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1부
내가 말을 걸자 그가 보인 반응은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웃겼다.
기겁해서 펄쩍 뛰며 돌아보는게, 딱 B급 코미디 영화에나 나올법한 리액션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고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는데, 그 와중에 재빠르게 허리춤의 홀스터로 손을 가져가는걸 보니 뭔가 훈련을 받은 사람인가보다.
권총을 뽑기 전에 냉큼 베어버릴까 하다가 한번 참기로 했다.
놀라서 그런거지 딱히 내게 적의를 보였다고 하기는 좀 애매한 것 같으니까.
두 손을 활짝 펼쳐서 하늘로 들고 그를 진정시켰다.
내겐, 아니 그에겐 다행히도 그는 홀스터에 손을 가져다 댔을뿐 총을 뽑아 겨누지는 않았다.
“여,여긴 대체 언제 올라온거야?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 했는데.”
“어어, 천천히 말해요 천천히. 내가 영어를 못 하는건 아닌데, 회화는 아직 좀 약해서. 음, 하이, 아임 지호 최, 프롬 오닉스 헌터즈, 코리아. 맞나?”
내 인사가 어떻게 들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내게 적대적 의사가 없다는걸 파악하고 허리춤에서 천천히 손을 떼면서 말을 받았다.
아직 경계어린 눈빛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거고.
놀랍게도 그는 유창한 우리말로 대답한다.
“한국어 할 줄 압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대체 당신, 정체가 뭡니까?”
“말했잖아요, 오닉스 헌터즈의 최지호라고. 3팀 소속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도 소개 나와있으니까 나중에 확인해 보세요. 그나저나 공교롭게도 한국어를 할 줄 아시네요? 어디서 나오셨어요? 미국? 영국? 혹시 저 아래쪽 일에 한국도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건 아니죠?”
“한국어는 그냥 취미로 배운겁니다. 제가 배운 열 두 개 국어 중 하나일 뿐이구요.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저 아래 일이라니, 역시 연구소에 잠입했다가 나오는 길인겁니까?”
취미로 배웠다기엔 발음도 그렇고 문장구성이나 어휘도 그렇고 완전히 원어민인걸?
별로 뽐내는 것 같지도 않은 어조로 태연하게 열 두 개 국어라니, 대단한 사람이네.
나는 신기하다는 듯 눈 앞의 코카서스계 남자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깨가 떡 벌어진데다 얼굴에는 살이 없었고 옷 위로도 잘 단련된 몸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아까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는 동작도 무척 빨랐지.
반면 깜짝 놀라서 얼이 빠져 멍청하게 중얼거린걸 보면 또 노련한 것 같지는 않고.
그러면서도 오래지 않아 침착을 되찾은걸 보면 나름대로 상황대처 훈련은 받은 것 같다.
정리하자면 훈련은 잘 받았지만 아직 실전을 겪지 않은 특수군이나 첩보요원쯤 되는건가.
“이봐요, 내 말 듣고 있습니까? 크흠, 만약 한국쪽 요원이라면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수도 있을겁니다. 아니, 서로 주고받을게 있다고 해야할까요.”
“요원이라니, 전 그냥 민간 헌텁니다. 제 소개는 이미 드렸는데요. 아, 그 전에 통성명부터 제대로 하시죠. 미국인 맞습니까? 요원이 어쩌고 하시는거 보니까 정부 소속일거고.”
지금은 한국어로 말하고 있지만 처음에 들은 영어, 악센트가 귀에 설지 않고 익숙했다.
영국식이나 호주식 영어라면 아마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 했을걸?
그는 움찔하더니 말 안 하고 숨기는 의미가 없겠다 싶었는지 순순히 제 신상을 털어놓았다.
“중앙정보국에서 나왔습니다. 피터라고 부르세요. 최지호 씨라고 하셨죠? 오닉스 헌터즈면, 가만, 신일그룹에서 후원하는 곳 아닙니까? 신일에서 언제 낌새를 눈치채고...”
“어... 아, 예. 그렇죠. 신일그룹 정보팀이 국정원 뺨치기는 하죠. 크흠.”
이 아저씨, 진짜 영화나 음모론에 무시무시하게 나오는 그 CIA 요원이 맞나?
십이개 국어가 어쩌고 하는걸 보면 머리는 참 좋은 모양인데, 생각이 앞서도 너무 앞선다.
나는 그가 제시한 신분증을 보고 짐짓 납득한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런 신분증을 본다고 해서 내가 뭘 구분하고 알 수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나는 정보를 공유하고 협조하는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설령 저 아저씨가 정부 소속이 아니라 사칭범이라고 해도 내가 손해볼건 없으니까.
일본의 치부를 잡고 협박하면서 이득을 얻어낸다거나 하는 방법은 생각도 안 해봤다.
