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1부
“오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는데, 이건 단연코... 컥! 잠깐만...”
오해는 무슨, 상황이 이보다 뻔할 수가 없는데.
나는 기어나오던 피터의 얼굴을 발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면전에선 일본을 공적으로 두고 협조를 하니 어쩌니 하더니 뒤에선 호박씨를 까고 있었나.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고 척살대를 보냈나 했더니 이 새끼들이 사주한거였구만.
“크읍. 지,진정하세요. 마음은 알겠지만 여기서 날 죽여선 안 됩니다.”
그는 피와 침, 부러진 이빨이 섞인 덩어리를 뱉어내고는 코피를 흘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총을 뽑아 처형하듯 머리를 날려버리려다가 잠깐 멈칫한다.
그래, 뭔가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
예를 들면 뒤늦게 추적대의 출발을 눈치채고 항의하기 위해 방문한 참이라던가...
“내가 여기서 죽으면 오닉스의 처지도 무척 곤란해집니다. 중앙정보국은 원한을 쉽게 잊지 않으니까요. 아직은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한미일 삼국이 긴밀하게 공조하여...”
타앙.
경쾌한 총성과 함께 이마에 구멍이 뚫린 피터의 몸이 뒤로 털썩 넘어간다.
그러니까 네가 계획을 유출해서 우릴 죽이려던게 맞다, 이거 아냐?
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하고 앉아있어, 짜증나게.
물론 내게도 믿는 구석은 있는게, 이건 내 단독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야 바로 몇 시간 전에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데다 혹시 불구가 될지도 모를 윤기정의 부상 때문에 머리에 열이 좀 올라있는 상태지만 전택영 사장은 신일그룹 공채 출신으로 산전수전 다 겪다가 오닉스에 부임한 사장이니까.
다 이것저것 계산해보고 저질러도 되겠다 싶으니까 시켰겠지.
“미국이 배신한 것까지는 몰랐을 것 같지만... 에이, 못 봤다고 하면 되겠지.”
생포해서 끌고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금 세자릿수의 병력이 도사리고 있는 적진에 혼자 난입한 꼴이니 그럴만한 여유는 없다.
날 알아본 순간에 이미 저 아저씨는 죽어야 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나는 상황이 달랐다면 꽤나 유쾌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를 피터의 시체를 뒤로 하고 기지 중앙의 지휘통제실로 보이는 건물로 쉬프트했다.
여기 주둔하는 병력이 정예는 정예인 듯, 혼란은 몇 분 안 되는 사이에 빠르게 잦아들었다.
에테르 폼을 활성화한 상태라서 당장 들키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조사와 내부 수색이 진행되면 계속 숨어있는건 불가능해진다.
굳이 탐지계열 이능력자가 있는지 없는지 따질 것도 없지.
놈들이 머리가 있다면 이 상황에서 하루도 되지 않은 추적 및 척살작전의 목표를 떠올리지 않을 리가 없고 그럼 적외선이나 열감지 장비를 이용하려는 생각을 안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쉬프트 직후에 에테르 블레이드를 발출하며 총을 뽑았다.
천막으로 된 막사나 컨테이너 가건물로 구색만 갖춘 식당, 창고와 달리 크진 않지만 벽돌을 쌓아올려 제대로 올린 지휘소의 철문이 반으로 쪼개진다.
그대로 박차고 들어가니 재수없게도 철문 뒤를 지나가다가 에테르 블레이드에 맞았는지 팔 한쪽을 잃은 병사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아연한 표정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반응하기 전에 자동권총을 난사해서 사살한다.
물론 내가 권총사격에 특출난 조예를 가진건 아니니 이 안에 있는 예닐곱의 장정을 단숨에 전부 쏘아 거꾸러뜨리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게 별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섯 명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고 두 명이 발악하듯 마주 총질을 하지만 나는 일말의 두려움조차 없이 총격전에 임하여 그들마저도 쓰러트리고 만다.
“크윽, 이걸 어쩌지? 그렇다고 자살을 할 수도 없고...”
