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1부 (48/110)



〈 48화 〉1부

과연 블랙실드 1팀장과 오닉스 3팀장이 내린 결론도 윤기정의 추측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보 공유에 감사드리며 각자 본사에 보고하고 지침을 받자, 물론 정보의 대가로 약속한 미국 소유 게이트 인근지역에서의 편의는 틀림없이 보장하겠다, 뭐 그런 이야기를 나눴을뿐 당장 분지 안의 연구소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건지도.
잠입임무를 수행하면서 마치 영화에 나오는 스파이라도 된 기분에 내가 너무 들떴나보다.


"다들 알겠지만 급히 본사에 보고할 사항이 생겼다.“

블랙실드 1팀과의 협상이 마무리된 후 강경호 팀장은 팀원들을 불러모아서 설명했다.
다들 휴식을 취하는동안 말을 건너건너 전해들어 전말을 대강 알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보를 공유해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팀원 하나하나가 노련한 헌터이므로 좋은 의견이 나올수도 있거니와 전후사정과 행동방침을 개개인이 숙지하고 있어야 예기치 못한 사태에도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의뢰가 끝나지 않았지. 계약된 기간동안 우리는 협곡기지를 근거지로 해서 남부평원에서 사냥활동을 이어나가야 해. 그러니 일부를 차출해서 게이트로 보내려고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여기서 바로 헤어지도록 하자.”

“그럼 위장을 하는건가요? 일본에서 최대한 늦게 알아차리는 쪽이...”


“완전히 숨길수는 없어. 협곡기지로 돌아가면 인원이 줄어든걸 바로 알테니까.  어차피 일본의 홋카이도 게이트를 넘어야 하잖나. 여기서 수백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울릉도 게이트까지 갈수는 없으니까. 부상자가 생겨서 후송한다는 핑계는... 아, 그건 안 통하겠네. 미쳤다고 그 위험한 길을 부상자만 보낼 리가 없지. 그냥 급한 일이 생겨 복귀한다고 얼버무리자.”

“어... 믿을까요? 지구와는 통신도 연결되지 않는데다 무전도 수십킬로미터를 가지 못하니까 게이트 쪽에서 움직임이 없었다면 긴급무전을 받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못 믿으면 제 놈들이 뭘 어쩌겠어. 혹시 모르니까 사냥 일정을  채우고 적재함에 넘치도록 잡아서 느긋하게 돌아가면 돼. 한 사흘이면 충분히 게이트까지 갈  있지 않을까? 일단 게이트 기지에만 들어가면 보는 눈이 많으니 설령 수상쩍은 낌새를 알아차리더라도 달리 시비를 걸지 못할거야. 안 그래도 협곡기지 습격으로 해외에서 말이 나올텐데 괜히 지구로 돌아간다는 외국 헌터를 붙잡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을테니까.”

“사흘...이요. 차량도 없이... 아, 예. 가능하죠.”

박우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전혀 반갑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협곡기지에서 게이트 전진기지까지는 전투차량을 타고  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다.
아무리 승용차에 비해 느린 장갑차 기준이라고는 해도, 생으로 걸어서 초원지대를 지나 게이트까지 사흘만에 주파하려면 혹독한 강행군이 될 터였다.
물론 일정을 그렇게 촉박하게 잡는 이유야 납득이 가지만.
처음 사냥을 한다고 협곡기지를 나올 때 사흘로 신고를 했으니 중간에 사정이 생겼다고 치고 시일을 늦추더라도 나흘 정도가 고작이다.
내가 분지 안을 탐사하는데 반나절, 여기서 블랙실드 1팀과 접선하여 상의하는데 또 몇 시간 해서 꼬박 하루 가까이를 썼으니 앞으로 사흘 정도 지나면 협곡기지로 복귀를 해야겠지.
사냥한다고 나간 팀에서 인원이 없어졌다는걸 눈치채면, 그것도 은신 이능력이 있어 관례를 깨고 보고서 제출까지 요구한 헌터가 속한 팀이라면 기밀이 샜으리라 의심하는건 필연이다.
여기 텔레파시 능력자가 나와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게이트기지로 연락이 가면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되도록 그 안에 게이트를 넘는게 현명할 것이다.

“자, 그럼 지구로 복귀할 인원은...”


복귀를 위해 차출될 인원은 고생을 좀 하겠지만 말이야.
말끝을 흐리며 좌중을 둘러보는 강경호 팀장의 눈을 모두들 슬쩍 피하며 딴청을 피운다.

“음, 너무 많으면 행군속도에 문제가 생기겠지? 물자도 더 많이 챙겨야 할테니까.  대뿐인 차량을 빼줄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야. 두셋 정도가 좋겠는데. 아, 그렇지. 지호야, 혹시 네가 수고해줄 수 있을까? 기정이 붙여줄게.”

지목받은 나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 눈을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설마 힘든 일이라고 짬으로 잘라서 내게 미뤘을 리는 없으니 날 단순한 신입이 아니라 유능한 중견으로 보고 있다는 신뢰의 표현일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리 팀원들 중에 혹시 모를 여러 상황에 폭 넓게 대처하기에 나만큼 적합한 이능력 세팅을 가진 사람이 없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금 전까지 고생을 하다 온 사람한테.