너무 위험한데다 도리에도 맞지 않아 뒷맛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무슨 대단한 의인이라고 목숨걸고 진실을 밝힌다거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거나 할 일은 아니지만, 이 경우엔 마음이 가리키는대로 처리해도 될 것이다.
애초에 처음 협곡 기지 북문을 통과해 분지로 잠입한 것부터가 내 이능력을 가지고 보안상의 우려니 뭐니 하면서 까다롭게 괴롭히는 놈들을 엿먹여 보자고 시작한 일이 아니겠는가.
“며칠 전에 협곡기지가 오크들의 대규모 습격을 받은건 아십니까?”
“당연히 알죠. 저도 방어전에 참전해서 싸웠는데요. 앗, 그러고보니 한국의 오닉스 헌터즈 소속이라고 하셨죠? 혹시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딴 그 분입니까? 아, 왜 몰랐지? 은신 이능을 사용하는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아무튼 감사인사를 드려야겠군요.”
뭐야, 미 연방기관 소속이라더니 민간 헌터 신분으로 와서 방어전에도 참가했나보네.
그런데 내가 활약하는 그 장면을 보고도 지금 이곳에서 마주친 후 곧바로 떠올리지 못한거야?
아까부터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떠올린 정보부 요원의 이미지와는 좀 다른 것 같다.
그는 내게 사의를 표하며 내 이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입에 침이 튀도록 칭송했다.
“은신 이능 하나만 갖고 계신건가요? 아니면 역시 복수능력자?”
“공격이능을 하나 더 갖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각성은 그게 더 먼저였죠.”
“역시 그렇군요. 아주 근접전을 펼치시는건 또 아니면서 원거리 공격이능을 쓴다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시더라구요. 타겟에서부터 어림잡아 50피트 정도? 살짝 짧은 감이 있지만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그런 완벽한 은신 이능을 함께 갖고 계신데요. 우두머리를 암살한 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놈들을 휩쓸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다들 신선한 충격을 받아 저 헌터가 어디의 누구냐고 말이 많았죠.”
저 말을 들어보면 아직 에테르 쉬프트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당시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썼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벽 위에서 관찰하는데는 한계가 있어 제대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긴 했지.
쉬프트 거리인 40미터가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쿨타임도 15초나 되는데다 주로 에테르 폼 상태에서 움직였으니 녹화라도 해서 사후에 차근차근 분석했다면 모를까, 혼란스러운 전투중에 얼핏 봐선 순간이동인지 은신 후 전력질주인지 구분하기 애매했을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세 번째 이능까지 있으리라고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을테니까.
복수 능력자도 흔하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세 개 이상의 다른 이능력을 동시에 지닌 복수능력자일 확률은 정말 적은 것이다.
뭐, 내겐 나쁜 일이 아니다.
딱히 적극적으로 능력을 숨길 생각까진 없지만 아무튼 숨겨둔 한 칼이 있으면 좋지.
“중앙에 보이는 저 건물은 연구소가 맞습니다. 자세한건 지금 바로 말하기 어렵지만, 일본 놈들이 썩 떳떳한 일을 벌이고 있지는 않더군요. 증거까지 다 챙겨왔어요. 하하하.”
목에 걸린 카메라를 툭 치면서 웃으니 피터는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숙해 보여서 영 믿음직스럽지 않지만, 이 아저씨가 진짜로 미국의 정보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정보를 공유해 주며 협조를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쪽도 이능력잡니까?”
“예, 신체강화 능력을 각성해서 탱커로 훈련받았습니다. 각성 이전엔 레인저 연대에 있었는데 각성 후 정보국의 스카웃을 받아, 어, 이건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럼 말할 필요 없어요. 아무튼 잘 됐네. 그 배낭 들고 따라 내려오세요. 아, 여기까진 어떻게 왔습니까? 협곡기지 북문의 감시가 무척 삼엄할텐데.”
“절벽 위로 새로 뚫은 루트가 있습니다. 아직 일본 측에선 모르는 루트인데, 북문 밖 반마일 지점에 올라가는 입구가 있어요. 그리로 가면 기지를 몰래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입구까지만 같이 갑시다. 아, 초콜릿 먹을래요?”
훔친 배낭을 내려놓은 지점까지 내려온 후 배낭을 받아들고 인심좋게 초콜릿을 꺼내 권했다.
이 무거운 짐들을 날라줄 짐꾼에게 그 정도는 대접해야지.
반 마일이면 대충 칠, 팔백미터쯤 되는건가.
아쉽지만 그는 나처럼 들키지 않고 북문을 통과할 수단이 없으니 거기서 잠시 헤어져야겠네.
내가 직접 들고서 에테르 쉬프트로 이동한다면 얼마든지 은밀하게 통과할 수 있겠지만 괜히 아직 모르는 낌새인 순간이동능력까지 보여줄 이유가 없다.
