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1부
갑자기 괴수사냥을 하자는 말에 윤기정은 약간 당황한 것 같았지만 처음부터 내 막연한 예감 하나만 믿고 따라온만큼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부족하면 그냥 인근 숲에서 몇 마리 베어죽이고 돌아오면 될텐데, 모자란 액수를 보니 아주 자리를 잡고 제대로 쓸어담아야 할 것 같다.
“괴수 부산물이 필요한거야? 아니면 마석? 일단 마을로 돌아가서 아직 처분하지 않은 재고가 있는지 물어보자. 2팀장님 말에 의하면 열흘에 한 번 보급겸 해서 대규모 화물차 컨베이를 운행한다고 하니까 서둘러 돌아가면 꽤 많이 쌓여있을거야.”
“차라리 그런거면 좋을텐데... 제 손으로 직접 괴수를 죽여야 해서요.”
“뭐? 그건 희한한 소리네. 이능을 개방하려면 괴수를 죽여야 한다니. 혹시 네가 각성하고도 잘 모르고 있던 숨겨진 이능 아닐까? 괴수가 죽을 때 나오는 에너지같은걸 흡수한다던지.”
“글쎄, 자세한건 잘 모르죠. 이것도 제 추측일 뿐이니까요. 원리는 잘 모르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저번에 처음 접촉했을때는 그동안 사냥한걸 바탕으로 부활능력을 부여받은거고, 이번에는 분명히 치유능력 비스무리한게 넘어오다 걸려있는 것 같은데...”
“그걸 마저 받으려면 직접 괴수를 잡아야 한다? 흐음. 이건 또 연구소 아저씨들이 들으면 흥미진진해할 이야기같네. 직접 몸을 접촉해야 하는거야? 그건 좀 위험한데. 혹시 죽은지 얼마 안 된 시체를 만져도 상관없나? 그럼 2팀에 합류해서 부탁을 하는게 어떨까?”
“아뇨, 굳이 직접 손을 댈 필요는 없고, 그냥 제가 죽이면 돼요. 공격이능으로 베어내면 괴수마다 각기 다른 분량의 킬카운트가 적립된다는 느낌?”
“마치 그거같다, 왜, 온라인 게임에서 몹 잡아서 경험치 쌓고 레벨업하는거 있잖아. 큭큭큭. 이 돌덩어리는 레벨 제한이 있는 전직소나 스킬허브 같은거지.”
“하하하, 그럴 듯 하네요.”
정확히 말하면 경험치를 쌓아 레벨업하는건 별개고 킬카운트로 골드를 벌어 액티브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구입하는 매커니즘이지만 윤기정의 비유도 딱히 틀린건 아니다.
음, 그러고보니 레벨도 슬슬 오를때가 됐는데.
저번에 한번 더 올라서 에테르 블레이드가 3레벨이 되었지?
스킬은 자동으로 포인트가 분배되었는데, 그 순서를 정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추측하기로는 전생에 내가 환영검사를 플레이하면서 가장 많이 따랐던 순서를 따르거나 미리 설계된 정석적인 스킬트리를 따라가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공격스킬, 이동기, 은신 유틸기 순서로 하나씩 찍은 이후로는 다시 주력 공격스킬에 투자.
이건 뭐, 상황 안 보고 그냥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순서니까.
사실 특성의 덕을 보아 에테르 블레이드의 데미지가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나로서는 스킬레벨을 더 올려봐야 쿨타임이나 기타 이득없이 주문력 계수만 올라가는 에테르 블레이드보다는 이동속도 상승폭이 높아지는 에테르 폼이나 쿨타임이 줄어드는 에테르 쉬프트를 먼저 올리고 싶었지만, 안 되는걸 아쉬워해봐야 의미가 없지.
그나저나 조금만 더 사냥을 해서 레벨을 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기술을 습득하겠군.
그 게임에서 대부분의 캐릭터가 다 그렇듯 환영검사도 궁극기의 보유여부에 따라 전투력이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니 반가운 일이다.