수호자의 맹약이 발동할 것을 각오하고 벌인 짓인데, 저 놈들의 훈련도가 부족했던건지 아니면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제대로 조준할 여유가 없었던건지 나는 죽지 않았다.
첫 급습때 쓰러트리지 못한 두 명이 쏜 서너발의 총알은 단 한 발을 제외하고는 모두 빗나갔고 그나마 내 몸에 닿은 한 발도 명중했다기보다는 스치고 지나간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상처에서 참기 어려운 격통이 올라온다.
차라리 치명상을 입었다면 2초 가량의 경직 후에 풀 컨디션으로 회복되어 멀쩡해졌을텐데.
“젠장. 아파서 걷기도 힘들잖아.”
다리를 다친게 아니라서 기동에는 큰 지장이 없을줄 알았는데, 막상 지휘소에 널린 서류들을 노획하려고 무심코 한 걸음을 떼어보니 그게 아니다.
배에 힘이 들어가질 않으니 상체고 하체고 덩달아 힘이 빠져버리는 것이다.
한 걸음을 내딛는순간 허벅지와 엉덩이부터 시작해서 코어에 힘이 들어가다가 옆구리의 상처에서 머리가 하얗게 변할만큼의 격통이 올라오는게, 당장 총을 입에 물고 쏴버리고 싶다.
그러면 수호자의 맹약 아이템 효과로 전부 치료될텐데.
으으, 그래도 그건 아냐.
다시 살아날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차마 맨 정신으로는 그런 짓 못 하겠네.
나는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 옆구리의 상처를 꾹 누르면서 힘겹게 지휘소를 빠져나왔다.
마음같아선 기지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싹 청소를 하려고 했는데, 이런 상태로는 어림도 없다.
하긴, 이대로 빠져나가기만 해도 목표는 초과달성이지.
탄약고와 함께 기지의 절반 이상을 날려버리고 지휘통제실까지 습격해서 장교로 추정되는 사람도 일곱이나 사살했으니 이건 이미 사보타주 수준이 아니다.
그나저나 총이 무섭긴 무섭구나.
수호자의 맹약에는 고유효과뿐만 아니라 방어력과 체력 보너스도 달려있는데다 방어력 일차 아이템도 두 개나 더 있어서 기본 방어력이 꽤나 높을텐데, 그 옵션효과를 받아서 단단해진 몸뚱이도 단 한 방에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소총이나 샷건도 아니고 대인용 권총탄이었는데 말이야.
역시 기회가 되는대로 꼬박꼬박 제단을 찾아 아이템을 구입하는걸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괴수가 아닌 사람을 죽인걸로도 골드가 올라가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네.
만약 살인에도 골드를 쳐준다면 지금쯤 저번에 사놓은 하위 방어력 아이템을 천사의 단지를 업그레이드할 돈이 모였을 것 같은데.
“이봐, 괜찮은가? 응? 못 보던 얼굴인데, 혹시 오늘 새로 온... 억!”
피로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옆구리를 손으로 감싸쥔채 끙끙대는 날 보고 돕기 위해 다가온 어느 병사의 목을 에테르 블레이드로 날리고 쿨다운이 끝난 에테르 쉬프트를 다시 발동한다.
불과 두 번의 쉬프트로 나는 혼란 속의 기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에테르 쉬프트 두 번이면 거의 백여미터에 가까운 이동거리인데 그리 크지도 않은 군사기지의 중앙에서 외곽 절벽으로 벗어나는데는 차고 넘치지.
엎드려서 은엄폐한 상태로 젤 형태로 된 지혈제를 상처에 덕지덕지 바르며 나는 내가 빠져나온 일본 특수군의 비밀거점을 내려다보았다.
절벽쪽에 면한 탄약고를 기준으로 절반 이상이 폐허가 되었고 살아남은 병사들도 지휘관의 부재 탓인지 간신히 되찾아가던 질서를 다시 잃어가는 모양새다.
상처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실실거리는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새어나온다.