긴장이 풀렸는지 초콜릿을 받아들고 포장을 벗겨 한 입 베어문 피터는 신체강화 능력자답게 내가 낑낑대며 간신히 들고 온 배낭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한쪽 어깨에 걸쳐메었다.
좁은 절벽길을 걷는동안 그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내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기왕 얼굴을 드러내고 이름을 밝힌 이상 딱히 숨길 이유도 없어서 묻는 말에 별 생각없이 바른대로 대답해 주었는데, 협곡 기지에 다 와갈때쯤엔 거의 친한 친구라도 된 것처럼 굴더라.
이것도 첩보원으로서 익힌 대화의 테크닉이나 뭐 그런건가.
“여깁니다. 다행히 아직 들키지 않은 것 같군요. 이 줄을 타고 올라가면 외부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길이 나 있습니다. 아니, 인위적으로 낸 길이라기보다는 그냥 몸을 통과할만한 작은 공간이 나있다고 표현하는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여길 발견한 것도 천운이었어요. 방벽을 넘는 것 정도는 어려울게 없지만 워낙 기지의 입지가 교묘해서...”
“아, 이야기는 다음에 마저 하죠. 연락처 주세요.”
“예?”
“서로 주고받을게 있을 것 같은데, 제대로 상의를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전화번호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연락하시는 것보다는 기지 밖에서 한번 만나는게 낫지 않겠어요? 보아하니 오닉스 팀도 위장을 위해 원정을 가장하고 있는 것 같은데.”
피터의 말에 의하면 그가 속한 블랙실드 1팀 전체가 정보국의 무력팀이라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민간 헌터기업인 블랙실드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중 1팀은 회사와 유리되어 중앙정보국의 지령만 받는 팀이라고.
블랙실드 사는 그렇게 간판을 빌려주는 댓가로 연방정부로부터 여러 가지 초법적인 혜택을 받아챙긴다고 하는데, 이런 위장 무력팀이 수십여개는 족히 될거란다.
“오... 근데 그거 저한테 이렇게 말해줘도 돼요?”
“에이, 정확히 어떤 기업인지는 극비지만 랭글리에서 비밀 무력팀을 운용한다는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건데요 뭘. 어디가서 함부로 떠들지만 않으면 상관없습니다. 하하하. 돌아가시면 지금 말씀드리는 좌표로 이동해주세요. 아니면 저희 쪽에서 먼저 찾아갈까요?”
“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좌표 불러주시죠.”
만나기로 약속을 잡기는 잡는데, 우리 팀이 대기하고 있을 장소를 알려주는건 좀 꺼림칙하다.
일단 좌표를 받아가서 강경호 팀장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따르는게 낫겠지.
불러주는 위치 좌표를 받아적고 여기까지 그가 들고온 무거운 배낭을 건네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석과 재처리 마석을 너무 욕심내서 지나치게 챙겼단 말이야.
그나마 여기까진 저 아저씨의 힘을 빌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꼼짝없이 내가 고생하게 생겼다.
에테르 쉬프트를 쿨다운마다 쉴새없이 쓸테니 실제로 걷는 거리는 얼마 안 되겠지만 이건 들고 있는 것 자체로도 온 몸에 힘이 들어가서 꽤나 버겁다고.
괜히 파머스워크를 힘든 운동이라고 하는게 아니다.
뭐 어쩌겠어, 여기까지 갖고 왔는데 버려두고 갈 수도 없고, 지난 결정에 책임을 져야지.
“그럼 나중에 다시 봅시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조심해서 가세요. 길이 험해보이는데.”
작별인사를 하고 헤어지다가 잠깐 돌아보는데, 밧줄 하나에 의지해서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을 기어오르는 동작이 무척 빠르고 시원시원해서 잠깐 사이에 십수미터를 훌쩍 오른다.
만석꾼이 천석꾼 부러워하는 격이긴 한데, 내게도 신체 강화능력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강릉훈련소에 입소했을 때부터 꾸준히 뜀걸음을 한 덕분에 썩 나쁜 스펙의 신체는 아니지만 필드에 나와보니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다는걸 자주 느낀다.
음, 신체강화 이능만은 못하겠지만 꾸준히 운동이라도 해서 몸을 만들어 놔야하나.
에테르 폼은 몸을 단련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활용성을 높일 수 있는 성질의 이능이니까.
은신을 유지한채로 에테르 쉬프트를 활용해 북문 옆의 방벽을 넘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뭐, 지금 다짐을 하더라도 실제로 노력으로 이어질지는 불확실한거지만.
탱커조 선배들에게 같이 운동하자고 부탁이라도 해볼까.
그 사람들은 이능을 차치하고서라도 매일같이 체력단련실에서 사는 것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