“아니, 팀장님. 그렇게 둘이 가면 저한테 지호를 붙여주는거죠. 그래도 제가 경력이 있는데.”


“기정이  인마, 어디까지나 지호 호위야. 네가 B급이었나, 신체강화 이능이?”


“이능등급은 그렇지만 실력은 SSR급이죠, 그동안 배운게 있고 겪은게 있는데. 아무튼 염려마십쇼. 제가 지호 이 놈 잘 데리고 많이 가르쳐주면서 차질없이 도착하겠습니다.”

“저기, 그냥 혼자 가면 안 될까요? 여차하면 몸 빼기에도 그게 더 나은데.”

“그래도 호위는 필요해.  공격조잖아. 당연히 탱커가 붙어서 지켜줘야지. 선배라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잔심부름이라도 시키면서 짐꾼으로 써먹어. 큭큭큭. 아, 농담이야 농담.”


윤기정이 사납게 눈을 치켜뜨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입맛을 다시면서 물러난다.
전에 듣기로 그의 신체강화 증가폭이 200퍼센트가 조금 넘는다고 했었나.
블랙실드 팀의 피터가 350퍼센트로 A급이라고 한 것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전반적인 신체능력이  배가 넘게 증가한 셈이니 그 정도만 해도 초인은 초인이다.
특히 근력강화폭과 별개로 방어력 측면에서는 웬만한 A급 강화능력자에 비해도  밀린다고 했으니 그를 내게 짝지워준건 오닉스 팀에서 어렵게 모셔온 S급 공격능력자인 나를 그야말로 극진하게 대접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음,  극진하게 모시는 것 치고는 이것저것 험한 일에도 많이 부려먹은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 대부분은 내가 자처해서 한 고생이니까.

“잠깐만 기다려. 지금 바로 보고서 쓸테니까. 일본 게이트기지로 가서 바로 홋카이도로 넘어간 다음 본사에다 이메일로 보내면 돼. 업무보고 계정 알지?”

“예.”

“아니다. 이 주소로 보내. 사장님 직통 계정이니까. 아마 연락을 받는 즉시 본사에서 회의를 해서 빠른 시간 안에 답을 줄거야. 그 다음은 사장님 지시를 따르면 돼. 아마 다른 팀에서 지원병력을  차출해서 합류시킬걸? 거기 섞여서 돌아오면 될거야.”


강경호 팀장이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장갑차  컴퓨터가 부착된 지휘차량 안으로 들어간 후 나와 윤기정은 강행군에 대비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제  자긴 했지만 잠입미션을 수행하느라 안 그래도 피로가 꽤 쌓였는데, 앞으로 꼬박 사흘을 걸으며 중간에 두 밤이나 노숙까지 할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다.
성능좋은 경보기와 위장형 간이텐트를 사용할테니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일은 없겠지만 비상식량을 포함해 그 짐들을 둘이서 다 짊어지고 가려면... 어휴.

“기왕이면 마석이랑 혈석 샘플도 가져가면... 아, 그건 좀 힘들까?”

“...주세요. 기왕 할거면 확실하게 해야죠. 아 작은걸로 줘요 작은걸로. 그건 거의 10킬로그램 가까이 되겠구만. 그 옆에 손가락만한 조각 있잖아요. 하나씩만 가져갈게요.”

전생에 군대에서 싸던 군장에 비하면야 무게도 약간 더 가볍고 적용된 기술도 훨씬 고등해서 몸에 분산되어 걸리는 부담은 적었지만, 이걸 메고 사흘을 내리 걸어야 한다고, 사흘을.
신체강화이능은 둘째치고 우선 매일 격한 운동을 하는데다  몸이 근육질인 윤기정이  웃으면서 가볍게 자기 짐을 들어올리는걸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정이형. 텐트랑 식량은 형이 다 들어요. 내가 이걸 어떻게 지고 가?”

“어... 아까 팀장님이 농담이라고 하시는거 못 들었냐? 진짜로 날 짐꾼으로 쓰려고?”


그럼 별 수 있나, 이대로라면 중간에 퍼져서 일정을 못 맞출게 뻔한데.

“쓰러진 절 업고 가는것보단 그냥 지금부터  좀 더 드시는게 낫지 않겠어요?”

내가 진지하다는걸 깨달은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짐을 다시 풀어헤쳤다.
어디보자, 우선 원터치 위장텐트는 둘이 같이 쓸거니까 죄책감없이 떠넘기고.
식량도 정수제와 커피분말만  가방에 넣고 묵직한건 다 저쪽 짐에다 싸는게 좋겠다.
마석과 혈석은 작은 조각이니까  주머니에 넣어가면 그만이지.
강 팀장의 보고서가 담긴 이동식 드라이브도 직접 챙겨야겠다.


“야, 인마. 작작 넘겨. 그럴거면 아예 가방째로 맡기고 맨몸으로 가지 그러냐?”


“오, 그래도 돼요?”


