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1부
숲거미가 이동하면서 남긴 흔적을 따라가기를 한 시간쯤 지났을까.
놈들의 이동속도는 별로 빠른 편이 아니라서 둥지까지 역추적하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거라고 예상했지만 이 놈들, 의외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닌 모양이다.
“숲거미들은 보통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산다고 하지 않았어?”
“예. 하지만 괴수연구가 다 그렇듯 확실한건 없죠. 이 놈들이 땅굴을 파고 사는 특이한 돌연변이들일수도 있는거고, 아니면 단순히 중간에 거쳐간 곳일수도 있고...”
저 덩치가 집을 짓고 살려면 거목이 줄을 지어 있는 울창한 숲이어야 할텐데 어째 작은 나무와 낮은 수풀만 우거진 지역으로 흔적이 이어진다.
이 놈들은 괴수 주제에 뭘 이렇게 부지런히 싸돌아다닌거야?
심지어 아직 피해자들이 습격당한 곳도 찾아내지 못했으니 추적은 한참이 더 걸릴 예정이다.
이동흔적은 수풀과 나무덩굴로 가려진 땅굴로 이어졌다.
“어... 진짜로 땅 속에 사는 돌연변이들인가?”
“아니면 이 안에 사는 토착생물을 사냥해서 먹은걸수도 있지.”
“아까 뱃 속을 확인하니까 사람 시체 말고는 딱히 먹은게 없던데?”
“워낙 작아서 금세 소화되어 녹아버렸을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서 사냥한게 사람이라거나.”
영 아귀가 맞지 않는 상황에 수군거리면서 우리는 토굴 입구를 정리해 드러냈다.
이능을 발현한채로 정글도를 사용해 수풀을 서걱서걱 잘라내던 탱커 하나가 고개를 갸웃한다.
“야, 이거 살아있는 식물이 아닌데? 봐, 이능 발현 안 하고 그냥 베어져. 방어막이 없어.”
그의 말대로 토굴 주변을 덮은 수풀은 살아있는게 아니라 이미 베어진 것들이었는데, 개중에는 플라스틱으로 된 인조잔디까지 섞여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인공적으로 만들어 덮은 위장막이라는거지.
지금은 변색된데다 말라비틀어졌으니까 티가 조금씩 나는데, 아마 주기적으로 수풀을 베어 위장막을 새로 만들어 덮는 작업을 하는 중에는 바로 위에서 보아도 감쪽같았으리라.
그러니까 저 안에 사람들이 숨어지내다가 숲거미의 습격을 받아 잡아먹혔고, 지나가던 우리가 그 숲거미 무리와 우연히 조우해서 전투를 벌였다는건가.
비슷한 사고의 흐름을 거쳐 대충 일이 어떻게 돌아간건지 파악이 끝난 2팀장이 중얼거린다.
“근데 이 놈들은 뭐 얻어먹을게 있다고 요정의 숲 한복판에 비트를 파고 숨어있던거야? 무슨 무장공비도 아니고. 보아하니 정부쪽에 신고도 안 하고 들어온 것 같은데.”
“맞습니다. 제가 똑똑히 기억하는데, 페어리마을 발견 이후로 요정의 숲 안으로 들어온다고 신고된 원정대는 총 다섯 팀이고 전부 위치파악이 되어있어요. 얘들은 어디서 온걸까요?”
“무장공비 맞지 않을까요?”
불쑥 내뱉은 말에 어처구니 없다는듯한 시선이 내 얼굴에 여럿 와서 박힌다.
아니,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은 뻔한거 아냐?
그런 표현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은 아직 공산당 독재정권이니까 우리 영역에 와서 숨은 중국 특수군이면 무장한 공산비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텐데.
“중국 애들이요, 중국 애들. 고블린이랑 페어리들이 싸울때부터 이 안에 잠입해서 수작을 부리고 있었을텐데, 그 잔당이 아직 철수하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하면 설명되는거 아닌가요?”
“어? 중국? 음, 그런가. 그럴수도 있겠네. 맞아, 걔들이 아니고서야 여기까지 들어와서 굴을 파고 숨어있을 이유가 없지. 협약을 맺긴 했지만 그 놈들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는건 기대도 안 했고. 하아,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웅크리고 있었던거야?”
“그 숲거미들이 은인이네, 은인이야. 좀 덜 아프게 잘라줄걸 그랬네.”
“쯧. 이거 정부에다 보고를 하긴 해야겠네. 마을에 주둔하는 지휘관이 보통 깐깐한 양반이 아니던데, 보나마나 병력 동원해서 샅샅이 조사한다고 뒤집어 엎을테고.”
“그 전에 일단 들어가보죠. 무슨 작당모의를 하고 있었는지 보자구요.”
위장막을 들어내니 드러난 입구는 과연 계단처럼 깎인 것이 인공미가 넘치는 구조였다.
두 사람 정도가 한번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
나는 윤기정과 함께 선두를 자청했는데, 위험한 역할이었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보호하려고 하더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걸 깨달았나보다.