그러게 왜 멀쩡히 길 가는 사람을 건드려, 건드리긴.
---------
지혈과 소독을 한번에 할 수 있는 젤의 성능이 좋은건지 아이템에 붙은 체력옵션 덕분에 재생력이 올라간건지는 몰라도 두어시간이 지나니 통증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아직 뛰는건 무리지만 빠르게 걷는 정도는 좀 불편해도 그럭저럭 가능해졌다.
물론 내가 그동안 적지 한가운데에 가만히 앉아서 회복을 기다리기만 했던건 아니다.
스킬의 발동은 몸 상태와 무관하게 할 수 있는거니까.
왔던 길을 되짚어 게이트 기지로 복귀하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에테르 폼을 활성화하고 게이트 기지로 접근하던 나는 기지 안이 소란스러운 것을 눈치챘다.
음, 아마 무선으로 통신이 연결되어 있었나보지?
방벽을 넘어 기지 너머로 쉬프트한 후 숙소로 돌아와 누우니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지친 몸에 탈력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오는 것 같다.
옷을 벗고 옆구리의 상처를 살피니 이건 뭐 내가 어떻게 손을 댈만한 견적이 안 나온다.
살짝 스친 줄 알았는데 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게 파였네.
단순히 할퀴고 지나간게 아니라 거의 관통하다시피 한 모양새다.
“이거 성능은 확실한거겠지...?”
젤 형태의 지혈제에 소독효과는 물론이고 항생제까지 들어있다고 알고 있긴 한데, 피부가 뭉개져 시뻘건 속을 드러낸 꼴을 보니 알면서도 불안해지는건 어쩔 수 없다.
빨리 치료를 받긴 받아야 하는데, 게이트를 넘기 위해 스캔을 받다보면 다친걸 들킬테고 그러면 바보가 아닌 이상 비밀기지의 파괴와 부상을 연관짓겠지.
결국 꼼짝없이 지원대가 게이트를 넘어올때까지 여기서 쉬면서 기다려야 할 처지다.
에이, 설마 죽기야 하겠어.
어라, 잠깐만, 상처 감염의 후유증같은걸로 심장이 멎어도 수호자의 맹약 효과가 발동할까?
만약 발동한다면 그건 단순히 여벌의 목숨같은게 아니라 사실상의 불로불사...
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그대로 몰려오는 졸음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고민을 하더라도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맑은 머리로 하는게 낫겠지.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이 보였다.
“어...?”
몸을 일으켜 둘러보니 여긴 병원 같은데?
난 분명 게이트 인근의 숙소에서 문을 잠그고 잠을 청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당황해서 일어나 침대에서 빠져나오려는데 왼팔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진다.
아, 링겔을 맞고 있었구나.
그 서슬에 왼팔의 혈관에서 빠져버린 주삿바늘 끝에서 뭔지 모를 약이 몇 방울 떨어진다.
방 안을 둘러보니 병상이 두 개 놓인 2인실이었다.
게이트 안쪽인지 지구의 병원인지 모르겠네.
반대편의 빈 침상 위의 흔적을 봐선 다른 사람 하나와 같이 쓰고 있는 모양인데?
그 때 병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튀어나온다.
“에이, 괜찮다니까요. 신경써주는건 고마운데... 응? 지호야? 너 깨어났구나?”
“형,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예요? 내가 왜 여기 누워있죠?”
“그건 내가 묻고 싶군.”
반가워하는 윤기정의 등 뒤에서 강경호 팀장의 얼굴도 보인다.
응? 강경호 팀장?
팀장님이 왜 여기 있어요?
내 기억에 우리 3팀이 협곡 기지에서 복귀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상황판단이 되지 않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으니 강 팀장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입을 연다.
“어, 그러니까 제가 지원팀에게 기정이형을 인계하고 게이트를 다시 넘은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는거죠? 일주일동안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다구요?”