데미지 딜링기는 아니지만 유틸성도 괜찮고 맞싸움에서도 부족한 스킬이 아니거든.
“어쨌든 일단은 마을로 돌아가는게 좋겠다. 둘이서 부근을 돌며 사냥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2팀에 부탁해서 마지막 일격만 몰아주는 식으로 해보자구.”
“이상하게 여길텐데.”
“그냥 네가 피니셔 맡으면 되잖냐. 아, 혹시 꼭 이능력으로 죽여야 하는거야?”
“그걸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총으로 쏴죽여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 웬만하면 이능으로 잡는게 좋겠죠.”
괴수를 사냥할 때 마지막 일격은 보통 대구경 화기를 장비한 피니셔가 넣게 되는데, 그걸 누가 하느냐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사실 신경쓰는 사람도 없다.
게임처럼 경험치같은게 있는 것도 아니고 킬카운트를 누가 세어주는 것도 아니니까.
잠깐 고민하던 윤기정이 결정을 내린다.
“그래도 역시 둘이서 돌아다닐순 없어. 아니, 돌아다니는건 그럴 수 있다 쳐도 작정하고 사냥에 나서는건 너무 위험하지. 2팀 사냥에 끼어서 눈치껏 막타 넣어라. 네 공격이능은 S급답게 절삭력이 엄청나니까 타격위치와 타이밍만 잘 노리면 충분히 가능할거야.”
“어째 나보다 형이 더 비밀유지에 신경을 쓰는 것 같은데요.”
“네가 너무 조심성이 없는거야. 아무리 같은 회사 동료라고 해도 섣불리 떠벌이고 다닐만한 일이 아니라고. 회사에 대한 충성심, 그런거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알지?”
나는 가벼운 어조로 놀리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윤기정이 내 상황을 다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니까 꼭 맞는 말은 아닐수도 있다.
내 이능력은 사냥과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성장할 수 있다고 봐야 하니까, 괜히 한 칼 꽁꽁 숨겨두는 것보다는 마음편히 드러내고 합을 맞춰 활용하는게 나을수도 있지.
그러나 그런걸 다 감안하고서라도 윤기정의 우려는 들어둘 가치가 있다.
특히 저 형, 내가 총 맞고 부활하는걸 눈 앞에서 목도하기 전까지만 해도 ‘숨겨봐야 손해지, 있는 것 없는 것 다 어필해서 대접받는게 최고’라는 스탠스였으니까.
아무래도 총에 맞고 죽었다가 살아나는 꼴을 보면서 받은 충격이 작지 않았나보다.
“하아,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쉽네. 젠장, 난 왜 안 되는거지? 지호야, 너 새로운 이능을 각성했을 때 딱 느낌이 오냐? 혹시 첫 번째 각성과는 달리 별다른 체감이 없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방금 이 제단에 접촉했을 때 뭔가 능력이 생겼는데 아직 모르고 있는거지.”
“글쎄요.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촉진제 맞고 유도하는거랑은 다르지만 명백하게 체감이 와요. 전에 순간이동이랑 은신 각성하고 바로 활용해서 싸우는거 봤잖아요.”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쉬워하던 윤기정이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쉰다.
괜히 기대를 갖게 했나싶은 미묘한 죄책감이 잠깐 들었다.
---------
제단에서 골드가 약간 부족한 것을 확인한 후 우리는 페어리 마을로 돌아왔다.
윤기정의 의견대로 2팀의 사냥에 끼어서 야금야금 골드를 챙길 생각이었다.
유적을 연구하던 연구원들은 3팀에서 나온 조사대원 두 명이 유적지에 들어와서는 잠깐 구경만 하고 나가버린 것을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우리가 뭘 건드려서 파손한 것도 아닌데, 그 사람들 입장에서야 알 바 아니겠지.
