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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1부 (44/110)



〈 44화 〉1부

나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건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뒤쪽에서 내가 몰래 지나친 오크 병력들이 일본 헌터들과 전투를 벌이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서 지나치며 본 바로는 저 놈들, 전투병력과는 거리가 멀다.
역시 이 곳은 놈들의 주거지역 내지는 종교적 성지 비스무리한 곳인 것 같다.
협곡을 돌파해 분지 안으로 들어오려고 숱한 피를 쏟으며 광분하던 수만이나 되는 오크들을 생각하면...
아, 잠깐. 이거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데?
분지 안에 있다는 괴수군락이 핑계인건 이미 명백하니까 말이야.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는 팀들은 여길 지키던 오크 군대에 의해 죽은거고, 어떤 작전을 써서  놈들을 분지 밖으로 유인한 뒤 연구소를 차렸다고 보면 말이 대강 들어맞지.
와, 그럼  새끼들, 진짜로 외국 헌터들을 화살받이로 삼으려고 끌어들인거였네?


짜증을 속으로 눌러담으면서 안쪽으로 들어가다 어느 순간 벽의 재질이 바뀐 것을 눈치챘다.
훨씬  매끈한 벽에 장식용으로 둘러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
이 부조를 나는 바로 얼마 전에 본 적이 있다.


“하하하... 이게 여기서 나오네. 음, 역시 그런가.”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오크 놈들이 이런 유적을 건설할  있을 것 같지 않더라.
요정의 숲 북부의 유적지에서 본 것과 같은 패턴의 문양이 천장과 벽을 수놓고 있었다.
역시  행성은 내가 전생에 하던 그 게임과 뭔가 깊은 연관이 있다.
오크들의 생김새가  게임의 챔피언인 검투사 캐릭터와 유사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음, 하긴, 죽어서 비슷하지만 다른 세상에 환생한데다 초능력으로 게임  능력이 발현되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외계행성이 게임 속 세상이라고 해봐야 새삼 못 믿을 일은 아니지.


“근데 내 기억에 그 게임, 나름대로 발달된 왕국과 제국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배경 스토리를 떠올려보았지만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세계관을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알피지였다면 모를까, 대전 AOS게임이었다고.
배경이 되는 세계관이나 메인 스토리 따위, 장식인게 당연하잖아.
나도 로딩 기다리면서 앞부분만 슬쩍 읽었지, 누가 그걸 일일이  읽고 앉아있겠어.
게이머들이 별 관심이 없다는걸 알아서 그런지 솔직히 별로 신경을 쓴  같지도 않더라.
대충 ‘판타지 세계관입니다’하고 퉁치면 될걸 말만 조금씩 바꿔서 늘어놓은 수준이던데.
예컨대 분명 서두에서 ‘중세 유럽과 비슷한’ 문명들이라고 설명한 주제에 정작 묘사하기로는 중세보다는 르네상스나 절대왕정 시대에 가까운 국가관이나 사회상을 묘사한다던가.

“싹 다 망해버린건가.”


 내뱉었지만 스스로 생각해봐도 다른 가능성이 생각나지 않는 설득력있는 가설이다.
진짜로 그런 국가들이 이 행성에 있었다면 진작에 알려져서 교류를 하고 있었겠지.
내가 여벌 목숨이 될 수호자의 맹약을 구입했던 제단만 보아도 요정의 숲 북부의 깊숙한 동굴 안에 파묻혀서 오랜 세월 인적이 닿지 않은 폐허가 되어있었으니까.
세월에 묻혀 유적이 되어버린  건물에 오크들이 자리를 잡고 이를 신이 내려준 성스러운 건축물로 여겨서 성지로 삼았다고 보아도 이상할 일이 아닌 것이다.
고블린들의 토굴과 달리 이 석조건물은 명백히 찬란한 문명의 흔적이니까.

“설마 게임 속 세상이 어쩌고 하는 정신나간 발상은 안 하겠지만 아마 여길 발견한 일본 연구자들도 비슷한 결론을 내리겠지. 어쩌면 이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여길지도 몰라.”

