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9화 〉1부 (49/110)



〈 49화 〉1부

내 의견대로 기동방식을 바꾼 이후, 행군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이전까지 따라붙느라 죽을 고생을 했지만 그마저도 윤기정의 입장에서는 날 배려하여 속도를 약간 늦추고 페이스를 조절하며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시간동안이나 꾸준히 순간이동을 하는  이능의 지속력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우려를 거두지 않았지만 물론 그의 걱정은 기우였다.
쿨다운 시간이 필요할뿐 소모자원이 전혀 없으니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인 것이다.
이걸 설명을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명을 하기가 사실 좀 애매하다.
각성자들이 이능력을 사용하는데 제한이 있긴 하지만 무슨 게임처럼 스킬사용에 필요한 자원값이 최대량, 잔여량, 단위시간당 회복량 해서 딱 표시가 되는게 아니니까.
흔히 ‘정신력’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표현하는 이능지속력은 어디까지나 감으로 측정하거든.
내가 처음 각성테스트를 받은 노원 센터에서도 그랬잖아.
상당히 정밀한 기준으로 측정하는 파괴력이나 연사력 등에 비해 지속력은 그저 이능을 적당히 썼다 싶으면 ‘얼마나 더  수 있겠어요? 머리가 아프거나 그러진 않아요?’ 따위의 질문을 해서 직원이 기준표를 보고 등급을 나눠서 매기는 식이었다.
그러니 내가 ‘내 이능은 소모값없이 쿨타임만 되면 무제한이다’라고 주장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지속력이 좋은가보다, 하는 식의 자신감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밖에.


“와,  힘드냐? 하긴, 돌이켜보면 네가 지금까지 이능 때문에 힘들어하는걸  적이 없는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지속력으로도 S급을 받고도 남겠는걸? 계속 갈 수 있겠어?”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요.”

“허세같은데 진짜로 해버리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것 참. 큭큭큭.”


“뭐해요? 어서 가세요. 금세 따라갈테니까.”

“너 진짜로 한 발짝도 네 발로는 안 움직이려고 하는구나?”

“충분히 다 따라잡을수 있는데 뭣하러요? 그리고 지금은 서있는 것도 힘들어요. 종아리며 엉덩이, 허벅지에 온통 알이 배겨서. 체력을 아껴야죠, 위험지대를 통과하는건데.”


“보통은 이능력을 아껴야 되는거 아니냐...”

내가 조금도 불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다리가 아파 못 걷겠다고 엄살을 부리니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리다가 그럼 좋을대로 하라고 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아무리 신체강화 이능력자라고 해도 작정하고 뛰는게 아니라 걷는 것만으로는 15초에 40미터 이상을 전진하지 않으니 가만히 서서도 안정적으로 따라붙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마 우리의 이동방식을 옆에서 누가 보기라도 하면 정말 기괴하게 보이겠지.
하지만 좀 이상한게 대수인가, 이렇게 편한데.
단지 몸만 편한 것도 아니고 행군속도도 비약적으로 빨라져서 강경호 팀장이 주문했지만 내심 무리라고 생각했던 사흘에서 오히려 일정을 당길 수 있을  같았다.
갓 교복을 벗은 성인남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내가 문제였지 신체강화 능력자에 평소 틈만 나면 신체를 단련하는 탱커 윤기정에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중간중간 괴수 무리를 만나 조금씩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투는 없었다.
가시거리가 긴 평탄한 지형이라서 괴수는 까마득히 먼 거리에서도 눈에 잘 띄었고 후각이나 청각이라면 모를까 시각으로는 사람의 인지능력이 괴수만 못할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우회하며 늦어지는 시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으로 이틀하고도 몇 시간이 지난 정오무렵에 홋카이도 게이트 전진기지에 인접한 평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체력이 다 회복되어서 중간중간 함께 걷기도  정도로 몸 상태가 멀쩡했다.

“음, 이제 지도하고 방위계를  볼 필요가 없겠네. 지형이 눈에 익어. 게이트 기지까지 두어시간이 채 걸리지 않겠어. 조금만 더 힘내자 지호야.”

