겠다’고 말을 맺었다.
택시기사의 약간 떨떠름한 목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저... 손님, 한국에서 오셨다고? 혹시 오늘 오신거요?”
“그,그렇긴 한데, 저 뉴스랑은 상관없습니다. 이른 아침에 도착했거든요.”
“오, 그럼 다행이고. 세균병기라니, 참 무시무시한 일이군요. 범인이 자수를 했으니 망정이지, 자칫 큰 일이 날뻔 했어요. 하여튼 테러리스트 놈들은 싹 다... 아, 다 왔네요. 저 앞의 블록입니다. 왼쪽에 빌딩 보이죠? 일층에 카페 있는거. 저깁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내려주시겠어요?”
쥐뿔도 모르면서 마약인지 확인하겠답시고 포장을 뜯어보지 않았던게 천만다행이다.
수호자의 맹약에 천사의 단지까지 있으니 최악의 경우에도 내가 잘못될 일은 없었겠지만 자칫 보균자로서 본의아니게 테러에 일조할뻔 했네.
대형참사를 나도 모르는새 막게 된 셈이다.
문득 잔뜩 겁을 먹었다가 내가 안심시켜 신고를 종용한 이성욱 대리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약하고는 심각성 자체가 다른 사건이니 그 친구가 고생을 많이 하겠네.
참 팔자가 꼬인 양반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미안하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뭘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