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1부
다시 게이트를 넘어 전진기지로 들어온 나는 면피용으로 방을 빌려 숙소를 마련한 후 에테르 폼을 활성화한채 빠져나와 출입 신고도 없이 몰래 벽을 넘었다.
전택영 사장은 게이트 전진기지 인근에 일본 특수군의 기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내게 여유가 된다면 그 거점을 찾아낼 것을 부탁했다.
습격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을 하자는 주장, 나는 대찬성이다.
“그래, 확실히 일리가 있어.”
대인전투를 위한 장비를 갖춘 특수군이 게이트 기지나 협곡기지에서 출발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분지 안의 병력도 결국 밖으로 나오려면 협곡기지를 거쳐야하니 마찬가지다.
즉 외부에 특수군이 주둔하는 비밀 군사거점이 하나 이상 있다는 뜻이지.
우리가 추적대를 역으로 잡아내고 게이트를 성공적으로 넘었으니 뭔가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수색에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못 할건 없지.
협곡 기지와 게이트 기지의 사이는 쫙 펼쳐진 평야 지형이라서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군대가 은밀하게 주둔하기 어려우니까 존재한다는 확신만 있다면 찾아볼만한 곳이 많지 않다.
전 사장의 판단대로 우리가 추적대와 조우한 시점을 감안하면 게이트기지 인근에 있을 확률이 높으니 이쪽에서부터 훑어보면 되겠지.
근처의 고지대에 올라 지도를 펼치고 수색계획을 세우다가 문득 기지 쪽을 보고 픽 웃었다.
“음, 따로 수색을 할 필요도 없겠군. 운이 좋은건지, 아직 안 늦어서 그런건지.”
게이트 기지에서 십수명의 무리가 나오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동아시아인이라서 근처를 순찰하는 브라질 헌터팀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물론 브라질은 남미에서도 일본계 인구의 비중이 높기로 유명하고 아까 보니까 순찰을 나왔던 브라질 팀에도 동양계가 꽤 많긴 했지만, 저렇게 전부 검은 머리라는건 말이 안 되지.
무엇보다도 차량이 하나도 없다!
괴수를 잡아봐야 사체나 부산물을 싣고 올 짐차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어깨에 멘 라이플까지 감안하고 보면 저들이 대인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무리라는건 명백하다.
종합해보면 녀석들은 별로 헌터로 위장할 생각도 없어보인다.
사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누가봐도 군인들인걸.
“생각해보니 병력이동이 있을만하네. 본국에서 새로 투입되는 놈들인가보지?”
내가 죽인게 겨우 장갑차 두 대 분량의 인원, 그러니까 많아야 스물 남짓한 인원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징집해서 총 한 자루 들려주고 한달남짓 훈련시킨 병사들이 아니라 특수군이다.
이능을 각성한 귀하디 귀한 이능력자 중에서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이 자원하여 반 년에 가까운 훈련을 거쳐야 완성되는 금쪽같은 병력인데 머릿수가 많을리 없지.
두 개 분대 정도면 만만찮은 타격인 셈이다.
음, 어쨌든 잘 됐네.
이대로 저 놈들을 따라가면 숨겨진 비밀 군사기지까지 안내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차를 타고 전력으로 달린다면 따라붙기가 좀 버겁겠지만 저렇게 도보이동을 한다면 누워서 하품하면서도 놓치지 않고 미행할 수 있다.
에테르 폼을 활성화한채로 에테르 쉬프트를 이용해 그들을 따라붙으며 나는 고민했다.
비밀 군사거점을 찾아내는것까진 좋은데... 사보타주의 수위를 어떻게 해야하지?
시설을 파괴하는건 디폴트고, 문제는 거기 있는 군인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의 숫자만 벌써 두자릿수를 훌쩍 넘기니까 수십명을 죽인 살인자가 이제와서 고민을 한다는 것도 웃기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다.