“저 지금 하나도 안 힘든데요. 하하하.”


“그래보이네. 어쩌면 팀장님이 사흘 안에 주파하라는 지시를 내릴때부터 이런 방식을 감안하신게 아닐까? 냉정히 말해서 순간이동 없이 걷기만 해서는 도저히 힘든 일정이었거든. 아무래도 공격조원들은 탱커들처럼 체력이 좋은게 아니니까 말이야.”

“오, 그럴듯한데요? 근데 그럼 저한테 그냥 말을 했어야지, 첫날 그 고생을 했는데.”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는거지 뭐. 이제 슬슬 안전지대로 접어드니까 돌아다니는 괴수들과 마주칠 확률도 적을테고, 직선거리로 따지면 금방 가겠네. 아직 이능력 넉넉하지?”

“멀쩡하다니까요.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인데,  이능력은 사실상 무제한 아닐까요?”

“으하핫, 그러면 좋겠네. 다중능력자에다가 조합도 더할나위 없이 좋잖아? 공격이능 하나에 순간이동과 은신이라. 어째 밸런스가 헌터보다는 스파이에 어울리는  같긴 하지만.”

그건  생각에도 맞는 말이라서 안 그래도 신경쓰고 있던 부분인데 말이야.
정면으로 부딪혀서 무지막지한 화력을 쏟아낼 수 있는건 어디까지나 시간에 비례해서 주문력을 무한대에 가깝게 끌어올려주는 특성 덕분이지 스킬셋 자체는 난전형 암살자에 가까우니까.
그렇게 잡담을 하면서 몇 걸음 걷는데 윤기정이 눈살을 찌푸린다.
나도 금세 그가 발견한 것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멀리, 그러니까 거의  킬로미터 가까운 곳에서 움직이는 전투차량 두 대가 보인다.
우리를 발견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냥나온 원정대인가? 여긴 자주 안 다니는 길목인데.”


협곡기지에서 게이트기지까지는 이렇다할 산지나 언덕빼기가 없는 평탄한 지형이라서 원정대는 닦아놓은 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다녔지만, 그래도 주요 교통로는 있다.
우리는 두 기지를 직선에 가깝게 잇는 길을 따라 출발했지만 중간에 마주친 괴수들을 상대하지 않고 우회하느라 경로에서 적잖이 벗어난 상태였는데, 그래서 원정대들이 주로 지나다니는 길목과는 거리가 먼 각도에서 안전지대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물론 이쪽으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약간 공교롭다고 느낄만한 일인건 분명하다.


“안전지대를 순찰하며 괴수들을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팀이 아닐까요?”

“아냐. 내가 기억하기론 협곡사태 이후에 안전지대 유지의뢰는 브라질 쪽 회사에 줬다고 들었어. 근데 저 장갑차, 남미가 아니라 일본에서 주로 쓰는 기종이거든? 예감이 안 좋아.”


“아직 우리 본대는 협곡기지에 복귀하지 않았을텐데... 알고 따라왔을리는 없잖아요?”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언제 어디서 정보가 샜을지. 아무튼 잠깐 숙이고 있자고. 저대로 지나가주면 좋은거고, 아닐 경우에 대비해서 우리도 나름대로 자기방어를 준비해야지.”

차량으로 이동할때도 물론 관측당번은 있지만 저쪽은 차  대고 이쪽은 사람 두 명이다.
크기에서부터 전혀 다르니 아직 우리가 노출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나는 윤기정의 지시에 따라 몸을 낮추고 수풀을 헤치며 비집고 들어갔다.
이런 수풀 사이에 몸을 숨기는건 은폐가 될뿐만 아니라 외계 한정으로는 엄폐도 된다.
지구에서였다면 어림도 없겠지만 외계에서 대부분의 생물들은 방어막을 갖고 있으니까.
물론 이런 수풀로 몸을 가리더라도 완전한 밀폐가 아닌 이상 열기나 충격력 등을 다 막아주긴 어렵겠지만, 어느 정도의 방탄효과는 기대해볼법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윤기정의 불안감을 기우로 여기고 있었다.
평소 아무리 허술하고 실없어 보여도 노련한 헌터의 직감이라는게 그렇게 만만한게 아닌데.
저 멀리 보이던 장갑차 두 대가 어느덧 엔진음이 들릴 정도로 다가온다.
약 이백미터가 좀 안 되겠다 싶은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윤기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진행각도를 보아하니 우릴 보진 못 한  같아.”


