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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1부 (45/110)



〈 45화 〉1부

왔던 길을 되짚어 중앙 연구소 지하의 실험실로 들어갔다.
식사시간과 겹쳐 한산했던 아까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녔지만 에테르 폼의 은신기능 앞에서는 무방비나 다름없어서 아무 저항없이 지하로 내려갈 수 있었다.
물론 여기 잡혀있는 수많은 오크 포로들을 구출해서 데리고 나가려는건 아니었다.
그럴만한 여유도 없고, 무엇보다도 그럴 이유가 없지.
장기적으로는 어쩌면 페어리의 경우처럼 좋은 관계로 교류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서로 싸운 적이었던데다 그 호전성을 보건대 앞으로도 수차례 더 싸우게 될걸?

실험실 안에서는 연구원들이 한창 격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일본어인데다 간단한 일상회화도 아니고 전문용어를 섞어쓰는 토론을 알아들을 재주는 없지만 저들이 무슨 주제로 떠드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강화유리로 된 방 안에 꽁꽁 묶인 오크에게 검붉은 광선이 쏘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 여기 헌터는 없는 것 같은데.
방어막이 조금씩 상쇄되고 있는걸 보면 분명 저건 이능력인데 정작 그걸 쓰는 헌터가 없다.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나는 급히 광선을 발사하는 기계로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 광선이 쏘아지는 기세가 줄어들자 연구원 하나가 와서 기계를 조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보십시오. 이번에는 겨우 다섯 발로 끝나지 않았습니까? 아까는 열 발을 쏘고도 멀쩡했다구요. 혈석의 등급을 분류하는건 필수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류기준이 애매하다는거 아닌가. 대체 무슨 변수로 출력과 유지력이 이렇게 달라지는건지 그걸 알아야 하는데. 아무리 분석해봐도 차이가 없으니.”

“역시 개체마다 피 속에 품고 있는 마력의 농도가 다른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문제는 그걸 측정할 방법이야. 이대로라면 균일한 퀄리티를 확보할 수 없다고."


"일단 다시 혈석 충전하겠습니다."

내가 알아듣기 힘든 빠른 일본어 대화를 나눈 연구원은 큼지막한 총처럼 생긴 레이저 건의 상부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혀를 차면서 들고 온 통에 든 것을 안에 쏟아부었다.
우르르, 어림잡아 수천만원어치는 할듯한 양의 마석들이 쏟아져 들어간다.
동부 광산에서 무지막지한 양을 캐더니, 이 비싼 마석을 아주 물쓰듯이 쓰는구만.
아니, 잠깐. 이건 마석이 비싸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지.
그러니까 마석을 연료로 사용하는 기계로 초능력자의 공격이능을 일반인이 발현한다는건가?
이런걸 발명했다고?
파급력 면에서 고블린의 공간왜곡 결계나 페어리들의 아티팩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 지금처럼 이능을 각성한 초능력자들이 헌터직종을 독점할 이유가 없어지는건데.
대기업이나 정부의 영향력은 당연히 더욱 커질 것이다.
음, 잠깐 생각해봐도 외계 관련산업계 자체를 통째로 뒤집을만한 일인데 이거.
그때 연료통에 마석을 쏟아붓던 연구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숙여 마석 몇 개를 골라냈다.

“잠깐. 이건 제대로 숙성이 안 됐잖아. 혈석이 아니라 그냥 마석이야. 하아, 자꾸 이런게 섞여오면 곤란하다고. 일 똑바로 안 하나? 눈 제대로 달려있는거 맞아?”

“뭐? 어디 봐. 크흠, 그러네. 숙성실 근무자들에게 내가 단단히 말해두지.”


나는 그제야 연료통 안에 쏟아부은 마석들이 일반적인 마석과 뭔가 다르다는걸 눈치챘다.
연구원이 골라낸 마석은 평범한 선홍색의 마석이었는데, 그 외에 다른 마석들은 피처럼 검붉은 빛을 띠고 있어서 자세히 보면 분명히 색감이 달랐다.
역시 뭔가 특별한 처리를 한 마석들인가.
하긴, 마석의 대부분이 에너지원으로 쓰인다고 해도 거기 매달려 있는 과학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마석으로 이능을 재현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리가 없지.
일단 저 특이한 마석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대강이라도 봐둬야겠다.
물론 샘플도 넉넉하게 챙겨야겠지.