중국 특수군도 그렇고 일본 특수군도 그렇고, 이쪽이 먼저 습격을 받은 상태에서 반격을 가해 죽인 경험밖에 없는데 지금은 내가 먼저 기습을 하러 가고 있는거니까.
물론 머리로는 정당한 보복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아무래도 심적 부담 면에서 차원이 달라.
기계적으로 쉬프트하며 이동하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고민을 끝냈다.
“에이, 어쩔수 없지. 그렇다고 가만 놔둘수도 없는거고.”
이건 이미 전쟁이다.
시설과 무기만 파괴하고 갈게요, 한다고 해서 놈들이 네 그러세요,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리도 없으니 한바탕 전투는 필연인데, 내가 무슨 슈퍼맨도 아니고 일일이 적들의 목숨까지 배려해가면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심지어 슈퍼맨도 요즘 나오는 영화에서는 콜래트럴 데미지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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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력하면 신체강화가 가장 흔해서 활약만큼의 몸값을 못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군문에 발을 들이는 각성자들 중 대부분이 신체강화 이능력자들이었다.
일본 특수군으로 추정되는 십수명의 무리를 따라가는동안 나는 그들중 신체강화 능력자가 아닌 다른 이능력자가 세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행군을 버티지 못하고 동료에게 업혀서 가는걸 보면 굳이 대단한 추리능력도 필요없지.
저 세 명 중에 탐지능력자가 없으란 법이 없으니 나는 거리를 약간 더 벌렸다.
“아, 보나마나 저 안쪽이군. 대공사를 한거야, 아니면 그냥 저런 지형을 찾아낸거야?”
몇 시간에 걸친 행군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야트막한 언덕을 등진 캠프였다.
삼면을 덮은 언덕빼기때문에 홋카이도 게이트 쪽에서 오던 사람은 발견할 수 없는 구조였는데, 조만간 떠오를 위성의 감시도 감안한 것인지 위장막을 펼쳐 덮고 있었다.
만약 망설임없이 언덕을 돌아 입구를 찾아들어가는 저 무리를 뒤쫓는게 아니었다면 나도 이런게 있는줄 모르고 지나쳤을법한 꽤나 그럴듯한 은폐였다.
“후우, 좋아. 낙관적인 계획은 위험하지. 기본적으로 탐지수단이 있다고 가정하고...”
아직 투명한 괴수가 발견된 적은 없는데다 내 은신능력도 이례적인 것이라서 설령 보고가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적외선 탐지장비로 감시망을 갖추어 놓기에는 시간이 좀 부족했겠지만, 탐지에 관련된 이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추적조의 그 놈 말고도 더 있을수 있다.
내가 기척을 감춘답시고 몸을 낮추고 느릿하게 기어가더라도 별 효과는 없겠지?
전문적인 잠입훈련같은걸 받은게 아니니까 말이야.
그럼 최대한 접근한 후 에테르 쉬프트로 단숨에 들어가서 보호막을 믿고 대처하는게 낫겠다.
물론 기지 중앙으로 쉬프트해서 생각없이 에테르 블레이드를 휘둘러대며 날뛰면 위험하겠지만 그건 자살행위고, 조금이라도 상황판단을 하면서 움직인다면 순간이동과 일시적이지만 강도는 무한한 방어막, 여벌목숨가지 있는 내가 잘못될 확률은 희박하지.
나는 우선 군사기지 후방의 언덕에 올랐다.
여기에도 뭔가 방어를 위한 트랩이라도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작정하고 건물을 올리고 알을 박아놓은 협곡 내부 분지의 연구소와 달리 이곳의 군사기지는 언제든 수틀리면 접고 철수할수 있도록 만든 임시거점의 티가 난다.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위장막을 꽤나 꼼꼼하게 덮긴 했지만 역시 빈틈이 많이 보인다.
