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1부
출장이 너무 잦다며 안쓰러워 하시는 어머니에겐 죄송한 일이지만, 나는 집에서 딱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부터 짐을 챙겨서 다시 집을 나섰다.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간다고 둘러댔는데, 증인도 이미 섭외가 끝났다.
청수 고등학교의 28기 졸업생들은 이백여 명 중 나를 포함해 열 다섯 명이 이능을 각성했는데, 이건 평균치인 5퍼센트를 크게 상회하는 기록이었다.
그 열 다섯 명 중 헌터자격을 따고 헌터로 활동하는건 내가 알기로 딱 세 명.
물론 헌터 쪽으로 진로를 정하더라도 대학은 나오는게 보통이니까 나중에 보면 좀 더 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절반 이상은 이능력자로 등록만 한 채 다른 직종으로 살지 않을까.
무슨 뜻인가 하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현역 헌터로 벌써 몇 번이나 외계 원정을 다녀온 나는 동창들 사이에서 꽤나 이름이 높은 호기심과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이야기다.
“애들한테 확실히 말해뒀지? 나도 너희랑 같이 갔다온거다. 나중에 딴소리 안 나오게 해.”
-염려마라. 지호 네 덕분에 몇 단계가 업그레이드됐는데 그 정도 못 해주겠냐.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들뜬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때마침 대학의 기말고사가 끝나서 시간 맞는 동창 사내놈들끼리 네 명이서 여행을 간다고 하기에 나도 거기 합류해서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해달라고 말을 맞춰놓았던 것이다.
사실 다다음주에나 출발할 계획이었다는데, 내가 여행비용을 다 댈테니 일정을 당겨서 가라고 하니 용돈 한 푼이 아쉬운 대학생들답게 즉석에서 흔쾌히 승낙을 하더라.
숙소도 더 고급으로 바꿔 예약하고 차도 아예 외제차를 렌트해야겠다고 법석을 떨었지.
“일단 오백 보내놨어. 알아서 쓰고, 부족한건 일단 네 돈으로 내고 나중에 말해라.”
-어. 확인했어. 근데 이걸로 부족할 일이 있겠냐? 우리 겨우 열흘 여행갔다 오는건데 말이야.
“내 지갑 털어서 기둥뿌리 뽑겠다며? 요새 웬만큼 괜찮다싶은 호텔에 묵으면 일박에 돈 이삼십은 기본이야. 네 명이서 열흘 쓰는데 돈 오백이 문제겠냐?”
-이 새끼, 억대연봉 받더니 통이 대책없이 커졌네. 야, 그건 그냥 반 장난으로 한 말이지, 우리가 그렇게 염치없는 놈들로 보였냐? 밥이나 술 얻어먹는거랑은 자릿수부터가 다른데. 호텔은 무슨, 펜션이나 민박만 빌려서 놀아도 호사지. 네가 그렇게 돈이 많냐? 큭큭큭.
음, 그렇지. 전생의 대학생 시절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또래 친구들끼리 여행을 가는데 열흘 일정에 수백만원을 쓴다는건 쉽게 상상하기도 힘든 사치로 느껴질 것이다.
저 놈들 입장에선 허세부린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돈을 부쳐준 내가 이상해 보일만도 하지.
나는 낄낄 웃으면서 콧대를 높이고 짐짓 거만한 어조로 돈자랑을 했다.
“그래, 이번에 원정 보너스도 많이 나와서 아주 주체를 못 하겠다, 왜. 그리고 인마, 원래 여행은 돈걱정없이 풍족하게 쓸수록 재밌는거야. 먹고 싶은거 마음껏 사먹고 놀다 와라.”
-크으, 충성충성. 근데 너 여자 생겼냐? 알리바이 만드는 꼴이 딱 그건데. 밀월여행. 부모님한테 말 안하고 속이려는거 보니까 썩 떳떳한 것도 아닌 것 같고... 혹시 유부녀?
“미친 새끼. 망가 적당히 봐, 뼈 삭아. 끊는다. 들키지 않게 애들 입 단속 잘 하고.”
여자가 생겨서 둘이서 비밀여행을 떠난다니, 진짜 그랬으면 참 좋았겠네.
이제라도 다 그만두고 놀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역시 그래선 편안한 마음으로 휴가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는 집에서 가지고 나온 배낭을 한번 더 올려서 고쳐메고 길가로 나와 두리번거렸다.
아까 전화로 요청한 콜택시가 저 골목 끝에서 삑, 경적을 한번 울리며 라이트를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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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안 막혀서 생각보다 더 빨리 왔네요. 칠만 팔천원입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거스름돈은 됐습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오만원권 두 장을 내밀며 그렇게 말하니 택시기사의 얼굴이 삽시간에 환하게 피어오른다.
