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1부
계획대로라면 탐사를 끝내고 귀로에 올랐어야 할 시간이지만 나는 탐사를 연장하기로 했다.
이 오크들이 땅에서 솟아나진 않았을테니 잡아온 곳이 있을 것이고, 그걸 추적하면 아마도 사라진 일본 헌터들의 행방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포로들의 꼴을 봐라.
아무리 이종족이라고 해도 이건 떳떳한 일이 아니다.
물론 내가 여기 들어온 것도 떳떳하게 들어온건 아니니까 공식적으로 추궁하기는 힘들겠지만 언론에 터뜨린다거나 하는 등 레버리지로 활용할 방법은 다양하지.
남녀노소 다양한 오크들을 잡아다놓은 케이지와 해부대까지 마련된 내부 실험실의 전경을 십수장의 사진에 나눠담은 후 입구쪽에 있던 관리실에 들어갔다.
내 짧은 지식으론 알아보지 못할 기계가 여럿 있었지만 중요한 데이터는 전자 저장장치가 아니라 종이서류의 형태로 보관하는 것 같았다.
나름대로는 보안과 유사시 증거인멸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건가.
일본어와 영어가 뒤섞인 자료들을 대강 훑어보니 역시 오크들의 피로 뭔가를 실험하고 있다.
오크면 다 되는건지 아니면 개중에 특이한 개체가 있는건지 모르겠네.
안타깝게도 저 가여운 오크들은 잠시 더 여기서 고통받도록 두고 가야겠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동정심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위험을 무릅쓰고 구할 의리는 없지.
며칠 전까지 저 놈들 동족하고 목숨걸고 싸웠는데 말이야.
심지어 그 놈들이 먼저 쳐들어온거였고.
아니지,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쳐들어온 이유가 여기 있었던건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피흘리는걸 두려워하지 않고 덤벼들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싶었지.
“그래, 맞아... 그럼 저 오크들을 잡아온 곳이 분지 안에 있다는건데.”
보금자리거나, 아니면 고블린의 경우처럼 성지 비스무리한 곳이거나.
하여튼 오크들에게 뭔가 의미있는 장소가 분지 안의 어딘가에 있을 확률이 높다.
사라진 일본 헌터들이 그 장소를 개척하는 중이고 전리품으로 잡아온 포로들에게서 뭔가 쓸만한걸 발견해 비밀리에 연구소를 설립해 생체실험에 들어갔다고 하면 대충 아귀가 맞지.
음, 그럼 나가서 좀 더 기다려야겠네.
그 정도 고생은 기꺼이 하겠다는 의욕이 새삼스래 샘솟아 오른다.
딱히 정의감이 불타올라서가 아니라, 그냥 약이 올라서였다.
보아하니 우릴 미끼로 던진 것 같은데.
아무리 외국 회사들이라곤 해도 계약할 때 분명 별로 위험하지 않은 통상 순찰 및 사냥업무라고 해놓고는 말이야, 앞에서 방패막이로 세워둔채 뒤에선 이런 짓을 해?
물론 일본 정부에서 계획을 꾸밀 때 오크들이 대대적으로 협곡을 침공할거라는 예측을 했는지 어떤지는 아직 모르지만 당한 입장에서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꼼꼼하게 찍은 자료들을 원래 있던 자리에 정리해놓은 뒤 지하 실험실을 나왔다.
아까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것 같았으니까 아직 십수분 이상 여유가 있겠지만 가만히 보고 있기엔 좀 껄끄러운 풍경인데다 더 머물러봐야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그나저나 일층에 있던 사무실도 그렇고 이 실험실도 그렇고, 이 놈들은 밥을 먹으러 가더라도 당번으로 한두명은 세워놓고 교대로 다녀와야지 너무 안일한거 아닌가 싶다.
연구소 건물을 나와서 그늘진 곳에 앉아 땀을 식히며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지 건물 외부에 따로 있는 급식소로 추정되는 건물에서 사람들이 수십여명이나 빠져나와 연구소 안으로 들어오는게 보였다.
포로를 잡아오는 시간 간격을 알 길이 없으니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도 기약이 없다.
이건 그냥 운에 맡길 수밖에 없겠는걸.
오닉스 3팀이 협곡 기지를 나올 때 사흘짜리 장기원정을 신고해 놓았으니 돌아가는 시간까지 포함해 앞으로 이틀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드니까.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옥상 위로 쉬프트하여 올라가서 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 사람들도 일과시간과 휴식시간은 구분하겠지.
날이 어두워질때까지 움직임이 없으면 배낭을 숨겨놓은 곳에 가서 식량과 물을 챙겨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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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무료하게 앉아서 시간을 때우기를 세 시간쯤 되었을까, 북쪽 입구로 트럭이 접근한 것이다.
그 사이에 동쪽의 광산에서 캔 마석을 실은 트럭은 두 차례나 더 왕복했는데, 딱히 밖으로 반출하려는 움직임은 없어서 그 많은 광석들을 쌓아두고 뭘 하려는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북쪽에서 들어온 커다란 트럭은 트레일러로 컨테이너를 하나 매달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꽁꽁 묶인 오크들이 줄줄이 십수마리나 끌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북쪽 입구 부근에서 공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추측할 수 있었다.
아마 천장을 만들어 완전히 덮은 집하장을 만드려는 모양이지.
미국에서 위성을 언제 쏘아올릴 계획이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공사의 진행현황을 보니 완성은 아직 먼 것 같았지만 아무튼 이 놈들은 꽤나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분지의 입구인 협곡기지만 잘 방어하면 아마 오랫동안 비밀을 유지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후우, 그럼 가볼까. 북쪽 입구로 들어왔으니까 북쪽 절벽에 뭐가 있는건가?”