용케도 이런 지형을 찾아냈구나 싶게도 십여미터나 되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침투하기가 쉽지 않아보였지만 당연히 장장 40미터에 이르는 순간이동 스킬이 있는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가건물이라기에도 초라한 천막들이군. 저 친구들도 고생이 많네.”
하긴, 군인 신세가 다 그런거지 뭐.
내가 저래서 안정성이고 나발이고 나랏일은 하기 싫었던거다.
웬만큼 뻔뻔한 기업이라도 자기네 회사를 위해 죽어달라는 소리는 차마 하기 어려운데, 그게 나라가 되면 마치 정당한 대의명분이라도 되는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아지거든.
나는 위장막 사이로 보이는 공간으로 쉬프트했다.
짐을 쌓아놓은 틈새 음영진 곳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기지는 꽤 넓었는데, 막사로 쓰는듯한 천막 대여섯개가 가장 안쪽에 있고 그 옆의 가건물은 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여럿 놓인걸로 보아 취사시설로 보였다.
각종 창고로 쓰는듯한 컨테이너 여러 동이 성벽처럼 입구를 좁히고 있었고 그렇게 좁힌 입구에는 바리케이드와 초소가 있어서 후방으로 들어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아, 철조망과 쇠사슬로 둘러놓은 저 가건물이 아마도 탄약고와 무기고겠지?
그럼 저 안으로 침투해서 폭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기지를 날려버릴수 있겠는걸.
그래서 나는 즉흥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커억! 끄르르...”
옆구리에 달린 홀스터에 권총 한 자루를 차고 경계를 서는건지 아니면 외진 곳에 숨어 낮잠을 자는건지 모를 자세로 보초를 서던 특수군 병사가 목을 움켜쥐고 헛숨빠지는 소리를 낸다.
에테르 블레이드의 발출 위치와 각도를 잘 재긴 했지만 세 걸음 정도 떨어져서 보초를 서던 두 명을 스킬 한번에 처리하려고 하니까 길이가 살짝 모자라서 그의 목은 반쯤 베인 것이다.
물론 무력화엔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그 옆에 있던 다른 병사는 아예 목이 완전히 잘려서 몸에서 똑 떨어져나갔다.
혈압이 꽤 높았는지 분수처럼 피가 솟구치며 수급이 거의 일 미터 가까이 하늘 위로 치솟아올랐다가 떨어지고 폐에 피가 차서 질식하는 단말마가 천천히 꺼져 잦아든다.
잔혹하고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그동안 몇 번 봤다고 나도 이젠 익숙해졌는지 별다른 거부감이나 거리낌없이 발로 시체를 툭 밀어서 옆으로 치울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헌터가 되기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니지, 엄밀히 따지자면 첫 원정때 격변을 겪었다고 봐야겠지.
그때 첫 살인을 했으니까.
물론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정당방위였다고 스스로 납득하고 있으니 죄책감같은건 거의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사람을 죽인 경험이라는건 사람을 바꾼다.
“돈이 없는것도 아닐텐데 기본적인 경보시스템이라도 구축해놓지...”
탄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문득 허탈해져서 작게 투덜거렸다.
사람이 경계근무를 서는 것보다는 차라리 무인감시 시스템을 들여놓는게 저렴하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나도 이렇게 쉽게 침투하진 못 했을테고.
아무래도 일본은 이 곳의 비밀기지가 습격받을 가능성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았나보다.
탄약고 안에서 폭파준비를 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그야 이런 고화력 무기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교육받진 않았지만, 내게도 눈은 있거든.
한눈에 봐도 뭐가 폭발물인지는 안다.
눈에 익은 대인지뢰부터 다이너마이트처럼 생긴 폭약들도 꺼내고 탄약상자도 열어제낀다.
시한 기폭장치를 설치해서 정교하게 원하는 시간에 폭파할 지식은 없지만 탄약고 앞에서는 담배도 함부로 못 피우게 하는 이유가 뭐겠어.
그냥 수류탄을 잔뜩 꺼내서 한꺼번에 터뜨리면 그게 기폭장치지 뭐 별거 있나.