공항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있지만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역시 더 편한건 이쪽이다.
할증이 붙었다고는 하지만 겨우 두 시간쯤 달린 것 같은데 요금이 이렇게나 비싸다니.
차에서 내리니 인천공항의 화려하고 깔끔한 건물이 나를 반긴다.
국제공항에 왔지만, 나는 여권을 챙기지 않았다.
헌터자격증은 간단한 온라인 신청만으로도 여권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출국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몰래 비행기를 얻어타고 밀항을 할 셈이었다.
안내판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두고 우선 편의점으로 향했다.
빵과 음료수를 사서 배낭에 쟁여넣었는데, 전부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계산했다.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눌러쓴 나를 보고 점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 보자... CCTV가 아주 사방에 깔렸네. 역시 화장실로 가서 시작해야하나?”
설마 보안직원들이 매일같이 순찰하는 공항의 화장실에 몰래카메라가 숨겨져 있지는 않겠지.
찍어둔 안내판의 사진을 보면서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간다.
소변을 보던 사람 세 명이 다 나가는 것을 보고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눈치를 살폈다.
저쪽 칸에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것 같지만 당장 보는 눈만 없으면 상관없지.
나는 그대로 에테르 폼을 활성화했다.
세면대의 거울을 보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이제부턴 긴장을 해야지.
자칫 인파에 부대끼다가 부딪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은신이 풀릴수도 있으니까.
전에 혼자 실험해본 결과 에테르 폼의 해제조건인 ‘공격 혹은 피격’은 판정이 상당히 너그러운 듯 했기에 가볍게 툭 부딪히는 정도로는 괜찮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다.
조금만 세게 밀쳐져도 불안하니 아예 사람을 피해다니는 편이 좋겠지.
“너 이 자식, 지금 놀러가는줄 아나? 회사일이 장난이야? 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출장준비엔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흘 밤낮을 비즈니스 미팅만 할 것도 아닌데 당연히 밤에는 시간이 남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남고 말고가 중요한게 아냐. 바로 그런 썩어빠진 정신상태가 문제란 말이다!”
젊은 남자가 출입국게이트 근처에서 정강이를 툭툭 발 끝으로 얻어맞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엿들으니 영업 일로 상사와 출장을 가는데 뉴욕에 있는 극장의 뮤지컬 표를 예약해 놓았다가 들킨 모양이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며 구경하는데도 아랑곳않고 폭력까지 행사하며 몰아붙이는걸 보니 별로 근본있는 대기업같지는 않고 상사라는 인간도 품위가 없어보인다.
그나저나 뉴욕이라.
보아하니 저 사람들, 내가 노리는 비행기를 타려는 것 같은데?
미국의 이능관리부라고 할 수 있는 연방 게이트 관리국 본부는 워싱턴이 아닌 뉴욕에 있었다.
그들은 얼마간 더 실랑이를 하더니 이내 출입국 게이트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들을 따라 게이트 안쪽의 빈 공간으로 쉬프트했다.
공항의 보안체계는 순간이동 한번에 간단히 무력화되었고 아무도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적외선 열감지 카메라를 쫙 깔아놓은게 아닌 이상 나는 그야말로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열 두시 인천발 뉴욕행... 아, 저기다. 벌써 탑승수속을 시작한 것 같아. 어서 가자.”
“엄마, 나 옷 편한걸로 갈아입으면 안 돼? 이건 너무 꽉 낀단 말이야.”
“일단 비행기에 타자. 자리에서 갈아입으면 되잖니.”
“그럼 사람들이 다 보잖아. 화장실에서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 비행기 안에서 열 시간도 넘게 있어야 한다며? 불편해서 도저히 못 있겠어.”
사람들에게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투정을 부리는 아이와 달래는 엄마 곁을 지난다.
탑승하려는 승객들을 얼마간 따라가다가 공항직원이 안내하는 비행기를 멀리서 확인했다.
동시에 두 사람이 지나기도 빠듯해 보이는 저 입구로 들어가는건 무리다.
아무리 에테르 폼이 기척을 줄여주더라도 코앞을 지나면서 직원이 뭔가 위화감을 느낄수도 있는데다 지나는 승객들 뒤를 그야말로 한발짝 차이로 바짝 따라붙어야 하니까.
게다가 안쪽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도 아니니 순간이동을 하기에도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물론 다 계획 안에 있었던 일이고,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우선 바깥의 활주로로 순간이동하여 내려오고, 비행기 가까이 접근하여 승객들의 짐을 싣기 위해 활짝 열려있는 비행기 하부의 화물칸으로 다시 쉬프트.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목숨을 걸고 랜딩기어 틈새로 기어들어갈 필요는 없다.
