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1부
배를 열고 안에 차있던 솜뭉치를 헤집던 내 손에 플라스틱 백 하나가 걸렸다.
와, 설마 진짜 마약밀수의 현장을 잡은건가?
물론 난 마약이라곤 전현생 통틀어 생전 본 일이 없으니 손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본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설마 이게 밀가루일리는 없지.
인형 안에 숨겨져있는 투명한 비닐로 싸인 흰 가루라고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마약 말고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잖아.
눌렀을 때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팽팽하게 부푼 흰 덩어리를 보면서 나는 고민했다.
어째서 나는 한번 일에 착수했다 하면 미리 계획한 일만 얌전히 하는 법이 없는가.
이불 밖은 위험하다더니, 아닌게 아니라 요 근래엔 어째 집 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리는 것 같다.
“공항 보안이 이렇게 허술해도 되나. 이 안에 폭탄을 가져올수도 있었다는거 아냐? 이러다 비행기 테러라도 한번 나야 정신을 차리지. 아, 그러고보니 그게 없었구나.”
게이트가 열리고 괴수의 침략을 받은게 냉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90년대 중반.
교과서에서 배운 바로는 96년도에 첫 침공이 있었는데, 기습적인 사태에 인명피해가 꽤 많이 나오긴 했지만 군경이 동원되기 시작하고서는 얼마 걸리지 않아 수습되었다고 한다.
민간에 총기가 많이 풀린 나라에선 시민들이 자체 화력으로 쓸어버리는 일도 있었다더라.
이후 곧바로 게이트를 넘은 군대가 방어막의 존재를 확인하며 전멸한 것이 그 해 말이고, 이능각성자와 방어막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본격적으로 개척이 시작된게 97년도였다.
음, 생각해보니 내가 잘 몰랐을뿐 그럴수도 있겠구나 싶어 중얼거렸다.
“나야 항공보안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전생에서도 9월 11일의 테러 이전까지는 국제선 비행기의 물품반입이 그렇게 까다롭지 않았다고 어디서 얼핏 들어본 것 같아...”
그리고 현생의 역사에서, 미국은 중동의 정세에 별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으니까.
물론 석유는 여전히 산업의 피요 중요한 전략자원이었지만 게이트 너머에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행성 하나가 통째로 있는데 다른데 눈길 돌릴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세계는 외계개척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래서 세상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뭐, 게이트 이권을 놓고선 공식적으로 기록 못 남길만한 지저분한 일도 많았겠지만.
“쯧, 비행기표 끊고 탄게 아니라서 신고하기도 좀 곤란한데...”
아직 도착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이걸 어쩔지는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다.
찢어진 인형을 수습하여 가방에 도로 집어넣고 일어났다.
아까 음료수를 마셔서 그런지 요의가 차오른 것이다.
어차피 미국에 도착할때까지 화장실을 한번도 가지 않고 참을수 있을거라곤 생각 안 했으니 크게 신경쓰지 않고 마셨는데, 그래도 긴장은 좀 하고 올라가야한다.
설령 승무원과 마주치더라도 세자릿수나 되는 승객의 얼굴을 일일이 다 기억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일이 또 어떻게 꼬일지 모르니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겠지.
외국에선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닉스와 한국정부는 내 이능력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비행기에서 타지도 않은 승객이 있었다거나 유령이 목격됐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돌면 최우선으로 용의선상에 오를건 뻔한 일이다.
에테르 폼을 활성화하고 좁은 계단 통로를 올라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화물칸과 이어지는 통로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어서 별 탈 없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만있자, 화장실이... 아, 안내표시가 있네. 저 쪽이구나.
슬쩍 둘러보니 화장실 안은 물론이고 주변에도 마침 사람이 없어서 이대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아, 재빨리 칸 안으로 들어가 일을 해결하고 나왔다.
화장실과 가까운 좌석의 승객이 귀가 유난히 밝은 사람이라면 혹시 아무도 들어가거나 나오지 않는 빈 화장실에서 홀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는걸 눈치챌수도 있겠네.
그 정도야 뭐, 무시해도 좋은 수준의 위험이다.
“아니, 그게 될 리가 없잖습니까. 비행기가 뜨면 화물칸은 당연히 잠기는거라구요. 승객이 멋대로 들락거리게 두면 오히려 보안 개판이라고 항의를 할 사안인데...”
“어허. 한번 물어나 보라니까? 미국 드라마나 영화 보면 잘만 들어가더만.”
“그건 영화니까 그렇죠! 과장님, 진짜 곤란합니다.”