손에 잡히는대로 상자를 열다가 머지않아 수류탄을 모아놓은 상자를 발견했다.
대여섯개를 꺼내 동시에 쑥 안전핀을 뽑으니 손잡이가 튕겨나가며 경쾌한 격발음이 들린다.
그걸 폭약이 가득한 상자에 흩뿌리듯 골고루 던지는데 걸린 시간이 약 2초에서 3초 가량.
살짝 열어놓은 문 틈을 바라보며 쉬프트했다.
“아이고, 하필 지금. 교대하러 오시나봐요? 조금만 더 늦게 오시지.”
“뭐,뭐야? 한국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거...컥!”
“텔레포트? 대체 언제... 큭!”
재수없게도 마침 그 때 교대를 위해서인지 막사 쪽에서 탄약고로 걸어오던 두 명이 경호성을 지르며 권총에 손을 가져가지만 생각만으로 발동할 수 있는 내 스킬쪽이 당연히 더 빠르다.
둘 다 신체강화 능력자여서 그나마 총을 뽑기 직전까지라도 간거지.
에테르 블레이드로 베지 않았어도 저들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을 벤 후 등 뒤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렸으니까.
꽈앙, 하는 폭음과 함께 탄약고 쪽에서 어마어마한 폭압을 동반하며 총알처럼 날아오는 파편들이 에테르 쉬프트의 방어막 위를 후두둑 두들긴다.
내가 생각했던 폭발, 그러니까 탄약고를 중심으로 유폭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기지 전체가 날아가는 수준의 대폭발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폭심지는 깨끗이 지워진 것 같다.
의외로 탄약고에 적재된 폭약들의 양이나 성능이 부족했던건지 아니면 안정성이 예상 외로 뛰어나서 고작 수류탄 정도로는 충분히 기폭하기에 부족했던건지 모르겠네.
물론 이 정도로도 노리던 효과는 넘치도록 달성이다.
“습격이다! 비상! 비상!”
“4번과 5번 텐트가 통째로 날아갔어! 의사! 의사 어딨어! 여기 도움이 필요해!”
“닥치고 일단 무기부터 들어! 습격이라고!”
폭압에 날아가버린 텐트 인근에서 심각한 화상과 타박상을 입은 반 시체들이 꿈틀거리며 굴러다니고 멀쩡한 사람들도 패닉에 빠져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어쩔줄 모른다.
개중에는 일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며 경계태세를 취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의 백여명이나 되는 인원이 들끓는 이 혼란을 수습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인다.
아, 방금의 폭발로 적게 잡아도 스물 가까이는 무력화된 것으로 보이니 백 명이 안 되겠네.
나는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총성을 내서 주목을 끌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서로 빠짐없이 얼굴을 알 정도로 적은 규모의 부대는 아니었던데다 민간헌터로 위장할 일이 많아서인지 이렇다할 유니폼도 없었기에 내가 단번에 눈에 띄지는 않는 모양이니까.
혼란을 이용해 빠르게 기지 중심부로 파고들다가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욕설을 내뱉으며 쓰러진 천막을 헤집고 기어나오는 사람의 얼굴이 무척 낯익었기 때문이다.
“What the..."
“어? 잠깐만. 아저씨가 거기서 왜 나와요?”
“뭣? 지호 초이? 대체 여긴 어떻게...”
분지 안의 연구소를 정찰하고 나오는 길에 만났던 미 중앙정보국의 요원.
이름이 피터랬나?
레이시스트같은 말실수를 한번 하긴 했지만 말하는게 살짝 얼빠진 티도 나는데다 어수룩하고 옆집 바보형같은 친근한 분위기를 풍겨서 크게 경계하지 않았던 놈이었는데.
굉장히 당황해서 굳어있는 피터만큼이나 나도 뒤통수가 당황스러우리만치 얼얼하다.
저기, 지금 여기서 뭐하고 계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