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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화 〉1부 (56/110)



〈 56화 〉1부

내가 깨어난지 삼십여분 만에 간단한 검진을 마친 의사는 내게 퇴원 허가를 내렸다.
외계 감염증 때문에 항생제를 들이붓고 영양보충도 수액으로만  것치고는 몸 상태가 무척 좋다는 말에 나는 내심 아이템 옵션의 영향임을 짐작했다.
방어력이 신체의 강도에 영향을 끼친다고 가정하면, 인게임에서 독이나 저주 등의 디버프나 도트딜의 지속시간을 줄여주고 피해를 감쇄하는 저항력 스탯은 당연히 면역력과 회복력 등의 ‘생화학적 강인함’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는가.
아직 상승분이 적어서 의사가 불가사의하게 느끼는 수준까지는 아닌 모양이다.
이런 사소한 발견 하나하나가 내게는 아이템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채질하는 이유였다.

“진짜 갈거야? 요정의 숲에서 한달이나 지내겠다고? 가족들도  만나고?”


“금방 다녀올거예요. 집에는 거기 갔다 와서 들어가면 되죠. 장기원정 간다고 말했는데 겨우 열흘남짓 지나서 들어가기도  그렇고. 형은 허가받는거도 도와줬으면서 이제 와서 그래요?”

“그거야 네가 뭔 생각이 있겠거니 하고 거들어준거지. 진짜로 넘어갈줄은 몰랐는데. 음, 나쁠건 없나. 하여튼 너도 별종이야. 보통 크게 다쳐서 병원신세를 지면 가장 먼저 가족들 얼굴이 떠오른다고 하던데 말이야. 더욱이 일종의 산재였잖아?”

물론 집에 가서 부모님 품에 안겨서 힘들었다고 울면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가도 마주 안아주면서 ‘얘가  이래? 괜찮아?’ 하고 위로해주겠지만, 그건 되도록 피하고 싶다.
괜히 걱정만 끼칠텐데,  수 있으면 모르고 넘어가시는게 좋으니까.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윤기정 본인도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부활 이능에 대해 말을 아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게 숨겨진 수가 더 있다는 것을 알면서 비밀을 지켜줄 사람이 있다면 나야 편하지.


“다 형 위해서 하는 말이에요. 군소리하지 말고 짐이나 꾸려요. 요정의 숲이 안전지대는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사냥을 하고 다닐 것도 아니니까 호위는 필요없을테고... 총하고 탄약은 그래도 넉넉히 챙겨가는게 좋겠죠? 거대괴수를  볼 일이야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뭐든 없는것보단 짐이 되는게 차라리 낫지. 그나저나 날 위해서 가는거라고? 음, 지호야, 잠깐만. 울릉도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서류처리부터  하자.”


“예? 팀장님이 다 해놨으니까 그냥 넘어가면 된다고 하시던데.”


“아니, 게이트 통과절차 말고. 나 부상 후유증 남는거, 회사에서 보상금 명목으로 돈 나오잖아. 그거 미리 받고 가자고. 나중에 퇴직  하게 되면 말 바꿀지도 몰라.”


역시  말에서 다친 어깨의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읽어낸  같다.
퇴사를 물리면 퇴직금이야 반납해야겠지만 상처가 다 나았다고 해서 부상에 대한 보상금까지 도로 돌려놓으라고 하기는 어려울테니, 일단 받아놓고 봐야겠다는 생각인가보다.
글쎄, 회사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 같지만, 경험짧은 나보단 윤기정이  잘 알겠지.
하긴, 그까짓 보상금 때문에 노련한 탱커의 마음 상할 일을 만들진 않을 것도 같다.
아무리 영구적인 장애를 안게 되었다는걸 가정하고 그 보상까지 감안해서 주는 액수라고 해도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줬던 돈을 뺏는건 너무 야박한 짓이니까.

“사장님이 처음엔 사정 모르시고 격노했다고 하더라. 죽을 자리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애들인데  쉬게 놔두지 무슨 놈의 정찰은 정찰이냐고 강 팀장님한테 소리질렀다던데?”


“아, 그건 좀 죄송하게 됐네요. 아니지, 꼭 사장님한테까지 숨길 일은 아니지 않나?”

“당연히 해명을 하긴 했다는데... 솔직히  같으면 이해가 되겠냐? 처음 죽을 고비를 넘긴 헌터들은 보통 마음을 추슬러 복귀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려. 일종의 통과의례 비스무리한거라서 회사에서도 장기휴가 주고 크게 터치 안 하는게 일반적이고. 근데 넌 의식을 잃고 지구에 실려왔는데도 깨어나자마자 도로 게이트를 넘어가겠다고 한거잖아.”


“음, 확실히 이상하게 보이긴 하겠네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건데.”

“나야 알지. 뭐, 괴짜 이미지 생겨서 꼭 나쁠건 없지만. 아, 네가 페어리 여자하고 사랑에 빠져서 만나러 가는거 아니냐는 소문까지 있더라.”