만약 윤기정이 재각성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상부에 보고하고 제대로 한번 연구를 해보자고 하더라도 그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는 비밀유지를 철저히 하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굳이 따라나올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2팀장님도 별 말 안 하셨잖아. 어차피 대열짓는게 아니라 네 옆에 호위로 붙어있는거니까 오른팔을 쓰기 힘들어도 어떻게든 될거야. 왼 손으로 하는 방패질이 좀 서투르겠지만 큰 문제는 없겠지. 너도 그 편이 더 편하고 안심이 되지 않겠어?”
“그건 그렇죠.”
전열에 서서 괴수를 막아낼 때는 신체강화를 발현한채로 탱커 특유의 강인함은 물론이고 괴수의 공격을 정교하게 받아흘리는 방패술까지 있어야겠지만, 유사시 미처 대비하지 못한 치명적인 공격 하나 막아주고 시간을 버는데는 요구스펙이 그렇게 높지 않다.
나는 좀 어색한 느낌이 남는 동작으로 왼손에 든 강화 플라스틱 방패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는 윤기정을 약간 못 미더운 눈으로 보다가 이내 신경을 껐다.
솔직히 말이 보디가드지, 그가 필요할만큼 위험에 처할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다.
혼자서 사냥에 나서는 것도 아니고, 2팀의 거의 전원이 동원된 원정에 끼어들었으니까.
한편, 갑작스레 사냥에 합류해도 되겠냐고 요청하는 우리에게 2팀장은 기꺼이 협조해 주었다.
2팀의 헌터들은 소문이 자자한 신입에게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소속팀이 달라서 마치 군대에서 타 중대 아저씨를 대하는 것처럼 데면데면하게 굴기는 했지만 워낙 쟁쟁한 무용담이라서 그런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힐끔거리더라.
사실 그건 팔할이 윤기정의 탓이기도 했다.
2팀 헌터들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듯한 윤기정은 자랑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숲 안에서 운용할 수 있도록 부속을 약간 떼어내고 차체 프레임도 좀 작은 장갑차에다 짐을 꾸릴 때 2팀장의 옆에 붙어서 훈수를 두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는 연신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성과가 더 좋을거다’라며 설득하는 중이었다.
“형님, 탄약 좀 덜 챙기더라도 적재공간을 많이 확보하는게 낫다니까요?”
“인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잘 자르기만 하면 거대괴수도 두 마리 넘게 들어가겠구만.”
“그걸로도 부족할겁니다. 무박으로 이틀 일정 맞죠? 숲 안에는 아직 덩치 큰 괴수들 서식지가 많이 남아있다고 했잖아요. 부산물 놔두고 마석만 챙겨오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조사된 서식지만 해도 지천으로 널려있으니 찾는건 문제가 아닌데...”
“그럼 끝이죠. 더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 지호, S급도 보통 S급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을 휙 날리면 거대괴수고 나발이고 한 방에 방어막이 전부 상쇄되는걸로도 모자라 그 단단한 몸뚱이가 뚝뚝 잘려나가거든요. 3팀에서 원정다닐 때도 항상 탄약이 많이 남았어요. 심지어 공격조가 탈진해서 이능을 못 쓰는 사태는 아예 없었다니까요? 우진이 아시죠? 우리 공격조장. 걔가 맨날 그러잖아요, 신입만 있으면 우리 공격조는 그냥 필요 없는거 아니냐고.”
“아 거 참. 알았어. 알았다고. 야, 60구경탄 세 박스만 싣고 나머진 빼라.”
정작 나는 조용히 묻어가서 막타 치고 골드나 좀 챙기려는 심산이었는데 윤기정이 저렇게 떠들어대니 2팀의 헌터들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수가 없다.
2팀장과 형님 아우님거리며 한참을 실랑이하던 그는 이내 뿌듯한 얼굴로 돌아와 자랑한다.
“지호야, 우리 3팀 에이스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자.”
그 의기양양한 모양새가 호가호위를 하는 것 같아서 뭔가 귀엽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말할때마다 ‘우리’라는 수식어를 빼놓지 않고 붙이더라.
