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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1부 (72/110)



〈 72화 〉1부

발열팩으로 레토르트 식품을 데워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간밤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트랩이 작동하여 요란한 경보음이 한번 울리는 일이 있었는데, 나가보니 바람에 밀려온 나뭇가지가 걸려서 오작동을 일으킨 경우였지.
그 소리 때문에 한번 잠을 깨서 편안히 숙면을 취하지는 못 했지만, 원정을 나와서 임시 야전기지에 묵는게 장갑차 안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 불평할만한 일은 못 되었다.

“우리 회사에서 얼마나 지원을 호화롭게 해주는지 새삼 알겠네요.”

“그러게.  행보관님이 이거 엄청 비싼거라고 생색을 낼 때는 그래봐야 보존식이지, 하고 내심 비웃었는데. 진짜 보존식을 먹어보니까 오닉스에서 사주는건 아주 오트 퀴진이야.”


플라스틱 스푼으로 캔에 담긴 걸쭉한 고기죽을 뒤적거리던 강승호가 투덜거린다.
아침식사로 레토르트 몇 팩을 데우고 통조림도 두어캔 깠는데, 먹어보니 맛이 영 별로다.
어젯밤 저녁으로는 우리가 가져온 것을 먹었는데,  퀄리티에 비해 아침에 다른 브랜드를 먹어보겠다고 차린 음식들은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었다.
산업의 잠재력과 부가가치가 얼만데 다른 회사들이라고 설마 헌터들에게 싸구려를 보급했을리는 없고, 그만큼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먹은 오닉스의 물자가 고급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신일그룹이 헌터회사 후원의 역사는 짧아도 돈 붓는걸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더니.
 원정때마다 연봉에 가까운 보너스를 마구 뿌릴때부터 알아봤지.


“커피 한 잔씩 하실래요? 인스턴트지만 제법 향이 좋아요.”


이처럼 그동안 워낙 호강을 했던 탓인지 질에선 살짝 불만이 없지 않았지만, 어쨌든 객관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기지에 남은 물자는  명이서 쓰기엔 지나칠 정도로 풍족했다.
여기서 자리잡고 추가보급없이 한 일 년쯤 지내도 끄떡없을만큼.
아, 전투식량만 오래 먹으면 몸에  좋으니까 그건 역시 좀 무리일까?

쓰레기를 모아 한 쪽에 대충 치워놓은 강승호가 장갑차에 연료를 보충하고 시동을 걸었다.
만약을 대비해 보조연료통을 두 개나 더 달았다.
아무도 없는 기지를 이대로 남겨두고 가도 될까 싶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일이야 있을까 싶기도 하고 설령 자리를 비운 사이에 괴수가 들어앉더라도 치우는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기지를 빠져나와 남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아직 쉴롭의 생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는데, 첫 발견은 여기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게이트 기지 인근에서였지만 남부 초원 어딘가에서 올라왔으리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생긴게 거미 형태라고 해서 생태도 거미랑 비슷하란 법은 없지만, 학자들 말로는 땅 속에서 살던 놈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 특히 시각이 비교적 발달하지 않아서 후각과 진동으로 먹이를 찾는 특성을  때 그럴거래.”

“또 지하 출신 괴숩니까? 하긴, 그 편이 이것저것 설득력있는 설명이 되긴 하겠네요. 덩치도 어마어마하게 큰데 그런 놈들이  위에서 기어다니고 있었으면 발견이 되어도 진작 됐겠지. 남부 초원은 거의 게이트 사태 초창기때부터 개척된 곳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그게 맞긴 한데, 또 어떤 기상천외한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


“음, 확실히 여기가 상식이 통하는 동네가 아니긴 하죠.”


강승호와 윤기정은 쉴롭을 화제로 잡담을 하면서 갖은 추측을 늘어놓았다.
물론 진지하게 고민을 한다기보다는 그저 재미로 입에서 나오는대로 떠드는 것에 불과했지만.
지하라... 그럼 또 땅굴을 찾아야 하나.
고블린 놈들과 한바탕 싸운 경험 이래로 지하에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데 말이지.
게다가 거미들 소굴이라니, 유적지처럼 그나마 깔끔한 석굴보다는 흙과 끈적한 점액, 거미줄 등으로 들어찬 불쾌한 풍경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단어가 아닌가.
윤기정이 슬쩍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릴수도 있어. 사냥을 하는게 목적이라면 모르겠지만,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게 목적이라면  달 단위로 걸려도 이상할 일이 아니지.”

“걱정말아요. 보급품은 충분하잖아요? 아, 혹시 변비 생기면 말해요, 치유해줄테니까.”

“그,그런 것도 치료가 되는겁니까, 팀장님 이능으로?”

“글쎄, 안 해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되지 않겠어요? 아무렴 말기암도 치료하는 이능인데 그까짓 소화계통 장애하나 해결 못 할까. 아, 어디가서 함부로 말하고 다니진 말구요.”

“큭큭큭, 그건 승호가 조심한다고  일이 아니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텐데.”