음, 이건 너무 뻔뻔했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는 윤기정을 달래며 사과했지만 큰 효과는 없었는데, 아마 얼굴에 가득한 웃음기를 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호  놈 저거, 싹싹하고 빠릿한줄 알았더니 사기적인 이능력만 아니었으면 아주 폐급이 따로 없다고 투덜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속으로 픽 웃었다.
사기적인 이능력이 아니었으면 내가 무슨 배짱으로 지금처럼 위험한 짓을 자청해서 하겠어?
그 꼴을 지켜보던 다른 팀원들도 막내에게 완전히 먹혔다며 윤기정을 놀려댄다.
악의는 없어보이지만 잘못하면 진짜로 토라지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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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닉스 3팀은 그동안 약속장소에서 날 기다리며 허비한 시간을 메우고 면피를 하기 위한 적당한 사냥감을 찾아나섰고 나와 윤기정은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강행군을 시작했다.
첫날 하루는 모든게 괜찮아보였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후로도 괴수의 출몰이 적은 그린존을 벗어날 때까지는 계속해서 이동했는데,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밤길을 걸었던 것 같다.
바람을 피하고 주변을 경계할 수 있는 적당한 지형을 찾아 위장텐트를 치고 핫팩을 터뜨려넣어 잠자리를 마련할때도 마치 비박 캠핑을  것 같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지.
서너시간 가량을 자고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커피의 힘을 빌려 행군을 재개할때까지만 해도 거친 잠자리 탓에 몸이 좀 찌뿌드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그 후로 이어진 강행군이었다.
다섯 시간의 행군과 삼십분도 안 되는 점심 휴식.
다시 여섯시간의 행군.
저녁을 먹고 좀 쉬려고 했더니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재개되어 야간행군 다섯 시간.
수면은 동이  때까지 겨우 네 시간 반 정도.
그러니 그 다음날 아침에 내가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대며 앓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이 미친 짓거리를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더 해야 한다는건데... 으으.”

요약하자면, 도저히 사람이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정신나간 스케줄이라는거지.
전생에 특수부대들이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천리행군이니 뭐니 하는걸 봤는데 이런걸 견뎌냈다면 그건 이미 반쯤은 인간을 초월한거라도 봐도 되겠구나 싶어 새삼 감탄스럽다.
윤기정이 커피분말을 데운 물에 풀다가 내가 버둥대는걸 보고 고소하다는 듯 웃는다.
그는 첫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태연한 신색을 하고 있었다.
신체강화 능력자가 이렇게 부러울수가 없다.
나중에 상점창을 다시 이용할 기회가 오면 반드시 체력과 피지컬을 보완할 방도를 찾아야지.
이용할 수 있는 아이템 슬롯은 여섯 개 뿐이니 고민을 좀 해야겠지만.

“낄낄낄. 왜, 이제 와서 후회되냐?”

“후회는 무슨. 제가 자원했나요, 팀장님이 지목해서 시킨거지. 와, 전투차량 타고 이동하는거랑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네요. 근데 형은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요?”

“인마, 내가 명색이 탱커인데 이 정도 일정을 못 버티고 퍼지면 되겠냐. 자, 한  마셔. 이럴땐 설탕을 듬뿍 먹어주는게 좋아. 정신차리고 일어나야지.”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고칼로리의 에너지바와 설탕을 들이부은 커피로 아침을 먹었다.
이렇게 일주일만 먹으면 변비에 걸릴게 분명한 식단이지만 단게 들어가니 기운이 좀 난다.
윤기정이 텐트를 걷어서 잘 접어 압축하여 배낭 안에 욱여넣는걸 보다가 픽 웃었다.
내가 요령을 부리고 어쩌고  것도 없이 모든 일은 다 윤기정이 하게 되어 있었잖아?
 그저 페이스를 따라가는 것만 해도 전력을 다해야...
어? 잠깐만.
내가 굳이 이렇게 몸을 혹사해가며 곧이곧대로 걸어서 따라갈 필요가 있나?
그냥 쿨타임마다 에테르 쉬프트를 사용하면 되잖아.
분지에 잠입할때는 그런 방법으로 험지를 잘만 돌파했으면서 지금  사서 고생을 하고 있지?
폭풍처럼 찾아온 깨달음에 스스로가 바보같아져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잠깐만요. 이대론 도저히  되겠어요. 이렇게 하는게 어떨까요? 그러니까...”

내 설명을 들은 윤기정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한다.


“너 신경쓰지 말고 그냥 내 페이스대로 가면 순간이동으로 따라붙겠다고? 글쎄, 그래도 되겠어? 웬만하면 이능은 아끼는게 좋지 않을까. 물론 내가 진로를 살피면서 되도록 괴수는 피해가려고 하겠지만, 언제 돌발상황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동안 본 게 있으니 너 이능 지속력 좋은건 아는데, 그래도 급박한 순간에  이능력이 있고 없고는 생사를 가를 차이라고.”

“믿어봐요. 이대로라면 어차피 기한 안에 도착 못 해요. 지속력과 회복력엔 자신이 있으니까 한번 해보자구요. 완전히 방전되어 무력화되지는 않도록 제가 알아서 조절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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