내가 2팀원들에게 보여준 이능력 중에 방어에 관한건 없으니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 기습당하면 자칫 큰 일이 벌어질수도 있을텐데, 역시 에테르 필드의 임팩트가 크긴 컸나보네.
물론 두 번째 목숨이라는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는 나는 거리낌없이 지하로 걸어내려갔다.
가파른 각도로 거의 십여미터 이상은 내려온 것 같다.
이거 웬만한 아파트 2층이나 3층정도의 깊이로 팠는데?
중간중간에 숲거미의 점액이 묻어있는걸 보면 그 놈들이 여길 습격한건 확실하다.
좁은 통로를 얼마쯤 더 내려왔을까, 앞이 확 트이며 광장이 나타난다.
“입구는 야산의 비트처럼 생겨가지고는, 의외로 하루이틀 머물려고 만든게 아닌데요 이거?”
“고생했겠네. 여기까지 중장비를 끌고 올 수 있었을리도 없고. 아, 저기 빛이다.”
지하광장은 꽤 넓었는데, 위에서 빛이 들어와 안을 어슴푸레하게나마 밝히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이 공간이 사람이 파서 만든게 아니라 원래 있던 지하공동에 입구만 새로 뚫어서 마련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저 위에 보이는 환풍구라거나 거울을 여러개 배치해 만든 채광시설은 사람이 만들었겠지만 바위가 그대로 맨살을 드러낸 공동 자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채광창으로는 광량이 충분하지 않았는지 전기 조명도 보이는데, 작동은 하지 않고 있었다.
“창고...같지?”
“잔뜩 쌓인 포대들을 보면 그런 것 같네요. 서늘하고 건조한게 조건도 딱 적당하고.”
“뭘 저장해 놓은걸까?”
요정의 숲과 가장 가까운 게이트가 한국의 울릉도 게이트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이종족들을 발견하고 한국 정부에서 이곳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정부에서 비밀리에 이런 창고를 지었을 확률은 낮으니 상황을 보면 중국 애들 짓인데...
혹시 요정의 숲에서 활동하는 특수군들을 위한 보급고인가?
겉면에 아무런 표시도 설명도 쓰여있지 않은 포대 하나를 손으로 만져보니 질감이 매끈하다.
코팅한 질긴 종이로 된 포대인데, 칼로 입구를 살짝 찢으니 안에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었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걸 보면 밀가루인가?
중국 입장에서 여긴 거의 적지나 다름없는 곳인데 보급고에 밀가루를 갖다놨다고?
요정의 숲을 누비는 특수군이 태평하게 빵을 굽고 국수를 뽑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뒤늦게 내가 하고 있는 꼴을 본 2팀장이 기겁한다.
“야, 인마! 그게 뭔줄 알고 함부로 냄새를 맡냐? 위험한거면 어쩌려고.”
“아, 깜빡했어요. 조심성이 없었네요. 근데 별로 위험해보이진 않는걸요. 밀가루같아요.”
“그건 모르는거지. 얼른 씻어내. 이만 나가서 돌아가자.”
“아무도 안 남겨놓고 전부 돌아갑니까?”
“따로 사람을 남겨놓기엔 우리 머릿수가 부족해. 돌아가는 길에 괴수를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여기 남겨둔 병력이 습격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길만 터두자고.”
“잠깐, 그럼 제가 지호랑 같이 남으면 되지 않을까요? 형님도 보셨다시피 지호 이 놈, 웬만한 원정대 서너팀 이상의 전력을 낼 수 있으니까 딱히 위험하지도 않을테고.”
“오, 그게 좋겠네. 그럼 부탁 좀 하자.”
두 명이 지키는동안 오닉스 2팀은 최대한 빠르게 페어리 마을로 돌아가서 거기 주둔하고 있는 특수군 지휘관을 통해 정부에 보고하고 병력과 조사관을 대동해 돌아온다는 계획이다.
혼자 남아도 되겠지만 말동무삼아 윤기정이 함께 남기로 했다.
그나저나 특수군 아저씨들, 당분간 고생을 좀 하겠는걸.
이런 저장고가 다른 곳에도 있을 수 있으니 광범위한 수색작전이 한바탕 벌어질테니 말이야.
나나 윤기정은 어디까지나 휴가중이니까 그냥 복귀하면 그만이지만.
2팀장은 내가 찢은 포대에서 샘플을 한 줌 정도 밀폐용기에 담아서 챙겼다.
내가 보기엔 평범한 밀가루로 보이는데, 참 꼼꼼한 사람이다.
하긴, 대기업 헌팅팀의 팀장급쯤 되면 생각이 깊고 매사에 빈틈없이 철저해야겠지.
겉으로 보기엔 털털하고 호쾌한 아저씨같아도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나머지 일행이 마을로 출발한 후 야전의자를 펼치고 편안하게 주저앉았다.
떠나기 전에 전투식량 두 세트와 식수에 더해 차에 실려있던 휴대용 의자를 두 개 내려주고 간 것인데, 펼치기에 따라 의자도 되고 침대도 되는 물건이었다.