단단히 결박된 오크에게 검붉은 광선을 쏘아대는 실험실을 뒤로 하고 나와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예의 ‘실험체’들이 고통받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실험이라기보다는 그냥 채혈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보인다.
물론 해부대를 포함해 여러 가지 기구들을 보건대 분명 생체실험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묶어놓고 죽지 않을만큼의 피를 강제로 뽑아 모으고 있었다.
개중에는 철창에 갇혀 초췌하게 앉아있을뿐 채혈당한 흔적이 없는 놈들도 있었는데, 무슨 차이점이 있나 살피니 하나같이 몸에 문신이 없는 놈들이었다.
몸이 워낙 더러운데다 언뜻 눈에 들어오는 모양도 아니라서 타투가 있는줄도 몰랐는데, 문제는 피가 빠져나가면서 타투의 색깔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문신을 이루는 입자가 피에 섞여서 빠져나가고 있는  같았다.
아, 혹시 진짜 그런건가?


“크르륵... 크아악!”

슬픔과 분노가  정도 섞여있는 눈으로 그 꼴을 바라보던 오크 하나가 괴성을 지른다.
아무리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봐야 그 녀석이 뭘 할 수 있는건 아니었지만.
나는 잠깐동안 고민했다.
지금까지 본 것을 종합해볼 때,  문신오크들의 피가 마석을 이능발현의 원료로 특수 재처리하는 공정에 필수적인 원료라는 것을 눈치채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료생성 공정을 사보타지하는게 웬만한 기구들을 부숴놓는 것보다 치명적이라는 것도.
문제는 그 생성공정이 살아 숨쉬는 생명체들이라는건데...

“에이, 그렇게 따지면 괴수사냥은 어떻게 하고 저 바깥에서 죽인 오크들은 뭐가 되나. 고블린들은 아예 멸종을 시키다시피 했는데.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

전투나 사냥도 아니고 꽁꽁 묶여서 완전히 제압되어있는 놈들을 베는건 저항없는 포로를 처형하는 기분이 들어서 영 찝찝하지만 합리화할 구석이 없는건 아니었다.
솔직히 저 놈들 입장에서도 구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희망이 없잖아, 이 놈들.
이대로 남은 평생을 실험체나 가축 취급을 받으며 피를 뽑히는 것보다는 죽는게 낫지 않겠어?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고 슬쩍 바깥 동정을 살핀다.
연결된 혈액팩을 보면 중간쯤 차 있는 것 같은데, 원래 연결만 해놓고 사람이 지켜보지 않는건지 아니면 잠깐 방치하고 화장실에라도 간건지는 몰라도 이 안에는 직원이 없었다.
에테르 블레이드의 흔적을 남겨도 될지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픽 웃었다.
수백수천가지 종류의 공격이능 가운데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흔적을 남기는 형태의 이능이 한두가지도 아니고, 이걸로 날 특정할만한 근거는 안 되겠지.
설사 의심한다고 해도 뭘 어쩌겠어?
알리바이를 증언할 3팀의 증언은 같은 팀이니까 못 믿는다고 해도 어떤 물증도 없을텐데.

마음을 정하고 천장과 벽을 유심히 살폈다.
중요성을 감안하면 사람이 없어도 감시카메라 한두개 정도는 분명히 있을테니까.
게이트 너머로는 송전이 안 되니 여기서 전기를 쓰려면 발전소 설비를 통째로 가져오는 수밖에 없어서 비용이 몇 배는 더 많이 들지만 녹화장치까지 통째로 가져다 놨을 확률이 높다.
아, 저기 있네.
가만있자, 그럼 사각지대가 어떻게 되려나. 이 장치 뒤에 쪼그려앉으면 될까.
에테르 블레이드로 타격하는 순간 에테르 폼이 풀리며 모습이 드러날테니 조심해야한다.
여기서 발출하면 한번에 많아야 두 마리씩, 무려 십수번을 넘게 쏘아내야 하겠지만 그래봐야 쿨타임 3초로 계산하면 1분 남짓한 짧은 시간이다.
그나마 공간 활용때문인지 밀집해서 묶어놓은게 다행인가.
서걱.
채혈당하던 오크들  한 마리의 목이 통째로 날아가고 그 옆의 한 마리도 3분지 2 이상이 베여 동맥에서 피를 세차게 뿜어내다가 푹 고개를 떨군다.
반송장이 되어 채혈당하다가 동료의 피를 뒤집어쓴 주변의 다른 오크들이 눈을 굴린다.
철창 안에서 이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오크들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뒤늦게 괴성을 지르고 철창을 잡아 흔들며 난동을 부리는데, 밖에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카메라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이변을 알아차리고 달려왔을텐데, 아무래도 감시원이 자리를 비웠거나 한눈을 팔고 있는 모양이다.
나야 고맙지.
뒤늦게 카메라 시야를 피해 쪼그려앉은 날 발견한 오크들이 눈을 뒤집고 살기를 풍긴다.
채혈당하던 문신 오크들까지 포함해 이 방에만 무려 삼십여 마리.
저 놈들이 단단히 제압되어 있는게 아니었다면 무섭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 나는 모조리 조각나서 시체가 된 오크들을 뒤로 하고 감옥 겸 채혈실을 나왔다.
바깥쪽 실험실에선 검붉은 광선의 위력을 측정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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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연구소에서 내가 배낭을 숨겨놓았던 남쪽의 분지 입구까지는 길이 무척 험했다.
직선거리로 따져도 수백미터는 족히 될 것 같은 거리인데 지나가기 힘든 지형도 많아서 일본이 낸 도로를 따라가다보면 수 킬로미터도 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에테르 쉬프트가 없었다면 분지 입구까지 가는데만도 체력을 다 쓰고 탈진했을 것이다.
북쪽 유적지의 숙영지에서 훔친 큼지막한 배낭 하나에다 제단에 설치했던 장비를 쑤셔넣고 남은 자리에다 마석과 재처리된 마석을 반반씩 가득 담았으니 더욱 그렇다.
무게를 재어보진 않았지만 체감상으론 수십킬로그램은 족히 될 것 같다.
전생에 군생활을 할 때도 이만한 무게의 등짐을 지고 걸어본 경험은 없는데.
말로는 완전군장이 삼십킬로그램이라고들 하지만 군인이라고 해서 어디 실탄 140발에 각종 치장물자, 전투식량까지 포함된 진짜 완전군장을 메고 걸을 일이 흔하겠는가.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마석을 조금만  챙길걸 하는 후회를 안 한건 아니지만, 이게 다 돈이라고 생각하니 차마 버리고  수가 없더라.