지구에 초능력자들이 생겨난 것은 게이트 침략을 당한 이후의 일이다.
당연히  외계행성과 어떤 관련이 있으리라는 추측은 기존에도 정설에 가깝지만, 이 행성에서 잊혀진 고대문명의 흔적이 발견된다면 광분할만한 학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얼마쯤을 더 나아가니 눈에 익숙한 제단이 들어온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요정의 숲에서 발견했던 것과 꼭 닮은 제단이다.
나는 혀로 입술을 한번 핥고 가까이 다가가 제단에 손을 얹어보았다.
눈 앞에 상점창이  펼쳐진다.
수호자의 맹약과 1차 기본방어 아이템인 조끼 두 개, 골드는  500골드 가량.
요정의 숲에서 골드를 전부 소비한 뒤 지금까지 죽인 괴수와 오크들의 숫자가 적지 않은데 돈은 그 8분지 1도 모이지 않았으니 살짝 실망스러웠다.
아마도 남부 평원쪽 괴수들과 오크들의 몸값을 좀 더 짜게 쳐주나보지.
오백골드로 살만한 아이템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저번에 미리 사놓은 방어력 아이템 조끼  개와 조합해 살  있는 최종 아이템인 ‘천사의 단지’에 생각이 미쳤다.
방어력과 저항력 스탯이 붙어있고, 모든 디버프와 상태이상을 해제하는 3분 쿨타임의 액티브 효과인 ‘천사의 손길’ 스킬이 붙어있는 아이템이다.
이것도 방어력과 저항력 수치가 애매해서 탱커가 사는 일은 거의 없고 주요 데미지 딜러를 보호하기 위해 서포터 캐릭터가 주로 선택하는 아이템이라서 내겐 약간 생소했다.
브루저나 탱커, 누커 등은 몰라도 서포터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심지어 내가 전생에 죽기 직전의 시기를 기준으로 유행하던 메타에서는 소위 ‘딜포터’라고 해서 보호따윈 제쳐두고 화력 기댓값만 끌어올린채 각자도생하는게 대세여서 아군과 적군을 막론하고 한번 구경하는 일도 흔치 않았던 아이템이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에서의 이야기.
수호자의 맹약도 그렇고 천사의 단지도 그렇고 조금만 게임적 감각에서 벗어나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현실적으로 어마어마한 공능을 보일 수 있는 아이템은 널렸다.
아마 여섯 칸의 아이템창을 가득 채울때까지 정작 내가 스킬을 계승한 환영검사 캐릭터의 코어 아이템을 사는 일은 아예 없지 않을까?


“디버프, 상태이상... 가만, 병이나 독같은 것도 여기 포함되는건가?”
게임 내에서 독이나 저주를 쓰는 캐릭터들의 디버프 스킬을 해제할  있으니 웬만한 독은 치료할 수 있다고 보는게 맞겠지만 질병은 좀 궤가 다르지 않을까?
나중에 한번 실험을 해봐야겠다.
물론 아직 이걸 구입하려면 골드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르니 먼 미래의 일이 되겠지만.
재료 아이템인 450골드짜리 저항의 아뮬렛을 하나 사니 다시 빈털터리다.
조끼 두 개와 저항의 아뮬렛까지 사놓고도 아직 4000골드가  넘게 들어가니 코어아이템 치고도 상당히 비싼 가격이라서,  천사의 단지가 게임에서 별로 안 쓰였는지  법 했다.
이거 사서 CC기 한번 풀어주느니 그냥 딜템을 하나  올리고 말지.

상점창 이용을 마칠 즈음에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급히 손을 거두었다.
에테르 폼을 활성화한 채로 만에 하나라도 부딪혀서 발각되는 일이 없도록 구석진 자리로 몸을 피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일본 헌터들이 하는 모양새를 관찰했다.
혹시 저 중에도 제단을 상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능력자가 있을까?
“휴, 끝이군. 이 굴은 비교적 짧았어. 안에 오크 놈들도 많지 않았고 말이야.”


“카토, 서둘러. 어서 나가서 뜨거운 샤워라도 하고 싶어.”


“그런데 저 놈들은 방금 나갔다 왔잖아요? 남아서 고생하라고 하면 안 됩니까?”
“이 자식이. 네가 편히 앉아서 쉴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갔다왔는데...”

“아니, 누가 안정기를 놓고 오랬냐고. 자기가 깜빡해서 다녀온건데 어디서 유세야?”

와, 나도 일본어를 아주 모르는건 아닌데 저 놈들 말은 통 알아듣질  하겠네.
무슨 놈의 발음을 저리 뭉개고 강세를 길게 끄는거야?
일본 학원폭력물 영화같은데서 보면 깡패들이 저런 식으로 말하던데.
낄낄거리면서 말을 주고받으며 제단 가까이 온 헌터들 중 한 명이 배낭에서 복잡하게 생긴 장치들을 한 아름이나 꺼내더니 이리저리 조립해가며 제단에다 설치한다.
음, 아무리 봐도 상점을 이용하는  같지는 않네.
열심히 눈을 굴리며 장치를 조작하는 한 명의 기술자를 제외하면 나머지 헌터들은 제단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주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지루하다는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정기 설치 끝났습니다.”


“좋아. 돌아가서 보고하자구.  시추공에선 마기움이 좀 많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많이 나온다고 보너스가 더 나오는건 아니잖습니까? 전 빨리 모든게 끝나고 예전처럼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고생만 잔뜩 하고 돈은 똑같이 받고.”