“에이, 협곡기지에서부터 우릴 따라온 무리라는 것 자체가 비약이잖아요. 애초에... 엇?”

나는 윤기정의 팔에 붙들려 몸을 아래로 급격하게 숙였다.
타앙, 요란한 총성이 들리고 수풀에 튀겨나가는 도비탄이 순간적으로 눈에 들어온다.
총격으로 방어막을 뚫을수는 없지만 그래도 수풀은 안정적인 엄폐물이 아니다.
연사로 여러발을 긁으면 확률상 개중 몇 발은 반드시 틈을 뚫고 들어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윤기정은 내 몸을 뒤로 돌려세우고 급하게 몸을 돌려 낮은 자세로  밀며 이동했다.
 더 무성하고 촘촘한 수풀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낮은 지대로 몸을 감춘다.
물론 작정하고 공격을 받는 이상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저 새끼들, 작정하고 죽일 생각으로 왔어. 젠장, 지나다니는 원정대도 없을텐데.”

“형, 여기 숨어계세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구요. 이렇게 된 이상 싸울 수밖에 없겠어요.  장갑차도 우리가 쓰는 기종처럼 중앙 하단에 엔진룸이 있는거 맞죠?”

“어? 어어. 아마 그럴거야. 특히 디젤이 아니라 가솔린을 쓰니까  쉽게 폭발하겠지. 그런데 어떻게 접근하게?  한번에 순간이동 할  있는 거리가 40미터 가량이라고 했잖아?”

“순간이동까지도 필요없어요. 은신이능을 발현한채로 가면 되죠. 아, 혹시 저 차에 적외선 탐지장비같은게 붙어있을까요? 그러면 너무 위험하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텐데.”


“원래는 그런거 안 달고 다니긴 하는데... 확신은 못 하겠네.  놈들, 작정하고 우릴 잡으러 온거잖아? 그럼 네 은신에 대한 대비를 하고 왔을수도 있어. 내 생각엔 굳이 거기까지 신경을 썼을까 싶긴 한데. 사실 맨몸의 헌터 둘을 잡으러 장갑차를 끌고 왔으면 무슨 짓을 해도 질거란 생각은 안 들테니까. 어때, 한번 걸어볼래?”


“다른 수가 없으니 뭐...”


그래, 보통 이능력자의 공격이능이 장갑차량의 합금강판을 뚫을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지.
내가 복합능력자라는 정보를 받았어도  생각없이 왔을 가능성도 낮지 않다.
설령 탐지장비가 있더라도 뭐 별 수 있나.
여기서 가만히 머리를 박고 있어봐야 하늘에 기도하며 죽기만을 기다리는 꼴인데.
차라리 치고 나가서 어떻게든 싸워보는게 더 낫지 않겠어?
깊게 심호흡을 하고 에테르 폼을 활성화했다.
그 사이에 적 차량은 거리를 좁히면서 각도를 틀어 사격각을 새로이 잡으려 하고 있었다.
 시간을 끌어봐야 불리해지기만 할거라는 생각에 윤기정의 어깨를  치며 신호를 보내고  장갑차를 향해 최대거리로 쉬프트했다.
 수 있으면 옆으로 우회하고 싶은데, 일단 거리를 좁히는게 우선이니 최단경로로 잡았다.
그러다보니 아예 정면으로 들이받는 경로가 되고 만다.
쉬프트한 후 몸을 낮추고 적들이 날 발견했는지 어떤지 조심스레 살핀다.

