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1부
호숫가에 세워진 임시 숙영지에서 우리는 무려 사흘을 묵었다.
이게 원래 이렇게 길어질 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잘한 침공이 끊이지 않아 특수군 병력이 지쳐가는 가운데 7팀의 활약을 지켜본 지휘관의 부탁을 무시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물을 두려워하는 쉴롭은 접근하지 않았지만 여긴 다른 괴수들도 많으니까.
특수군의 헌터전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예상보다 습격이 더 잦아서 피로도가 상당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박력이 대단하네요. 왜들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알겠습니다.”
오늘의 세 번째 전투를 마치고 식사를 하러 텐트로 돌아오는 내게 전택영 사장이 다가온다.
치하하는 목소리에 감탄이 잔뜩 묻어있다.
이번에는 무려 오륙십은 되어보이는 규모의 유니콘 무리가 들이닥쳤기에 이전처럼 다른 공격조에 섞여서 화력을 보충하는게 아니라 그냥 에테르 필드를 펼치고 쓸어버렸던 것이다.
“회사에서 7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건 아시죠?”
“물론입니다. 전폭적인 지원도 받고 있고, 보너스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오구요.”
“능력이 있으면 그만큼 대접을 받는거니까 부담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최 팀장은 유적지에 기록된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건 아직 확실치 않은 이야기잖아요.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저 억제기에선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 했습니다. 뭔가 글이 쓰여있다거나 한게 아니라서...”
“머릿속으로 직접 이미지가 들어온다고 했죠. 참 신비한 일입니다. 이 행성의 고대문명은 인류와 다른 방향으로 인류 이상의 발전을 이뤄낸 것 같아요.”
회사에서 그 쪽으로 기대를 하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니 입을 잘못 놀린 내 업보긴 했다.
사실 입을 잘못 놀렸다기엔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 거기서 달리 어떻게 설득을 할 수 있었겠는가.
전생에 했던 게임 설정이 그랬다고 하면 미친놈 소리밖에 더 들을까.
전 사장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걸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춘다.
“이건 사내기밀입니다만, 저게 처음 발견된 억제기는 아닙니다.”
“예?”
“이 정보를 얻은 것도 최 팀장의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본이 숨기고 있던 마석 광산과 오크 생체실험에 대해 미국과 함께 일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 때 피터였나? 아무튼 일선요원중 하나가 일본 측에 포섭되어 배신을 했었죠.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니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배신을 참아넘기는 대가로 비공식적으로 받은게 좀 있죠.”
어디서부터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우선 피터가 일본에 협력해 날 팔아넘겼던건 아무리 생각해도 독단이 아니었지만, 그거야 일선 요원 한 명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끝낸다고 치고.
무엇보다도 댓가는 이미 피로 받았으니 원한을 품으면 품었지 사과를 할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 미국하고 불편한 관계가 되었구나 싶어서 좀 불안했는데.
내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니 그는 피식 웃으면서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라며 웃는다.
음, 그 놈들은 동료애나 전우애가 없는 놈들인가.
하긴, 영화나 소설보면 첩보계통에서 일하는 사람들한테는 원래 그런게 없는 것 같긴 하더만.
“연방정부의 어용기업인 허리케인 사의 개척상황에 대한 정보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 쪽에서도 중요하다고 판단되는건 나름대로 숨겼겠지만, 이 기묘하게 생긴 유물에 대한 정보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포함되어 있더군요. 하긴, 뭐에 쓰는 물건인지도 몰랐겠죠.”
예전같으면 아무리 정체를 몰랐다고 해도 명백히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가득한 유물이니 꽁꽁 숨겨두고 철저하게 기밀을 유지하며 연구했겠지만, 상황이 좀 달라졌다.
벌써 한국과 일본 두 군데에서 유적지가 발견되어 연구되고 있으니 행성 전역에 고대문명의 흔적이 널려있으리라는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니까.
심지어 페어리 종족에 대해서는 민간뉴스에서도 떠들썩하게 떠들어대고 있지 않던가.
“그럼 그 억제기는 멀쩡한 상태였나보죠?”
“네. 네바다 주에 있는 미국의 3번 게이트, 흔히 사막게이트라고 부르는 게이트에 연결된 곳은 춥고 침엽수림이 빽빽하게 펼쳐진 곳입니다. 그 숲을 탐사하다가 동굴 속에서 발견했다나봐요. 무슨 괴수에 연결되어 있는지는 당연히 모르지만.”
“미국에선 횡재를 했네요. 자칫 방치하다가 우리 쪽과 같은 대참사를 겪을수도 있었는데, 우리가 먼저 희생해서 정보를 얻어다준 꼴이 됐으니.”
“글쎄, 그건 모르죠. 사실 그 일 때문에 최 팀장에게 부탁을 하려고 하는데요. 막강한 공격이능 외에도 순간이동과 투명화 이능을 가진 최 팀장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 이거 갑자기 느낌이 확 안 좋아지는데.
“아닐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잠깐만요. 지금 나보고 네바다 게이트를 통해 침투해서 그 억제기를 깨고 와라, 뭐 이런 개소리를 하려는건 아니죠?”