“이전처럼 돌아간다고? 글쎄, 그게 될까. 지로 너도 봤잖아. 지금 광산에서 마석이 엄청나게 쏟아진다고. 괴수를 사냥해서 마석을 채취해봐야 제 값을 받기 힘들어진다는 소리지. 괴수 부산물이 마석만 있는건 아니지만 적어도 수입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건 확실해.”

“어? 그렇네요. 그럼 앞으로 어떡하죠?  던전이 전부 클리어되면...”

“그럼 다음 프로젝트가 있겠지. 시대가 변한거야. 앞으론 괴수사냥만으론 예전처럼 회사를 유지할수 없을거야. 정부에  찰싹 달라붙어서 사업을 따먹어야지.”

일본 헌터들이 가벼운 분위기로 짐을 챙겨 왔던 길로 돌아간 후, 나는 제단에 설치된 낯선 기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망설임도 없이 정확히 제단을 목표로 설치했으니 뭘 알긴 안다는건데...
더욱이  놈들,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분위기였어.
그럼 아까 봤던 수십개의 입구마다 그 끝에는 제단이 하나씩 있다는건데...
이게 그렇게 흔하다고?
일단 사진으로 찍어두자.
샘플을 챙길  있으면 좋을텐데.
가지고 나가려면 못 가져나갈 것도 없지만 이게 통째로 사라지면 안 들킬수가 없지.

“어? 가만...  상황에서 꼭 그렇게 몸을 사려야 할까?”

사진을 다 찍고 아쉬운 마음으로 장치를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했다.
유령처럼 왔다  것도 모르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게 본래의 계획이긴 했지만, 계획이란건 현장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게 아닐까.
들킨다고 해도 팀장이나 회사 상층부에서 내게 책임을 물을 것 같지는 않다.
이건 이미 그럴만한 사이즈를 한참 벗어난 일이거든.
지금까지 수집한 증거만 해도 언론에 공표하면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 못지않은 비난을 받으며 골머리를 썩게 만들 수 있는 파급력을 가진 증거들인데.
오크들의 생체실험에다 세계 각국의 헌터들을 불러모아 희생양으로 내세운 것까지 말이야.
어쩌면 단순히 이종족들을 학살한 수준의 중국보다도 더 난처한 지경에 처할지도 모르지.

“좋아. 결정했어. 가지고 나가자.”

마음을 먹자마자 에테르 블레이드를 발출해 제단과 연결된 부위를 잘라낸다.
혹시라도 상하지 않도록 제단까지 넉넉하게 포함해서 도려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갖고 나가서 분석할 메리트가 침투를 들킬 리스크보다 클  같다.
내가 이쪽 일, 그러니까 이능연구나 국제정치 등을 전공한 첩보전문가가 아니니 판단이 틀릴수도 있지만 어차피 이런건 다 현장의 판단에 의존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제단에 설치되었던 장비는 약 7~8킬로그램쯤 되는 것 같았는데,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도수운반을 할 때는 그보다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석조건물을 빠져나오면서 몇 번이나 그냥 돌아가서 두고 올까 하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이걸 가져온 그 놈이 했던대로 배낭에 넣으면 훨씬 편할 것 같은데.
분지의 천막과 가건물에 침투해서 가방을 하나 훔쳐야겠다.
고삐가 풀린 나는 거칠 것 없이 움직였다.
기왕 흔적을 남기는걸 감수하기로 했다면 하나를 훔치든 둘을 훔치든 다를게 없잖아?
아직 생명이 달린 전투가 아닌 한 사람을 해치는건 차마 못 하겠지만, 장비를 망가뜨리거나 연구설비를 사보타주하는 정도의 일은 죄책감을 가질 일도 아니었다.
물론 놈들이 침입을 알아차리면 경계가 삼엄해지고 자칫 분지를 빠져나가는데 애로사항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여야겠지만, 역시 중앙 연구소의 실험실에서 보았던 처참한 광경들이 눈이 밟힌다.


“후우, 트럭 얻어타고 올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까마득하게 멀어보이네.”


환상 결계로 가려진 절벽 동굴에서 빠져나온 나는 나지막히 불평어린 말을 중얼거리고 저 멀리 보이는 연구소 쪽을 향해 쉬프트했다.
한번에 직선이동거리가 40미터에 쿨다운 시간이 15초.
쿨타임이 도는 동안이라고 발을 안 움직이는건 아니니까 에테르 폼의 이동속도 보너스까지 감안하면 트럭이 달리던 속도보다 딱히 느릴 것도 없다.
제단의 장치가 사라진 것을 늦게 발견하기를 바라면서 나는 중앙 연구소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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