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1부
캐릭터 하나를 오래도록 성장시키는 롤플레잉 게임과 달리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내가 하던 게임은 매 경기마다 새로이 캐릭터를 골라 전투에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각 경기는 플레이타임이 짧으면 십여분에서 길면 한 시간 가까이 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문제는 게임 중반부에 지루하게 늘어지는 타이밍이 있다는 것이었다.
플레이어 캐릭터들이 강해지는 성장곡선과 맵 내의 몬스터 및 진군로 병사들이 강해지는 성장곡선은 일치하지 않았는데 약 십오분에서 이십분 정도, 그러니까 막 코어 아이템을 두어개 완성하고 주력스킬의 레벨을 끝까지 찍어서 화력이 계단식으로 대폭 증강된 시점에서는 유불리와 관계없이 소강상태가 이어지게 된다.
양 팀마다 광역데미지를 입히는 스킬 한두개씩만 보유하고 있으면 별다른 소모없이 진군로의 잡졸들을 순식간에 정리할 수 있으니 피차 방어타워를 철거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설령 전투에서 사소한 이득을 보더라도 딱히 취할 전리품이 없다.
마치 참호전처럼 전선이 거의 바뀌지 않는 상태로 의미없는 딜교환만 하게 되니 하는 사람도 의욕이 생기지 않고 보는 사람도 지루한데, 초반에 크게 차이가 벌어져 가망이 없다고 느낀 쪽에서 패배선언을 하고 경기를 끝내지 않으면 결국 삼십분 이후까지 게임이 길어지니 플레이타임이 양극화된다는 단점까지 있었다.
물론 계단식 성장을 하는 캐릭터와 달리 직선을 그리는 몬스터와 병사들의 레벨 및 스펙은 꾸준히 올라와 곧 플레이어 캐릭터의 화력을 따라잡고 균형을 맞추게 되므로 별로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어찌되었든 게임 설계의 실수 중 하나인 것은 분명했다.
이 문제는 게임 초창기부터 제기되어온 문제였는데, 몇 번째 래더 시즌이었던가, 게임사에서 한가지 패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구도에 변화를 주는데 성공했다.
설정상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병사와 몬스터들은 몇 가지 제약을 받고 있어 열화카피된 상태로 투입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제약을 단계별로 없애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플레이타임 십분부터 시작해서 일정 간격으로 전장에 등장하는 억제기를 파괴하면 아군병사와 적군 진영 몬스터가 강화되어 운영에 큰 유리함을 안겨주는 시스템이다.
본래 있던 설정을 끌어와서 만든 것이니 스토리를 고쳐쓸 필요도 없었다더라.
이 패치를 통해 중반 이후로 캐릭터를 강화하는 버프몬스터와 병사를 강화하는 억제기를 두고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곤 하는 추세가 정립되었지.
판세가 크게 기울어 한 팀이 모든 억제기를 일방적으로 다 부수기라도 하는 날에는 아군 진영의 몬스터는 도저히 사냥할 수 없고 밀려오는 적군 잡졸도 도저히 정리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무력하게 밀리게 되므로, 보통 그렇게 되기 전에 패배선언을 하게 된다.
아니,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오버파워 버프가 걸리는걸 감안하면 일방적으로 다 깰 것도 없이 후반의 전략적 선택 몇 번만으로도 게임이 기울곤 했지.
이처럼 지나친 장기화를 막는 효과도 있어서, 한시간을 넘기는 게임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 받는 스킬데미지 90퍼센트 감소라던가 공격력 세 배 증가 등등과 더불어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뺏기면 사실상 패배인 억제기가 있었다.
“체력과 방어력을 다섯 배로 뻥튀기시키는 억제기는 70분이었나 80분이었나, 하여튼 후반 중에서도 극후반에나 나오는거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니까... 초원 어딘가에 그 억제기가 있고 그게 우연히 부서졌다면 말이 돼.”
안 그래도 열 단위의 공격조원들이 이능화력을 퍼부어야하는 거대괴수의 방어막이 다섯 배,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강화되었다면 그야 아무리 화력을 퍼부어도 못 잡겠지.
어째서 쉴롭을 발견한 이래로 그간 잠잠하다가 우리가 남부초원으로 원정을 오는 시기에 딱 맞추어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자문해보면 그 정도의 우연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하필이면 지금 부서졌을수도 있고, 아니면 탐사하던 헌터들이 멋모르고 잘못 건드려서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뭐, 자세한 사연이야 어쨌든간에 우선 이 가설을 확인하는게 중요하다.
위치는 알 길이 없지만 눈 앞에서 보면 내가 충분히 억제기를 알아볼 수 있을테니까, 우선 남는 사람들은 이 기지에 두고 조사대를 꾸려 탐색을 나가봐야지.