차 두 대를 끌고 덤 두 사람을 포함해 스물 한 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마을을 나섰다.
마을 외곽의 밭에서 일하던 페어리들이 고개를 쭉 빼고 구경하는데, 그 사이에 익숙해 졌는지 장갑차 엔진음과 궤도 구르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건 물론이고 차 위에 앉아 바람을 쐬는 우리에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드는 꼬맹이들도 몇 보인다.
“오, 티셔츠를 입고 있네요. 그러고보니 밭 가는 농기구도 죄다 지구산인 것 같고...”
“석기쓰던 애들이야. 강철로 된 쟁기며 호미며 수백자루씩 갖다주니 얼마나 고맙겠냐. 옷 같은건 굳이 옷감 가져올 필요도 없이 기성복을 톤 단위로 날라왔더라. 현지인들 산업이 망가지니 어쩌니 하는 우려도 있었다고 들었는데,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뭐.”
“하긴, 망가질 산업이랄게 없는데. 아티팩트만 꾸준히 팔아먹더라도 웬만한 거대유전 가진 산유국 안 부러울텐데 농사짓고 옷감 짜는데 손 들여 고생할 필요는 없겠죠.”
“지금은 우릴 완전히 믿진 않는 것 같지만, 곧 농사도 다 포기할거야. 농사라고 해봐야 그냥 수렵채집에서 반 발짝 더 나간 원시농업인데, 소출이 얼마 되지도 않을거거든. 정부미 남는거 가져다 풀면 식량걱정은 완전히 없어질텐데.”
“요정의 숲까지 거리가 있으니까 운송비가 그렇게 싸진 않을걸요?”
“꼭 그런것도 아냐. 컨테이너 몇 동씩 이어서 화물차를 하루에도 몇 컨베이씩 움직이면 호위할 헌터인력도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들지는 않아.”
윤기정과 2팀장이 쿠르르 굴러가는 장갑차의 해치 위에 걸터앉아 나누는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페어리 왕국의 수도라고 할만한 중심 마을의 전경을 훑어보았다.
이 작달막하고 못 생긴,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귀여운 구석이 없지는 않은 여린 종족은 우리 오닉스 3팀과의 조우로 구원을 받은 종족이다.
고블린들과의 오랜 경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여 인신공양의 제물로 사라지거나 가축화되었을 페어리들을 구해내 번영하게 도왔으니 뿌듯하게 생각해도 되겠지?
고블린들이야 뭐, 안타깝지만 제 놈들 운수가 그랬던거지.
우리가 저지하지 않았더라도 중국 놈들이 공간왜곡 기술을 다 빼낸 뒤에 고블린들을 멀쩡하게 내버려두었을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결국 고블린을 멸족시킨 것도 우리가 아니라 중국 특수군이잖아.
중국에서 공간왜곡 결계에 대한 기술을 확보한건 기정사실이고, 고블린 소굴 여러군데를 폭파하면서 증거를 인멸해서 굳이 국제 사회에서 들추지는 않고 있으니 놈들은 성공한 셈이다.
“그나저나 그 놈들도 징하다니까. 중국 게이트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혼잣말을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국 영토 내에 있는 두 게이트 중 그나마 요정의 숲과 가까운게 해남도 게이트인데, 거기서 여기까진 무려 칠백 킬로미터가 넘는다고.
중국 국적의 헌터가 대규모로 울릉도 게이트를 이용했으면 한국 정부에서 몰랐을 리가 없으니까 그걸 생으로 오가며 작전을 했다는건데... 하여튼 독한 놈들이다.
“길이 좁아진다. 여기부턴 위험지역이니 교대로 하차해서 경계하자고.”
“예. 1조 하차. 삼십분간 선두.”
장갑차가 속도를 줄이니 승차감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아서 해치를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초콜릿 바를 베어물던 공격조원 하나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씩 웃으면서 건빵주머니에서 주전부리를 꺼내 내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