설마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전택영 사장이 겸연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대체 내가 왜 그런 테러공작을 합니까?”
“자자, 진정하고 이리로 앉아요. 목소리 낮추시고. 테러공작이라니.”
“아 테러가 아니면 뭡니까? 난 헌텁니다. 그것도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새내기 헌터예요. 훈련소에서 배운 윤리강령중에는 분명 인류를 위해 싸우는 희생정신 어쩌고 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야 그 오글거리는 강령을 철저히 가슴속에 새기고 뭐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만, 이건 선을 넘은거죠. 이번 사태로 세자릿수가 넘는 헌터들이 희생당했어요. 1팀 사람들 생각해서라도 사장님은 그런 생각 하면 안 되는거 아닙니까?”
놀라우리만치 강력한 이능을 가지고 반쯤 게임하는듯한 감각으로 사냥을 즐기고 있는 내 기준으로도 지금 전택영 사장이 사주하는건 명백히 선을 넘은 범죄다.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예측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방어막이 강화된 쉴롭 때문에 우리나라 헌터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이건 뭐 우리만 당하기 억울하니 저 놈들도 한번 당해보라는 심보인가?
“목소리 낮추시라니깐. 잘 생각해봐요. 어차피 네바다 게이트기지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민간인이 피해를 볼 일은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쉴롭만 봐도 어디까지나 방어막이 강화된 것뿐이고, 지구에선 방어막이 형성되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그런 짓을 할 이유는 못 됩니다. 왜 사서 원한을 사려고 그럽니까?”
“아무도 모를겁니다. 억제기에 관한 사항은 국가차원에서 기밀로 처리할테니까요.”
“그래도 결국에는 관련성을 알아낼 수밖에 없잖아요? 세상에 완전범죄는...”
“미국엔 게이트가 무려 다섯 개나 있습니다. 심지어 위치도 적절하고 수익성도 높은 게이트들이죠.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갈수록 차이는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 많은 게이트 중 겨우 하나를 못 쓰게 된다고 하더라도 별 일이야 있겠어요? 최 팀장, 이게 내가 독단적으로 짠 계획같습니까? 나 그렇게 배짱있는 사람 아닙니다. 다 합의가 된 사항이에요.”
나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CIA의 배신으로 나하고 윤기정이 습격을 받은 사건을 가지고 멋대로 거래를 해서 정보를 얻어왔는데 그 정보 중 우연히 억제기에 관한 정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걸 파괴해서 네바다 게이트 기지 인근을 위험구역으로 만들어 버리면 외계산업계에서 미국이 갖는 위상이 한풀 꺾일테니 그만큼 다른 나라엔 이득이라는거지.
어... 내가 제대로 이해한게 맞나?
저거, 말이 좀 안 되는것 같은데.
“정 찜찜하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미국에선 억제기에 대해 모를테니까요. 쉴롭 사태에 대해서는 곧 파악하겠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더라도 추측하기 힘든 일이죠. 네바다 게이트기지 인근의 억제기는 사실상 방치되어 있을테니 사보타주하는건 쉬운 일입니다. 물론 최 팀장이 직접 나서는 것처럼 깔끔하고 안전하진 않겠죠.”
“그럼 그렇게 하시죠. 전 안 합니다.”
“당장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시간여유는 많으니까요. 이건 쉬운 일입니다. 최 팀장이 나서면 사람들 시선을 피해서 은밀히 일을 처리할 수 있고 정부에서도 어떤 외교적 부담도 없이...”
“안 한다니까요.”
아무래도 은신 능력을 각성하고나서 한 걱정이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다.
일본이 숨기고 있던 마석 광산을 둘러볼때도 내가 지금 괴수잡는 헌터인지 첩보원인지 모르겠다고 투덜댔었는데, 그거야 내가 반쯤은 자청해서 한 일이지만 회사에선 진짜로 나를 그런 쪽으로 써먹고 싶어하는구만.
아직은 밝히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곧 정부에서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돈 많이 벌어서 잘 살자고 헌터가 되었던 내겐 곤혹스러운 일이다.
당장 이번에 시킨 일만 해도 그렇잖아.
국익이나 회사의 이익을 위해 수십, 수백명이 죽을지도 모를 사보타주 공작을 하려면 그만한 애국심과 애사심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왜 그런 죄책감을 감수해야 하는가?
“뭐, 정 그렇다면야. 다만 이 일은 반드시 비밀로 해야합니다.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실거라고 봅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새로 각성하신 치유능력 말입니다만.”
“그건 또 왜요?”
“신일 의료원 사태처럼 함부로 사용하시는건 문제가 좀 있습니다.”
“아니, 그냥 아픈 사람 고치는건데 그게 문제가 돼요? 자체적인 검증 다 끝났습니다. 어떤 부작용도 없으니까 막 써도 되는건데...”
“무슨 뜻인지 아시잖습니까. 괜한 사회적 혼란이 생길수 있어요. 최 팀장 본인도 꽤나 불편을 겪게 될거구요. 당분간은 숨기는게 낫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현장에서 다친 사람들 치료하는데만 쓰라는거죠?”