“해봤어? 해보고나 말해. 급히 확인할 것이 있으니 잠깐이면 된다고 부탁하면 사람이 유도리가 있지, 설마 끝까지 안 된다고 하겠어?”
“설령 확인을 한대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겁니까? 수량이 안 맞으면 애초에 실을때부터 실수가 있었다는건데, 이 하늘 위에서 알아차린다고 해봤자 손을 쓸 방법이 없잖아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 그럼 내가 부장님한테 지금 뭐라고 대답을 해야 돼?”
“비행중이라 무선 네트워크가 불안정해서 못 읽었다고 하면 되잖습니까?”
“안타깝지만 이미 메신저 잘만 오갔어. 잔말 말고 후딱 다녀 와.”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가려는 내 귀에 화물칸 운운하는 소리가 들려 잠깐 멈췄다.
왠지 얼굴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아까 공항에서 봤던 회사원들이다.
그때와 똑같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부하직원도 경솔했던 점이 없잖아 있던 공항에서의 언쟁과 달리 이번에는 명백히 상사의 일방적인 억지다.
하지만 계급은 계급이라, 승패는 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연신 반박하던 부하직원은 결국 영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실례합니다. 어... 음... 죄송하지만 화물칸에 잠깐 내려갈 수 있을까요?”
“예?”
“아니, 그게, 원칙상 안 되는 일인건 압니다만 지금 급히 확인할 것이 있어서요. 중요한 샘플에 문제가 생겼다는 보고가 막 들어왔는데, 어,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어? 뭐야, 저렇게 쉽고 간단하게 승낙이 되는 일이었나?
비행기 타고 날아가다가 화물칸 내려가볼 일이 있어야 알지.
이건 좀 당황스러운 일이다.
저대로 내려가면 내가 미처 치우지 않고 온 흔적들을 반드시 발견할텐데.
두꺼운 패딩점퍼와 먹을거리를 싸온 가방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올라왔던 것이다.
화장실 다녀오는 그 잠깐 사이에 뭔가 일이 생길줄 누가 알았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나는 안내하는 스튜어디스와 그 뒤를 따르는 젊은 회사원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좌석번호가 G15번하고 16번... 아, 끝에서 세 번째 칸에 있을겁니다. 결속된 벨트는 이 열쇠로 열 수 있을겁니다. 혹시 또 필요하신건 없나요?”
“아뇨, 감사합니다. 무리한 부탁이었을텐데. 제가 확인 후 알아서 다시 잠그고 가겠습니다.”
“아,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럼 부탁드릴게요.”
화물칸으로 내려가는 좁은 계단통로에서 그런 대화를 나눈 스튜어디스가 다시 돌아나온다.
와, 저거 저래도 되는건가 몰라.
아니 뭐, 나야 두 명보단 한 명이 덜 부담스러우니 좋지만...
혹시 안에서 다른 승객의 수하물을 실수 혹은 고의로 훼손하기라도 하면 나중에 그 책임소재를 어떻게 가리려고 저렇게 태평하게 혼자서만 내려보내는지 모르겠다.
보통은 별 일 없이 지나가겠지만 이 항공사, 관리자 책임의식이 없어도 너무 없는데?
돈 주고 표 사서 탄 것도 아니면서 항공사의 일선 승무원 관리에 대한 불평을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젊은 회사원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모습을 드러내고 어떻게든 설득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와서 에테르 폼을 비활성화했다.
은신이능 있다고 광고할 것도 아니고, 허공에서 신형이 나타나는 광경을 굳이 눈 앞에서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 걸음 더 따라갔는데도 앞서가던 사람은 아무 낌새도 못 느끼고 돌아볼줄도 모른다.
거 참, 어지간히도 둔한 친구구만.
에테르 폼을 활성화했을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발소리도 저벅저벅 나고 인기척도 있을텐데.
내가 무슨 기척을 죽이고 은밀히 움직이는 기동법을 배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몰라?
결국 나는 먼서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턱, 짚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흐어억! 어? 누,누구세요?”
갑자기 어깨에 손이 올라오니 그는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하면서 펄쩍 뛰고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선글라스에 후드, 마스크까지 낀 내 얼굴을 보고 눈을 끔뻑거린다.
놀리서 기겁을 한 것이 부끄러운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은 그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건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차차 설명드릴게요. 수하물을 확인하러 오셨다고?”
“아, 예. 화물칸을 관리하는 분이십니까? 하하하, 갑자기 튀어나오셔서 깜짝 놀랐네요.”
어... 그런 일을 하는 승무원도 있나? 처음 듣는 얘긴데.