“미친.”

이름을 그렇게 지어놔서 그렇지 요정이라기보다는 영화에 나오는 호빗에 가까운 원시적 문명의 토착종들인데 누굴 이상성욕자로 보나.
장담하는데  소문을 만든건 페어리들을 한번도 보지 못한 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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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게이트로 연결된 한국 게이트기지는 한국이 보유한 유일한 외계거점이라는 상징성과 조건에 비하면 별로 번화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강릉 훈련소 훈련생 시절에 실습을 위해 방문했을때는 예상 외로 북적이는 숙박지구와 유흥지구를 돌아다니며 외계에서도 할   하는구만,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는데 말이지.
사실 그게 별로 오래된 일도 아니고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그새 이렇게 관점이 달라졌네.
역시 홋카이도 게이트 기지를 다녀와서 비교가 되는건가.
일본도 자국 영토 내에는 홋카이도 게이트 하나만을 보유하고 있으니 양국의 경제력과 헌터인구의 차이를 감안하면 당연한 격차일지도 모르겠다.

“진짜로 왔네...”

“아, 거 좀. 몇 번을 물어요.”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 인마. 왼 손으로 방패를 드니까 영 어색해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어. 자칫 길 가다 괴수와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엔 널 지켜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고.”

“전투가 벌어지면 형은 그냥  몸만 지키면 돼요. 알 거 다 알면서 뭘 새삼스레.”


강경호 팀장 앞에서 가슴을 탕탕 치면서 내 편을 들어주던 호기로운 기세는 다 어디 갔는지 못내 불안한 기색으로 미련을 남기는 윤기정을 끌고 게이트 기지를 나왔다.
오른쪽 어깨 때문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기 어려워서 짐은 간소했다.
며칠분의 식량과 정수제, 두어번 전투를 치를 정도의 탄약이 전부.
어차피 요정의 숲 안에 신일그룹과 정부에서 공동출자하여 세운 연구소와 그에 딸린 주거지역이 조성되어 있을테니 가는 길만 좀 고생하면 물자로 곤란을 겪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사람들도 지금 한창 기지 건설하고 체계 잡아가느라 바쁠텐데, 괜히 가서 민폐 끼치는거 아닌지 모르겠네. 팀장님이 정찰임무로 넣었으니까 협조야 해주겠지만 말이야.”

“민폐를 끼칠 일은 없을걸요? 도착해서 하룻밤 묵고 바로 숲 북부로 갈거니까. 필요한 장비는 전부 챙겨가는데다 우리가 무슨 호위병력 차출을 요구할 것도 아닌데 귀찮게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음, 슬슬 본격적으로 속도 냅시다. 괜찮죠?”


“어깨를 다친거지 다리는 멀쩡하거든? 염려말고 순간이동해라.”

“진짜요? 저 도착할때까지 안 쉴건데. 노숙하는 것보다는 빨리 가서 침대에서 자는게 낫죠.”


쉬지 않고 에테르 쉬프트를 사용하면서 강행군을 할거란 말에 윤기정의 얼굴이 노래졌다.
나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곧바로 쉬프트했다.
살짝 달음질쳐 곧바로 따라잡은 윤기정이 감탄한다.

“넌 어쩐지 전보다 연결동작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그야 하다보면 늘죠."

"굳이 허공으로 이동해야돼? 발목 괜찮냐?"

"익숙해요 이제. 제가 가만히 보니까 순간이동 방식이 순간적으로 일종의 공간문을 여는 것과 비슷해서 연구소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입자가 뒤섞이고 몸이 터져나가고  그럴 일은 없을  같은데, 그래도 땅바닥에 쳐박히는 것보단 허공에서 떨어지는게 나아요.”

지면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허공에 나타난 나는 미리 몸을 긴장시키고 있다가 사뿐히 착지하자마자 자연스럽게 걷는 동작으로 이어갔다.
쿨타임 동안 바삐 다리를 놀려 걷다가 시간이 되자마자 다시 쉬프트.
15초마다 즉시 이어지는 40미터 거리의 순간이동은 뛰어난 이동수단이었다.
쿨다운을 위한 대기시간 이외에 전혀 소모값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흘깃 돌아보니 게이트 기지는 어느새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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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의 숲은 원래 그리 인기있는 사냥터 축에 들지 못하는 곳이었다.
정글이라는 지형은 지구에서도 사람이 지나다니기 까다롭고 위험하지만 동식물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생물이 저마다 보호막을 갖고 있는 이 행성에서는 더더욱 그랬기 때문이다.
물론 게이트를 넘어  행성에 발을 들인 사람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전부 이능력을 각성한 초능력자일테니 이능을 발현한채로 지구에서처럼 우거진 풀숲과 나무덩굴을 쳐내며 길을 개척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오래 이능을 발현한다는건 무척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니 초원과 평야지대가 널려있는데 굳이 숲을 헤치고 들어올 원정대는 많지 않다.