그러자면 우선 이 아저씨들을 설득해야 한다.
“오닉스에서 좋은 정보를 가져온건 고맙지만 다시 생각해보는게 어떻겠습니까? 설령 당장 놈들의 방어막이 예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갔다고 한들 언제 또 같은 사단이 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한시가 급합니다. 바로 철수해야죠. 망설일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방금 도착한 7팀장의 의견은, 초동수사를 우리가 하자는겁니다.”
“그러다가 자칫 다시 쉴롭이 강화되면요? 안전이 우선입니다. 안 그래요?”
오닉스 1팀장이 내 제의를 전달하기는 했지만 별로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실에 모인 여러 회사의 팀장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좀 어렵기는 하되 별 문제없이 잘만 잡던 괴수들 중 한 종이 갑자기 손을 댈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동료들을 살해했으니 공포를 느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
우리가 오면서 잡은 쉴롭의 부산물을 증거로 제시했을 때 ‘이 틈에 얼른 도망가자’는 의견이 대세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육이오 동란때 총알이 안 박히는 북괴 탱크를 보는 국군 보병들의 심정이 저랬을까.
대화를 듣던 나는 가만히 손을 들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쉴롭이 평상시처럼 약화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아 여기 뻔히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강화된 채로 잡았을수도 있잖아요. 제가 무려 S급 공격이능력자라니까요? 이능력 센터에서 발급한 인증서류도 있습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방어막만 깨면 총화기로 얼마든지 사냥할 수 있는거 아닙니까. 제가 예전 오닉스 3팀에 있을 때 그런 식으로 사냥을 했는데...”
“오닉스 7팀장님이라고 하셨죠? 고등급 이능력에 자부심 갖고 계신거 잘 알겠습니다만, 강화된 쉴롭을 못 보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겁니다. 그때 화력을 퍼붓던 공격조에는 B급이 두자릿수에 A급도 무려 일곱이나 있었어요. 차원이 다르단겁니다. 그 놈들은 인간이 사냥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에요. 약화되어 길이 트였을 때 빨리 빠져나가야 합니다.”
봐, 이렇다니까?
이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득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한테 칼질을 할 수도 없고, 맨 땅을 쪼개면서 위력시위를 하기도 어려운거니까.
애초에 이능등급을 정할 때 S급이라는 판정이 ‘현재 기술로는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함’이라는 뜻이니 A급보다 아주 약간 강해도 말이 되고 수십, 수백배 더 강해도 말이 되겠지만 사람들이 인식하기로는 통상 A급 이능력자의 서너배, 강해봐야 십여배로 보는게 고작이다.
그러니 A급 이능력자를 일곱 명이나 포함한 공격조가 못 깬 방어막을 겨우 세 명이서, 그나마도 둘은 탱커니까 한 명의 공격으로 깨버렸다는걸 쉽사리 믿을 리가 없지.
여러번 공격할 것도 없이 단 한 칼에 깨버렸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걸 말로만 듣고 믿을 리가 없잖아?
---------
“십 분이면 충분하겠죠?”
“잠시만요. 이 기지로는 돌아올 기약이 없는 셈이니 챙겨갈 수 있는건 다 챙겨가야 하지 않겠어요? 천막도 강화 섬유로 만든거라서 가격대가 만만치 않은데...”
“허, 명성에선 일선 헌터들에게 지원을 제대로 안 해주나봅니다? 지금 돈이 문젭니까.”
“끄응.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저희 팀도 십 분 내에 출발준비를 마치겠습니다. 함께 가죠.”
결국 나는 설득에 실패했다.
회의실에 모였던 팀장들은 내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게이트 기지로 돌아가는동안 소비할 최소한의 식량과 탄약만을 갖고 뭉쳐서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겠다며 다들 부산을 떠는 무리에는 심지어 오닉스 1팀도 섞여있었다.
거꾸로 1팀장은 오히려 나를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휴우, 정말 고집이 강하시군요. 너무 위험하다니까요? 언제 다시 이상현상이 생길지 모르는데 이 빌어먹을 땅에 남아서 조사를 하겠다니요. 그것도 겨우 세 명이서!”
“그러니까 1팀장님이 도와주시면 되는거 아닙니까?”
“난 우리 팀원들의 안전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미 두 명이나 목숨을 잃었어요. 젠장, 그걸로도 이번 원정은 실패도 이만한 대실패가 없는데, 자칫 운이 없으면 외계개척 역사에 남을 대참사가 터질지도 모릅니다. 교과서에 나오고 싶어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괜찮다니까요.”
일단 원정에 나선 이상 각 팀은 독립적인 의사결정의 주체였다.