여름인데다 가방 안에 꽤나 두꺼운 점퍼도 챙겨왔고, 가는 길에 먹을 간식도 충분히 준비했고, 음, 화장실이 좀 문젠데... 열 시간 넘게 참는건 무리겠지?
뭐, 슬쩍 올라가 승객용 화장실을 몰래 이용하는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벽에 들어찬 캐리어 가방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천천히 화물칸의 문이 올라와 닫힌다.
승객들의 탑승이 끝났는지 연결다리가 치워지고 육중한 거체가 움직이는게 느껴졌다.
캄캄한 화물칸에 앉아있자니 문득 실실 웃음이 나온다.
와, 살다살다 내가 이런 영화에나 나올법한 짓을 다 해보네.
가방에서 아까 사온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부푼 가슴을 가라앉혀 보지만 잔뜩 들뜬 마음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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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내가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
한 숨 자다보면 금방 도착하겠거니 했는데, 딱딱한 바닥에선 차가운 한기가 올라오고 엔진소리는 끊임없이 웅웅대는 이 환경에서 편안히 잠을 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들뜬 마음은 겨우 한 시간도 안 되어 사라지고 견디기 어려운 지루함이 그 뒤를 잇는다.
“이럴줄 알았으면 태블릿에 영화라도 잔뜩 담아서 가져오는건데.”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뭣하겠느냐만 그런 투덜거림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다.
밀항을 결심하고 나서 준비를 할때는 체온을 유지할 외투와 허기를 달랠 음식물만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고보니 시간을 보낼 유희거리가 더 절실하구만.
막 먹은 빵봉지를 소리가 나지 않도록 딱지형태로 접어 가방 안에 넣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있자, 딱딱한 캐리어 말고 푹신한 가방이 있다면 기대기가 좀 나을 것 같군.”
비행중에 여기로 승무원이 내려올 일은 없을테니 착륙하기 전에만 되돌려 놓으면 괜찮겠지.
나는 짐을 고정해놓은 벨트를 풀고 안쪽에서 가방을 세 개 꺼냈다.
손으로 대강 눌러보아 가장 푹신한 것으로 골라서 꺼냈는데, 이 세 개가 확연히 푹신하더라.
백팩을 열어보니 큼지막한 동물 인형이 가득 들어있다.
인형이 종류별로 잔뜩 들어있는걸 보면 어린애 장난감을 가져가는 것 같지는 않고, 상품으로 팔기 위해 가져가는 것 같은데...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보따리상?
호기심이 들어 가방에 달린 택에 불빛을 비춰보니 과연 이름이 대명상사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런 인형을 비행기로 옮겨서야 이득이 날지 모르겠네.
뭐, 알아서들 하겠지. 내 사정은 아니니까.
아무튼 딱 좋네.
가져온 패딩 외투를 깔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고 이 인형을 베고 누우면 되겠어.
비행 끝날때쯤 다시 집어넣어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지.
엔진음이 몹시 거슬리긴 하지만 계속 듣다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일어나면 몸이 찌뿌드하고 여기저기 결릴 것이 뻔했지만 몸이 얼마나 축나든 천사의 손길 한 방이면 말끔히 해결될테니 신경쓰지 않았다.
천사의 단지를 얻은 이후로 당장의 고통만 아니면 몸 관리에 신경을 안 쓰게 되더란 말이야.
강아지 모양의 인형 하나를 머리에 베고 눕는데, 뒤통수의 느낌이 미묘하게 걸린다.
“응? 솜이 뭉쳤나? 아니지, 이건 그런게 아닌 것 같은데...”
마침 직접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일까?
내 상상력도 그에 걸맞게 나아가 영화에나 나올법한 상황을 그리기 시작했다.
왜, 영화나 소설에 보면 마약을 밀수할 때 보통 다른 상품 속에 넣어서 하잖아.
무슨 미국 멕시코 국경도 아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인데 설마하니 그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한번 달리기 시작한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음, 그래, 확인해보자.
아니면 마는거지 뭐.
까짓 인형 가격 얼마나 한다고.
이건 누가 쓰던 인형도 아니고 상품으로 가는 신품인데다 개수도 수십여개나 되니까 하나쯤 파손된다고 해서 별 일이야 있겠어?
기껏해야 관리 제대로 못 했다고 일선 직원이 구박 한 마디 듣고 말겠지.
여기까지 사고가 전개된 끝에, 결국 나는 기어이 베고 있던 강아지 인형의 배를 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