“그래, 인마. 너 진짜 큰일날뻔 했어. 아니, 패혈증이 우스워보이냐? 살짝 긁힌 상처도 덧나면 몇날 며칠을 앓는데, 아예 살점이 한 움큼이나 뜯겨나갔더만. 의사가 그러더라, 안 죽고 살아난게 천만다행이라고. 1팀 사람들이 조금만 더 늦게 게이트를 넘었다면, 혹은 게이트 기지 내에서 너 찾을 생각 안 하고 알아서 잘 돌아갔겠거니 했으면 너 진짜 죽었을거야.”
아, 그럼 역시 여긴 지구의 병원인가.
3팀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다른 팀의 헌터들이 쓰러진 날 발견하고 지구로 후송했나보다.
“아... 역시 응급처치가 너무 엉성했나.”
“응급처치를 하긴 했냐? 그냥 젤만 바르고 상처난 그대로 방치한 것 같던데. 사장님도 그저께 문병하고 가셨는데, 단단히 한 소리 하고 가셨어. 팀원들 필수 생존교육 제대로 안 받았냐고.”
“너무 졸려서 잠깐만 자고 일어나서 치료받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구급 젤에 소독효과도 있다면서요? 소독만 하면 감염은 안 되는거 아녜요?”
“상처 속까지 꼼꼼하게 했으면 그랬겠지. 쯧쯧.”
“원정 나올 때 각종 백신도 다 맞았는데.”
“외계 변종이라더라. 하여튼 위험했어. 아주 죽다 살아난거지.”
입 안으로 툴툴대는 소리를 꿀꺽 삼킨다.
어차피 잘못 되었어도 다시 멀쩡하게 살아났을텐데 뭐.
한참 잔소리를 이어가는 강경호 팀장의 말을 짐짓 다급한 목소리로 끊었다.
“아, 맞다. 팀장님, 큰 일 났어요. 정보 공유해주고 협상했던 양키들 있잖아요. 그 새끼들이 배신했어요. 기정이형한테 들어서 우리가 오다가 습격당한건 알고 계시죠? 그게 다 중앙정보국 놈들이 정보를 흘려서...”
“알아. 이미 사과까지 다 받았다. 일선 요원의 개인적인 일탈이라고. 피터라는 놈이 일본 애들한테 돈을 받고 매수당했다고 하던데?”
“그걸 믿으세요?”
“아니. 근데 안 믿으면 뭘 어쩌게? 일본이랑 이미 한판 붙었는데 여기서 미국까지 들이받게? 내가 안 그래도 이 말 하려고 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거냐? 혼자서 일본 특수군의 주둔지를 습격했다며? 목숨이 한 열 개 되냐?”
적절한 상황만 따라준다면 열 개가 뭡니까, 반 무한이라고 봐도 될텐데.
회사에선 아직 내 네 번째 이능, 그러니까 수호자의 맹약에 달린 부활 효과에 대해 모르는건가 싶어서 윤기정을 바라보니 그는 픽 웃으면서 살짝 고개를 가로젓는다.
뭐, 저 형이 말을 안 했으면 나도 굳이 먼저 나서서 밝힐 필요는 없지.
나는 항변했다.
“제가 독단적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 다 사장님 지시를 받아서 한 일이라구요.”
“뭐? 지시를 받아? 사장님이 미쳤냐, 자살공격 임무를 맡기게?”
“진짠데... 제 핸드폰 어디 있죠? 아, 여기 있네. 이메일 받은거 보여드릴게요.”
“나도 사장님한테 말씀 들었어. 대체 그 메일의 어디에 혼자서 군부대 하나를 습격해 날려버리라는 소리가 있다는거야? 그냥 정찰해서 혹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면 파악하라는거지. 네 은신이능과 순간이동 이능에 대해 보고받고 굉장히 감명을 받으셨나보더라.”
어... 그런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직접적으로 공격하라는 명시적 표현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분명히 위치를 찾아내서 보복을 하자는 말이 있잖아.
억울한 마음에 이메일 전문을 들이대며 해당 문장을 짚으니 강 팀장이 이마를 탁 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