“와, 제 눈에 보인 것만 벌써 세 번째네. 원래 이렇게 북적거렸나요 여기가?”

뭐, 그건 얼마 전까지 그랬다는 얘기고.
오닉스 3팀이 새로 들어온 S급 공격이능을 가진 슈퍼 신입의 적응실습  해서  원정길에서 무려 ‘문명을 이룬 이종족’을 발견하는 뜻밖의 대박을 친 이후에는 그 인기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간 모양이다.
 중앙에 연구소를 짓고 전진거점도  개나 세운다고 했으니 특수군이나 각종 건설인력들이 몰리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외에도 외부 헌터들이 눈에 많이 띈다.
중국 특수군과 얽힌 비사는 정부에서 보안을 유지하겠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가 겪은 모험담이 파편적 정보의 형태로나마 공개가 됐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겠네.
얻을 것 없이 피곤하기만  험지에서 온갖 신비를 간직한 보물섬이 된 셈인가.


"너 순간이동 자제해야겠다. 괜히 남들 눈에 이상하게 비쳐서 좋을  없지. 길도 어느 정도 정비가 됐는데 잘 닦인 길 놔두고 괜히 험한 곳에 기어들어갈 필요도 없고.”

“그렇죠. 우리가 사냥하러 온 것도 아닌데.”


“그래, 사냥하러 온건 확실히 아닌데... 왜 온거냐 여기? 이젠 숨길거 없잖아, 여기까지 와서. 혹시 새로운 이능력의 각성을 촉진하는 포인트가 숲 안에 있는거야?”


“오, 진실에 상당히 가까운 추측인데요?”


나는 잠깐 멈칫했지만 윤기정의 말마따나 여기까지 와서  숨길 이유가 없다.
사실 어깨를 치료할  있을거라는 암시를 줬을때부터 이미 다 말한거나 다름없지 뭐.


“북부 유적지 있죠? 왜, 페어리 왕의 의뢰 때문에 거대괴수 토벌하러 갔을 때 발견한거요. 그때 제가 주의깊게 보던 제단 기억나세요?”

“어. 그게 뭔가 대단한 유물이었나보지? 젠장. 그런줄 알았으면 나도 끼었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끼면 되죠. 일단 전  제단에 몸을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이능을 얻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전부 적용되는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뭔가 다른 조건이 걸려있는데 제가 우연히  조건을 충족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장담은 못 해요.”


“가능성은 있다는거잖아. 그게 어디냐. 복수이능력자들은 몸값의 자릿수부터가 다른데.”


이걸 왜 당시에 바로 말 안하고 숨겼느냐는 추궁 혹은 핀잔이 돌아올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동안 지켜본 바로는 상당히 애사심과 자부심이 컸었는데 말이야.
단순히 애사심만으로 숨김없이 드러내어 바치기엔 너무  건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부활이능의 각성사실도 내 결정을 기다리는 듯 회사에 보고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요, 어디 한번 걸어봅시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되어도 너무 실망하진 말구요.”

굳이 초를  필요는 없어서 맞장구는 쳤지만 솔직히 안 될거라고 예상한다.
이능력 각성자라고 전부 상점창을 이용할  있었다면 협곡분지의 동굴 끝에 있ᄋᅠᆻ던 제단을 일본 애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방치하고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고 꼭 나만  수 있을거라는 보장은 아직 없지만 적어도 그렇게 흔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속으로 조심스레 했던 추측, 그러니까 이 세상이 세월이 아주 많이 지난 게임  세계관이라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나 말고도 쓸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있긴 있겠지만.
리그의 챔피언으로 등록하는 조건이 뭐였더라?
희미한 기억이지만 아마 소속 부족을 대표하는 대전사가 되면 참전할 수 있었던걸로 아는데.
이럴줄 알았으면 게임 설정을  더 자세히 읽어볼걸, 하다가  웃고 말았다.
‘이럴줄 알았다면‘이라는 가정이 우스운게, 죽어서 게임 캐릭터의 스킬을 가지고 환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미리 대비를 하면 그건 그냥 미친 놈이 아닌가.
나도 게임을 하면 스토리를 안 읽고 스킵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게임은 대전 AOS장르라서 스토리는 장식인데다 그마저도 게임사에서 무성의하게 짜기로 악명이 높았다.


“야, 저 놈들 지금 우리한테 오는거 맞지?”

다른 생각을 하던 나는 윤기정이 옆구리를 쿡 찌르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전방을 주시했다.
앞서가던 십수명 정도 되는 무리가 멈추고  중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경로가 겹쳐서 신경이 쓰였나?
하지만 관례적인 안전거리도 충분히 유지하고 있었던데다 요정의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 중 잘 닦인 길은 한정적이라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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