“휴우,  바위였나? 아니, 저거? 분명히 꽤 높은 곳에다 숨겨놨던 것 같은데.”

입구에 도착해서 묵직한 배낭을 털썩 내려놓고 협곡으로 이어지는 절벽을 살펴보았다.
짐을 숨겨놓고 표시를 해둔채 멋지게 뛰어내릴땐 좋았는데, 그게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
몇 달도, 심지어 며칠도 아니고 겨우  시간 전인데 왜 가물가물하지?
기억을 더듬으며 절벽 중간중간에 튀어나온 바위지형들을 살피다가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뭐야 저거. 사람 아냐?
아니 뭐, 여긴  아래 있는 연구소로 가는 분지 입구니까 사람이 지나다닌다고 해서 이상할건 없는데, 문제는 아무리 봐도 일본인이라기보다는 서양인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음, 이건 너무 편견에 가득 찬 시각인가?
일본에서 이런 극비사안에 외국인을 끌어들일리는 없지만 머리 노랗고 눈 파란 백인이라고 해서  국적이 서양이라는 법은 없지.
어어? 근데 저  뭐하는거야 지금.
거긴 왜 올라가?
눈에 익은 바위 위로 낑낑대며 올라가서 흙먼지를 피우더니 돌무더기 사이에서 배낭을 찾아 끄집어내는걸 보면서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아, 저기였네, 숨겨둔데가.
나는 곧바로 그 바위 위로 에테르 쉬프트를 사용해 올라갔다.
겨우 서너걸음 뒤에 내가 나타났는데도 그는 눈치채지 못하고 꺼낸 배낭을 뒤지고 있었다.


“흠, 레이션에 물과 담요, 구급약품이군. 먼저 들어간 사람이 있다는건데. 어딜까?”


영어를 쓰는걸 보니 영국 아니면 미국에서 온 놈이네.
설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도 모국어를 안 쓰진 않을거 아냐.
나는 갈등했다.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고 대화를 시도하는게 과연 현명한 판단일까?
저 배낭 안에는 딱히 내 신상을 추측할만한 물품이 들어있지 않다.
사진기는  목에 걸려있고 증거품과 마석이 담긴 배낭은  아래 두고 올라왔으니까.
하지만... 이걸 두고 가면 협곡 기지까지, 아니 협곡 밖으로 나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숙영하며 기다리고 있을 팀원들을 만날때까지  굶어야 하는걸.
최악의 경우 앞으로 반나절 이상을 꼬박 굶게 될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배고픈데.
여기 와서 배낭에 아껴둔 초코바 까먹으려고 했는데.
그거만 바라보고 저 무거운 배낭을 낑낑대면서 메고 왔는데.
결국 나는 에테르 폼을 해제하고 헛기침을 했다.
물론 상대가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면 곧바로 에테르 블레이드를 발출해서 썰어버릴 마음의 준비를 마친 후였다.
최악의 경우  사람이 총기로 무장한데다 나보다 훨씬 빨라서 먼저 총에 맞는다고 해도 수호자의 맹약이 있으니 내가 위험할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기, 그거 제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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