“아, 그건 지구에서도 저희가 따로 비밀을 철저히 유지할만한 사람들을 선정해서...”
나는 문득 전택영 사장의 둥글게 휜 눈을 바라보다가 하, 코웃음을 뱉었다.
지구에서 사용을 금지해놓은 후 회사에서 치유할 사람을 정해놓고 장사를 하시겠다?
난 분명히 헌터로 계약을 한건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럴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안일하게 여기는거 아닌가?
사람을 얕봐도 정도가 있는거지, 아무리 부하직원이라고 해도 내가 저 말을 듣고 얌전히 예, 그러겠습니다 하고 따를거라고 생각한건가?
“사장님. 공격적인 형태로 발현되는게 아닌 이상 이능발현을 멋대로 제한할 근거는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그리고 전 의사가 아닙니다. 당연히 회사에서 누굴 치료하고 와라, 이런 명령을 하더라도 업무지시 축에는 안 든다는 것도 잘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당연히 회사에선 사안마다 만족할만한 보상을 책정할겁니다. 서로 좋은거죠. 이번 일을 끝내고 지구로 복귀하면 우선 세 건이 들어와 있는데...”
“그것도 안 합니다. 제 이능은 제가 쓰고싶은대로 쓸겁니다.”
따지고보면 치유이능 사용을 제한하라는 단서만 안 붙었으면 요정의 숲에서 만났던 2팀원들에게 청탁을 받아 신일 의료원을 한바퀴 돌았던 것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일이니까 이런 상황만 아니었으면 흔쾌히 그러마고 했을텐데.
딱 잘라 선을 긋는 내 말에 전 사장이 푹 한숨을 내쉰다.
마구 남발하고 다니면 정보 통제가 불가능해진다는 엄살이 뒤따르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내가 무슨 성자라고 시간을 쪼개 전국의 병원을 돌아다니며 닥치는대로 치료를 할 생각은 없지만, 여기서 동의를 하고 목줄을 차는건 바보같은 짓이 아니겠는가.
사장이 나간 후 나는 잠시 고민했다.
저 양반들이 계획하고 있는 억제기 사보타주 공작, 이거 내부고발이라도 해야하나?
내게 대단한 정의감이 있는건 아니지만, 잘잘못을 떠나서 암만봐도 저건 끝이 좋을수가 없는 무리한 계획이란 말이지.
설령 미국의 게이트 하나를 못 쓰게 만든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오닉스의 사익이나 한국의 국익과 연결된다는건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자칫 진상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질텐데,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시도를 할만한 메리트가 있을리 없잖아.
“패권다툼을 하는 중국이라면 모를까, 우리가 그런 짓을 해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쯧.”
이해는 안 가지만, 고민 끝에 언론에 제보하는건 그만두기로 했다.
이번에 사장에게 단단히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오닉스 헌터즈는 연봉도 두둑하고 복지도 풍족해서 제법 마음에 드는 회사인데, 괜한 일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미 정보국 놈들은 바로 얼마전 내 뒤통수를 때렸던 놈들인데 뭐 예쁘다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그 놈들 신경을 써주겠어?
전 사장의 말대로 지구로 넘어오면 제아무리 강화된 괴수라고 해도 총화기 앞에서 평등하게 갈려나갈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니 피해가 나와봐야 원정을 나가있던 헌터들일 것이다.
그 사람들은 어차피 위험을 감수하고 일하는 직종이고...
“에잇, 찝찝하기 그지없구만. 차라리 안 들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합리화 회로를 돌려보아도 가시지 않는 껄끄러운 기분에 짜증이 나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텐트 밖에선 바리케이드를 보강하는지 뚝딱거리는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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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닉스 3팀은 연락을 받은 게이트 기지에서 호숫가 전초기지로 병력을 보강한 다음에야 철수하며 호위대 지휘관을 비롯한 여러 정부 인사들에게 감사를 받았다.
내게 따로 감사패를 표창하겠다는 소리도 있더라.
사장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만 않았어도 뿌듯한 마음으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었을텐데.
“수고들 하셨습니다. 사냥수익은 원정기간에 비해 많지 않지만, 이번 원정은 좀 특별했으니까 회사에서 따로 상여금을 준다고 했어요. 편히들 쉬고, 다음달에 봅시다.”
“다음달? 거의 한달을 통째로 쉰다는거네요?”
“지호야, 무슨 일 있냐? 나나 승호녀석이야 휴가가 길면 좋긴 한데...”
“별 거 아녜요. 부모님이 외계에 너무 오래있는다고 걱정도 많이 하시고, 또 따로 다녀올데도 있고 해서. 아, 승호형, 퇴근 전에 보고서 쓰고 가. 내 도장 두 번째 서랍에 있어.”
게이트를 넘어 지구로 복귀한 나는 팀장 권한으로 출근일을 다음달로 잡았다.
속으로 계획한 일을 하기 위해서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배신이나 보안서약 위반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이 가리키는 쪽으로 행동해야지.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돈이 급한 것도 아닌데 굳이 불쾌한 기분을 참을 필요가 없잖아?
계획대로만 된다면 회사나 정부에선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