“휴우, 아직 발견을 못 한 것 같은데. 역시 적외선 탐지장비는  싣고 온건가.”


그렇다면 더 이상 몸을 사릴 필요가 없다.
그동안 기괴한 방식으로 행군하며 아껴놓은 체력을 모두 쏟아부을 작정으로 전력질주했다.
마침 두 대의 적 차량도 십자포화 각도를 만들기 위해 기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과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몇 호흡만에 수십여미터를 달려나가니 에테르 쉬프트로 이동한 거리까지 합쳐 순식간에 그들을 에테르 블레이드의 사거리에 넣을 수 있었다.
시간을 재진 않았지만 체감상 십 초도 안 걸린 것 같다.
하단 중앙부분이라고 했지... 차체가 낮아서 눈에 보이진 않지만 한가운데로 날리면 되겠지.
장갑차의 길이는 4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두어걸음 앞으로 달려나가 정면에서 날린 에테르 블레이드는 차체를 정확히 반으로 쪼갰다.
물론 나는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두 번째 차량 앞으로 쉬프트했다.
공격이 명중한 순간 모습이 드러났을테니 에테르 폼을 다시 켜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쪼개진 차량의 모습은 미처 감상할 틈도 없었는데, 에테르 폼을 켜고 십여미터 측면의  번째 차량 앞으로 쉬프트한 이후 고개를 돌리기 전에 반으로 나뉜 차량이 폭발했던 것이다.
꽈앙하는 폭음과 함께 궤도가 풀리고 문짝이 떨어져나간다.
에테르 쉬프트의 방어막에 파편이 와서 튀기는 것이 보였다.

“가솔린이 터진건지 안에 적재한 탄약이 유폭한건지, 파괴력 하나는 죽이네. 큭큭큭.”


저 안에 사람이 여럿 들어있었다는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온다.
남을 죽이러 왔으면 자기가 죽을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아니겠어?
유쾌하게 웃으면서 두 번째 차량에도 같은 각도로 에테르 블레이드를 날리고 몸을 숙였다.
이번에도 비슷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십여미터의 거리는 방패가 되어주지 못한다.
파편이 튈지도 모르니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으아악!”

음, 아무래도 첫 번째 폭발은 엔진폭발이라기보다는 탄약의 유폭이었나보다.
퍼엉하고 아까보다는 작은 폭발음이 들리더니, 두 번째 차량이 주저앉고 안에서 불길이 피어오르며 열린 해치 위로 세 명이나 되는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빠져나온다.
 명은 몸에 불이 붙어 있었고 나머지 두 명도 완전히 겁에 질려 패닉 상태였다.
일어나서  쪽으로 달려가보니 몸에 불이 붙은 놈은 살기 그른  같고, 패닉에 빠진 두 놈은 무기를 빼앗고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늦게 달려온 윤기정이 그 꼴을 보더니 홀스터에서 권총을 빼들고 한 발을 발사한다.
작열통에 시달리며 몸부림치던 적이 총에 맞아 풀썩 고꾸라졌다.


“편하게 해준거야. 어차피  사람은 못 살려.”


그는 내 눈치를 보면서 변명하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굳이 그렇게 해명할 필요 없는데.
사실 잔인하기로 따지면 요정의 숲 고블린 굴에서 중국 특수군과 마주쳤을때가 더했지.
그때 사람이 토막나고 내용물이 후두둑 쏟아지는 광경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굴더니.

“나도 알아요. 누가 뭐랍니까. 그런데  놈들, 게이트 기지까지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보나마나 죄다 한통속일텐데. 그냥 여기서 심문할거 심문하고 죽이는게 낫지 않겠어요?”


 생각엔 그게 제일 합리적이고 안전한 방법같은데.
그야 전투의지를 잃은 포로를 죽이는건 명백히 정당방위의 범주를 넘어선 범죄행위지만, 자칫하면 이거 우리가 멀쩡히 잘 지나가던 팀을 습격했다고 덮어쓸 수도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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