그야 누군가 주기적으로 확인을 하면서 관리를 하긴 하겠지만, 전담 보직까지 있을까?
나는 가타부타 대답을 하지 않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화물칸으로 향했다.
사실 저 아저씨도 진심으로 그런 소리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얼굴에 드러난 부분보다 가린 부분이 더 많은, 누가 봐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차림새의 청년이 비행기 화물칸 입구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거잖아.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느릿느릿 내키지 않는 듯 걸음을 옮긴다.
그 바짝 긴장한듯한 움직임하며 내가 바닥에 방치하고 왔던 가방과 점퍼를 발견하고도 아무 내색도 않는 것 하며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구만.
“저,저기, 선생님. 전 이만 다시 올라가봐도 되겠습니까...?”
“뭐 확인할거 있다면서요. 용건은 마치고 가셔야죠.”
“하,하하하... 들으셨군요. 별 거 아닙니다. 그냥 흔한 꼬장이었죠. 사실 제 상사와 함께 상품샘플을 가지고 출장을 가는 길인데, 그 분이 제가 가만히 앉아서 쉬는 꼴을 못 봐서요.”
“뉴욕으로 샘플을 갖고 가시는거면, 무역쪽 일을 하는 분인가봐요?”
“샘플이라고 해봐야 솜을 채운 동물인형 몇 종륩니다. 사실 항공운송으로 옮길만한 가치가 있는 상품이 맞는지도 애매해요. 저야 그냥 하라니까 합니다만. 하하하.”
잠깐만, 인형?
일이 또 이렇게 돌아가는건가.
공교롭게도 이 아저씨가 바로 마약으로 의심되는 흰 가루가 들어있던 짐의 주인인 것 같다.
나는 걸음을 빨리 하여 몇 걸음만에 그를 앞서가 먼저 가방을 끄집어냈다.
화장실 때문에 자리를 비우기 직전 대강 쑤셔넣고 수습했던 인형을 꺼내 갈라진 배를 벌린다.
“어? 그거 저희 가방인데... 아니, 어떻게 알았어요, 제 가방 거기 있는거? 잠깐, 멋대로 꺼내시면 안 돼요. 잘못해서 찢어지기라도 하면 곤란... 응?”
영문도 모르는채 따라온 회사원이 인형을 거친 동작으로 끄집어내는 내게 항의를 하려다가 뱃속에서 튀어나온 투명한 포장뭉치를 보고 말문이 막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린다.
저 아저씨가 연기를 엄청 잘 할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진짜 몰랐을 가능성이 높겠지?
나는 의식적으로 사나우면서도 딱딱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자, 무슨 일인지 납득하신 것 같네요. 그럼 설명을 좀 해주셔야겠죠? 그러니까 성함이...”
“대,대명상사 이성욱 대립니다.”
“이성욱 씨. 지금 보니 인형의 안에 뭐가 숨겨져 있었는지 모르고 계셨던 모양인데요.”
“맹세컨대 전혀 몰랐습니다! 전 대명상사에 입사한지 겨우 삼개월밖에 안 됐다구요. 맙소사, 마약 밀수라니. 어쩐지 하는 일도 별로 없는데 사장은 묘하게 여유롭고 회사에 현금도 안 부족한 것 같더라니. 세상에, 내가 대체 무슨 일에 발을 들인거야?”
“삼개월이요? 대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요샌 입사 3개월차에 대리 달아주고 그러나?”
아, 그러고보니 영업직의 경우엔 밖에 나가서 무시당하지 말라고 한 계급씩 높여서 명함을 파주고 그런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이성욱 대리는 마치 자기변호라도 하는 것처럼 열성적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저희 회사, 아니 대명상사는 그렇게 체계적인 회사가 아닙니다. 시스템도 일관적이지 않고, 쉽게 말해 그냥 콩가루예요 콩가루. 근본없는 중소기업들 중에서도 운영을 날림으로 하기론 아마 첫 손에 꼽힐겁니다. 제가 아는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번 가볍게 쿡 찔러봤는데 지나치게 협조적이라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다.
보아하니 아까 날 밀항자나 테러범 등 위험한 범죄자로 보고 벌벌 떨던 이 아저씨는 이번에는 거꾸로 경찰이나 항공보안관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부터 자기네 회사를 삼류 구멍가게니, 수상쩍니 하면서 욕하는게 살짝 안쓰럽다.
겨우 삼개월 일했다면서 그 짧은 기간동안 목구멍에 풀칠하려고 받은 설움이 꽤나 컸나본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