그건 그래.
신일 의료원에서 일어난 하룻밤의 기적이 누구 소행인지는 솔직히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지.
지구에 돌아가면 꽤나 골치아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당면한 과제는 모래밭에서 바늘찾는 일이니 지구 일은 나중에 고민해야겠지만.
잡담을 나누는 와중에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던 윤기정이 창을 닫으며 발로 운전석에 앉은 강승호를 툭툭 건드려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다.

“전방 두 시 방면 삼백여미터, 폭탄개미 한 무리. 대충 이삼십마리 되는 것 같다. 잡고 가자.”


“알겠습니다. 정차합니다. 아, 저도 내려요?”

“그럼 거기 앉아서 놀게? 사냥이야 우리 팀장님이 다 하겠지만 뒷정리는 네가 해야지 누가 하냐. 지호야,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데?”

“그냥 둬요. 큭큭큭. 앞으로 몇 달이나 고생할텐데, 벌써부터 닦아세워서 어쩌게요?”

“몇 달이요? 진짜로 단서 찾을때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을겁니까?”

“지금까지 하는 얘기  들었냐. 지호가 한번 한다면 하는 애다. 나도 처음에 휴가기간동안 요정의 숲으로 관광간다는 얘기 들었을땐 농담인줄 알았지.”


삼십여 마리나 되는데다 생태로 미루어보아 부근에  큰 무리가 있을게 분명한 폭탄개미 무리를 눈 앞에 두고도 우리는 전혀 긴장감없이 떠들며 차를 세우고 내렸다.
맞바람이라서 그런지 후각으로 먹잇감을 찾는 녀석들은 아직 우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삼백여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기가 귀찮아서 그냥 총을 쏴서 유인하라고 지시했다.
후각만큼은 아니지만 청각도 그럭저럭 쓸만한 놈들이니 유인하는건 간단하겠지.
강승호가 총을 개미무리에게 겨누다가 한 소리를 듣는다.

“소음기 떼라. 그거 마석 들어간거라서 총소리를 진짜로 FPS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줄여주는 제품이야. 퓩퓩대는 소리만 나서 몇십미터만 떨어져도 거의  들릴걸?”

“유인하는게 목적이잖아요. 방어막에 총알이 튀기면 어련히 알고 이리로 오겠죠.”

“여기서  놈들 정확하게 맞출 자신 있어? 연사 긁는단 소린 말고. 총알값 네가 낼래?”

어차피 탄약같은건 회사에서 다 지원받는데다가 기지엔 여러 회사의 팀들이 남기고 간 탄약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한두탄창 허공에 날리는건 아무렇지도 않을텐데.
강승호가 대충 그런 의미로 보이는 불만어린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신다.
그러고보면 3팀 탱커조에서도  저렇게 구박을 하던데, 용케도 분가할 때 선뜻 따라나선걸 보면 저것도 나름의 우정표현인가.
총구에서 소음기를 분리한 강승호는 아까보다 훨씬 더 느슨하고 왠지 모르게 불량스러운 자세로 견착한 채 방아쇠를 당긴다.
투투퉁, 묵직한 총성이 귀뿐만 아니라 몸 전체를 울린다.
워낙 대구경이라서 반동이 만만치 않지만 그는 아무런 문제없이 팔 힘만으로 제어해낸다.
헌터라면 마땅히 이능개발 못지않게 육체의 단련도 쉬지 않을 것을 주문받는데, 그나마 공격조원이라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민첩한 몸놀림과 심폐지구력을 중시하고 근력은 기본 수준만 갖추면 크게 문제삼지 않지만 탱커들은 경우가  달랐다.
특히 십수킬로그램 단위의 합금방패를 들고 휘두르는 실더들은 죄다 근육덩어리들이었고, 강승호나 윤기정이나 다들 팔뚝이 거의  장딴지만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60구경이라고 해도 총기반동따위, 별로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었다.


“오, 잘 쏘네. 거의 다 명중이야.”

목에 걸고 있던 쌍안경으로 폭탄개미 무리를 관측하던 윤기정이 휘파람을 불며 칭찬한다.
나도 마찬가지로 놈들의 방어막에 총탄이 튀겨나가는 것을 보았다.
사격을  하는건 알았지만 지지할 곳도 없이 선 채  눈으로 연사를 긁어 이 거리에서 단번에 명중시키다니, 3팀의 피니셔 한수호 못지 않은 실력이다.
커다란 총성을 인지한건지 아니면 방어막에 덧없이 들이받은 총알때문인지 폭탄개미들은 잠깐 혼란스러워하는  하다가 이내 우리를 인지하고 이쪽으로 기어오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기엔 느릿해 보이지만 사람보단 더 빠른 녀석들이다.
잠깐 사이에 거리를 좁혀 어느새 내 기습 사거리 안이다.
30미터의 쉬프트 이동거리와 15미터의 블레이드 사거리.
경험이 쌓이면서  거리감각은 상당히 날카로워져 이젠 따로 거리를 재어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확신에 차서 전방으로 쉬프트했다.
에테르 필드의 전개에 이은 블레이드 난사로 살상범위 안을 잘게 부수고 쉬프트로 후퇴.
일련의 과정은  궁극기 각성 후 겪은 리저드들과의 전투때와 비교하면 훨씬 더 매끄러웠다.
마치 스킬의 연계가 자연스레 몸에 밴 것 같았다.