회사 상급자의 명시적인 지시가 없다면 구체적인 일정과 동선은 선참후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오닉스 헌터즈의 소속이라도 7팀장과 1팀장의 의견이 갈렸다면 두 팀이서 따로 행동하는건 당연한 일이고, 애초에 우리는 별개의 원정을 위해 여기 왔다.
“쯧,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식량과 연료, 탄약은 넉넉하게 남겨놓고 갑니다. 필요하다면 아낌없이 쓰셔도 좋습니다. 이건 다른 회사 헌터들에게도 미리 양해를 받은겁니다.”
행군속도를 높이기 위해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는걸 바로 옆에서 뻔히 봤는데 무슨 대단한 배려를 해주는 양 말하는 투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사의를 표했다.
우리가 거점에 도착한지 채 삼십여분도 되지 않은 시각.
백수십이나 되는 헌터들이 각기 차량에 올라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기지엔 적막만 남았다.
일이 돌아가는 사정을 들은 강승호와 윤기정은 아무런 동요없이 내 곁을 지켰다.
쉴롭 한 마리를 해체하는 광경을 코 앞에서 실시간으로 지켜봤으니 이제 와서 딱히 위험하다고 느끼거나 겁을 먹지는 않겠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어둑시니가 깔리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본격적으로 시작합시다. 해산.”
“아, 지호야. 그건 좋은데, 쉬더라도 새로 방비를 좀 해놓고 쉬어야겠다.”
“응? 쉴롭은 물을 싫어해서 강가 쪽으로는 안 온다고 했어요.”
“이 부근에 괴수가 쉴롭만 있는건 아니잖아. 겨우 세 명이라 교대가 애매하니 불침번을 세우진 않더라도 최소한 트랩이라도 깔아놔야지.”
아, 그러네. 밤에 자다가 침입한 괴수에게 변을 당하면 큰일이니까.
연합 팀이 떠날 때 철조망과 방벽을 그대로 두고 가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걸로는 불안하다.
창고에서 지나가다가 걸리면 요란한 소리를 내는 소음 함정을 한무더기나 찾아내 꺼낸 윤기정이 그걸 땅바닥에 내려놓고 강승호에게 눈짓을 한다.
나이로는 중간이었지만 서열로는 영락없이 막내인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 팔을 걷어붙였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
“에이, 형은 또 왜 갑자기 그래요? 쉴롭 수십마리가 한꺼번에 와도 끄떡없다니까요. 여차하면 오버드라이브를 걸면 되고,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방어막을 벗기는건 여반장입니다. 60구경 총, 단발이 아니라 전자동으로 챙겨왔잖아요? 한번 긁으면 피떡이 될텐데.”
“아니, 우리 걱정이 아니라, 떠난 사람들.”
“어?”
“네 능력에 대해 전혀 안 믿었다며? 그건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쉴롭의 방어막이 무지막지하게 단단해졌는데 그 현상이 일시적이건 영구적이건 사라졌다고 판단하고 나간거 아냐? 돌아가는 길에 자칫 마주치기라도 해봐. 어쩌겠어?”
“잡고 지나가려고 들겠죠. 아, 젠장.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내가 왜 그 뻔한 생각을 못 했지?”
좀 더 강하게 주장했어야 하나.
아니지, 그 때 분위기 봐선 내가 강력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들을 분위기가 아니었지.
물론 돌아가는 길에 꼭 쉴롭과 조우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만약 만나서 전투를 벌이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야말로 참사가 벌어질게 눈에 선하다.
적어도 우리 1팀이라도 강하게 말렸어야 하는데.
하지만 내가 뭘 어쩌겠어, 못 믿겠다는걸.
“이제라도 따라가야 하나? 형 생각은 어때요?”
“그건 지호 네가 결정해야지. 네가 팀장이니까. 나랑 승호는 어떤 지시든 따를거야. 하지만 개인적인 의견은, 크흠, 굳이 가서 지켜줄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네. 우린 우리 일정이 있고 미리 세워둔 계획이 있잖아. 어차피 게이트를 넘어 외계원정을 온다는건 목숨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라고.”
“그런가... 확실히 이제 와서 따라가 지켜주겠다고 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습긴 하네요.”
여기 와서 새로운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계획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구체화되었다고 봐야지.
막연히 ‘사냥도 할 겸 남부초원을 돌아다니며 유적지를 탐색하자’는 것보다는 억제기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게 낫지 않겠는가.
억제기 부근에는 수호골렘이 있을테고 녀석을 잡으면 막대한 골드를 주니 그것도 탐이 난다.
억제기의 인게임 디자인과 컨셉아트를 떠올려보면 복잡한 룬 문양이 새겨진 꽤나 큼지막한 수정구니까 조사하면 외계연구에도 큰 진일보를 가져다줄지도 모르고 말이야.
물론 찾는게 그리 만만하진 않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