발열팩의 지퍼 손잡이를 쭉 당겨뺀 윤기정이 맞은편의 의자에 털썩 앉아서 콜라캔을 땄다.
“어때, 지금까지 잡은걸로 충분할 것 같아?”
“예? 뭐가요?”
“치료이능을 습득하려면 괴수를 더 잡아야 한다며. 그래서 2팀 원정에 따라붙은거잖아.”
“아, 그거요. 음, 네. 대충 이만하면 됐을 것 같은데... 에이, 아직 휴가기간은 여유있잖아요. 일단 유적지로 가보고, 부족하면 다시 내려와서 더 사냥하면 되죠.”
“그건 그래. 헛 참. 너랑 같이 다니다보니 괴수를 잡는게 참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이건 뭔, 호가호위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문제는 천사의 단지에 달린 액티브 효과, 그러니까 상태이상 해제에서 ‘상태이상’의 범주에 부서져서 뒤틀린 관절도 포함되느냐 하는건데...
분명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치료가 기정사실처럼 되어있어.
웬만하면 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만약 안 되면 실망과 원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는걸.
잡담을 하는 사이에 발열팩에서 삐이하는 소리와 함께 더운 증기가 뿜어져나온다.
그 뜨거운 김이 내 얼굴로 올라오기에 의자를 들고 한발짝 물러서서 고쳐앉았다.
그런데 손에서 미끈하게 뭔가 흘러내리는 감촉이 느껴지는게 아닌가.
처음에는 피가 나서 흘러내리는가 싶었다.
뭔가 튀어나온 금속 홈에 걸려서 베이기라도 했나보다 하고 왼손을 내려다보았는데, 붉은 피가 아니라 아까 묻은 흰 가루가 녹아서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수호자의 맹약 아이템에 기본스펙으로 달린 방어력이 얼만데 겨우 의자 모서리에 긁혔다고 살이 찢어져서 피가 나겠어?
“기,기정이형, 이거 뭔가 심상치 않은데? 이거 봐.”
나는 급히 가루가 녹아서 생긴 정체모를 액체를 바닥에 탁탁 털어냈다.
윤기정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게 다가오려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거리를 벌린다.
아, 그렇지 참.
이게 만약 독이면 큰일이니까.
잠깐만, 이게 손에만 묻은게 아닌데.
분명 아까 만져보고 냄새까지 맡았으니 코에도 미세하게나마 분진이 남아있을 것이다.
발열팩에서 나오는 증기가 뜨겁긴 하지만 그걸 직격으로 쐰 것도 아니고 공중에 충분히 퍼진 김을 접촉한 것뿐이라서 별로 뜨겁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녹아내리다니.
대체 녹는점이 얼마나 낮은거야?
벼,별로 상황이 좋아보이지 않는데.
일단 다시 고체로 얼리면 되나? 아니면 물로 씻어내야 하나?
당황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몸을 씻어낼 물을 찾던 나는 몸 안에 기이한 열기가 감도는 것을 뒤늦게 느낄 수 있었다.
몸살에 걸렸을 때의 열기보다도 훨씬 더 강한 열기였다.
어, 몸에서 열이 나는건 일단 면역체계가 발동했다는건데, 이거 역시 큰일난 것 맞지?
“지,지호야, 크윽. 나도 좀 들이마신 것 같다. 이거 위험한데...”
코와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물러섰던 윤기정도 그새 증기에 섞인걸 들이마셨는지 눈이 풀려서 비틀거리다가 풀썩 맨 바닥에 주저앉는다.
몸에 힘이 풀리면서 나도 바닥에 쓰러지듯 눕고 말았다.
묘하게도 이 탈력감이 별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지, 오히려 몸 안쪽에서부터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어느 쪽인가하면 좋은 쪽에 가깝지.
입을 헤 벌리고 몽롱한 채로 누워있다가 어느샌가 까무룩 잠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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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 밝은 형광등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역시 그 정체불명의 독에 당해서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건가.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온 몸에 활력이 차오르더니 감각이 돌아오고 힘이 들어간다.
가,가만.
방금 눈을 뜬 후 몸에 다시 감각이 돌아오고 힘이 들어가기까지 2초정도 걸리지 않았나?
그럼 그거, 수호자의 맹약 효과가 발동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내가 지금 독살당했다가 도로 살아난거라, 이 말이지?
그리고 다음 순간, 내 생각은 윤기정도 똑같이 중독되었다는데 미친다.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나는 사람을 불러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 여유도 없이 문을 부수듯 거세게 열고 뛰어나갔다.
“엇? 티,팀장님! 최지호 씨 깨어났습니다!”
“야, 인마! 넌 내가 졸지 말고 모니터 똑바로 확인하고 있으라고 했지? 환자가 일어나서 나올때까지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니, 그보다 기정이형은 무사해요?”
"진정해. 기정이는 아직 살아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우선은 애써 날 진정시키려던 2팀장이 포기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고 전말을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