“끝났군. 근데 이거 부산물 챙기기엔 별로 안 좋은 방식같은... 어엇?”


수십미터 전방에 펼쳐진 이젠 익숙한 형태의 잔해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던 나는 별안간 땅이 무너져 발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다급하게 비명을 지르며 균형을 잃었다.
다행히 기우뚱 빠져들려던 찰나 빠르게 반응한 윤기정이 내 뒷덜미를 잡아채 끌어낸다.
발에 묵직한 무게가 걸려 내려다보니 땅에서 솟아오른 폭탄개미 한 마리가 이빨이 여럿 달린 흉측한 주둥이로 내 다리를 물고 몸을 비트는 것이 보였다.
제 놈이 무슨 악어라고 저런 동작을 하는건지.
나는 급히 그 놈의 몸통을 조준해 에테르 블레이드를 날렸다.
전방에 펼친 에테르 필드가 아직 유지되고 있었지만 여긴 아슬아슬하게 그 범위 밖이라서 연사는 불가능했지만, 원래 블레이드의  3초는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여 몸통이 쪼개져나간 녀석은 그제야 물고 있던 입을 벌리고 날 놓는다.


“다,다리 괜찮아?”

“멀쩡해요. 다행히 방어막이 유지되는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서. 휴우, 십년감수했네.”


“아직 안 끝났습니다!”

강승호가 소리를 질러 경고하며 방패를 들고  앞을 막아선다.
에테르 쉬프트에 달린 지속시간이 짧은 방어막이 해제된 후 시체의 이빨에 긁혀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주둥이를 벌리고 다리를 뺀 나는 급히 땅을 짚고 일어섰다.
방금 날 기습한 폭탄개미가 튀어나온 곳에서  많은 개미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합금방패를 이리저리 휘둘러 놈들을 경계하는 강승호의 몸이 충돌의 충격에 멈칫거리고 그가 등에 비끄러맨 60구경 기관총의 총신이 그 서슬에 요동치며 덜그럭대는 금속음을 낸다.
날 뒤로 끌어낸 윤기정도 급히 방패를 꺼내들고 뛰쳐나가 합류했다.
단  명뿐이라서 안정적인 방진을 형성하는건 어림도 없었지만 그들은 노련한 실더들답게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능숙하게 움직이며 폭탄개미 무리를 제어했다.
그 뒤에서 나도 쿨다운이 끝날때마다 꾸준히 블레이드를 날리며 놈들의 머릿수를 줄여간다.
주요 장기가 밀집한 머리부분을 쪼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지만 그럴만한 각도가 쉽게 나지 않아서 가느다란 다리를 날리거나 배와 꼬리에 일격을 먹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규모 전투에서처럼 탱커들이 부동의 방진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므로 아군오사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머리가 쪼개진 놈들은 그대로 즉사하여 움직임을 멈췄고, 폭탄꾸러미처럼 생긴 배와 꼬리의 페로몬 주머니가 갈라져 터진 놈들도 펑펑 터져나가며 주저앉는다.
다리가 잘린 놈들은 힘겹게 꿈틀거리며 공격을 이어갔지만 윤기정과 강승호는 방패를 휘두르는 와중에도 한 손으로 권총을 뽑아 방어막이 깨진 녀석을 찾아 쏘는 묘기를 선보였다.

“후우, 다 끝난건가? 설마  무리가 더 기어나오진 않겠지?”


“불길한 소리하지 마요. 십년감수했네. 아니,  꼬실때는 뭐라고 했어요? 팀장님 믿고 가면 위험하게 싸울 일은 거의 없을거라면서요?”


“거의 없을거랬지 아예 없을거랬냐. 그래도 너, 이번에 밥값 제대로 했다. 큭큭큭.”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전투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체감상으론 길었는데, 시계를 보니 채 십분여도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는 놈들이 기어나오는 땅굴 바로 앞까지 진격해 입구를 틀어막고서 화력을 투사하는 지경까지 갔는데, 수십여마리를 죽이고 나니 더 나오는 놈이 없더라.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지. 웬만큼 전력이 강한 팀이라도 전열이 무너져 사상자가 제법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세 명뿐이어서 무사히 대처할 수 있었어.”

“폭탄개미가 이런 전술도 씁니까?”

“글쎄, 아직 보고된 바는 없는데... 최근에 발견된 쉴롭이라면 모를까,  놈들은 발견된지 오래돼서 생태연구도 상당히 진행된 종이거든.”

“그럼 쉴롭의 방어막 강화와 폭탄개미의 이상행동 사이에 연관이 있을수도 있겠네요.”

내 추측에 윤기정이 그건 너무 비약 아니겠냐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는 폭탄개미들이 빠져나온  땅굴로 한번 들어가보면 어떻겠냐고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너무 위험하기도 위험할뿐더러  전투를 끝내고 긴장을 풀어가는 두 사람의 기색을 보니 그런 소리를 했다간 좋은 말은 못 들을  같았기 때문이다.
불운과 행운이 겹친 첫 날의  전투는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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