쿨다운을 빡빡하게 돌리며 에테르 쉬프트를 전개해 트럭으로 접근했다.
멀리서 봤을땐 몰랐는데, 오크들은 단순히 포로로 잡혔다는 것에 절망해서 축 늘어진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이미 한계에 몰려 탈진해 있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상처도 나있고 채 말라붙지 않은 딱지에선 피가 흘러내린다.
전투가 꽤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데도 아까 내가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봤을땐 분지 내 어떤 곳에서도 이렇다할 큰 전투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으니 고블린처럼 지하 동굴을 파놓고 항전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잠시 후, 싣고 온 포로들을 모두 하역한 트럭이 다시 연구소 밖으로 출발했다.
나는 빈 트레일러 위에 올라가 앉았다.
길도 제대로 닦인 길이 아닌데다 기사의 운전솜씨도 몹시 투박해서 승차감은 최악이었고 오크들의 땀냄새와 피냄새도 진동을 했지만 다행히 그걸 오래 참을 필요는 없었다.
간신히 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만 정비된 흙길을 따라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린 트럭은 삼십여분을 달린 끝에 분지 북부의 절벽에 도착했다.
놀라운 것은, 운전수가 아무런 망설임없이 속력을 줄이지 않고 가속페달을 밟았다는 것.
트레일러 위에 앉아서 주변 풍경을 구경하다가 절벽을 보고 이제 근처 어디서 멈추겠지, 하고 일어날 준비를 하던 나는 기겁하여 반사적으로 에테르 쉬프트를 사용했다.
땅에 내려서서 아연한 표정으로 트럭을 바라보다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딱 벌렸다.
트럭은 그대로 절벽에 충돌하는가 싶더니, 아무런 저항없이 벽을 통과해 사라진다.
눈을 끔뻑거리면서 간신히 상황을 이해했다.
“어... 그렇지, 생각해보면 당연한건데. 저 운전수가 난데없이 자살을 기도할리도 없고.”
무슨 9와 4분의3 승강장도 아니고 멀쩡한 벽에다 들이받았더니 안쪽으로 빨려들어가는 초현실적인 광경에 잠깐 넋을 잃었지만 생각해보면 딱히 신기할 일도 아니다.
요 근래에 못 믿을 일을 좀 많이 겪었어야지.
공간왜곡 결계나 아티팩트에 비하면 환상을 보여주는 정도는 양반이라고 봐야한다.
음, 일본 애들이 이런 기술을 얻었다면 중앙 연구소를 그렇게 무방비로 놔뒀을 리가 없으니 기술을 얻었다기보다는 이 절벽이 유적지 비스무리한거라고 보는게 맞겠네.
침을 꿀꺽 삼키고 조심스럽게 절벽으로 접근해 손을 얹어보았다.
눈으로 보기엔 영락없이 이끼가 조금 들러붙은 바위인데 저항없이 그 공간을 뚫고 들어간 손에는 아무것도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한차례 휘저어본 후 확신을 가지고 얼굴을 들이미니 잠깐 어두워졌다가 신세계가 펼쳐진다.
절벽 전체가 환상인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절벽 아래에 입구를 환상으로 가린 동굴이 있는 것 같은데, 그 규모가 대단해서 고블린의 토굴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오크들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아니, 내가 딱히 그 놈들을 무시하거나 얕보는게 아니라 사실이 그런걸.
환상결계야 종족의 비전이라고 하더라도 그와 별개로 절벽에 이만한 규모로 매끈한 굴을 파고 관리한다는건 건축학적인 지식이 상당해야 한다.
그런 지식이 있으면 변변한 공성병기도 없이 무식하게 방벽에 들이받다가 죽어나갔겠어?
협곡 기지를 습격한 오크 군대를 떠올려보면 놈들에겐 이런 대역사를 이룰 역량이 없다.
“여기가 일종의 광장인 것 같고... 입구가 하나, 둘, 셋... 음, 수십개는 되는 것 같은데?”
너른 광장 한켠에 아까 들어온 트럭이 주차를 하고 운전수가 내려서 종이뭉치를 한 손에 끼고 구석에 세워놓은 천막으로 들어간다.
운전수가 들어간 천막 뒤로 벽을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천막과 컨테이너 가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아예 작은 마을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헌터로 보이는 무리가 합금방패와 대구경 총기로 무장하고 안쪽으로 이어지는 수십여개의 작은 입구 중 하나로 발걸음을 옮기는걸 보면서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주 본격적이구만?
언뜻 봐도 한두푼 투자된게 아닌데, 안에서 대체 뭐가 나오기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지 궁금해져서 어디 한번 들어가 보기라도 해야겠다.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돌아가려면 앞으로 시간 여유는 만으로 하루하고 반나절 남짓.
어차피 이렇게 사람, 특히 이능력자에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헌터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연구소에서 했던 것처럼 증거수집 활동을 하긴 힘들테니 곧바로 행동에 나서야지.
동굴이 수십개가 넘는데 어느 쪽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마침 출정에 나서는 것으로 보이는 저 무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다섯 명으로 구성되었으니 편제가 끝난 팀은 아닐 것이고, 아마 탄환 등의 재보급을 위해 나왔다가 전방의 팀원들에게 돌아가는 인원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가장 안쪽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는 헌터들의 뒤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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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이건 동굴이라기보다는 석조 건축물에 가까웠다.
아스팔트로 포장한 도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잘 정비된 길은 마치 로마의 가도를 연상케 했으며 험준한 오프로드를 행군할때와는 피로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진입하는 일본 헌터들을 뒤따라가면서 이만한 폭의 길이면 차량도 동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쿠르릉하고 무한궤도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어쩐지 통로가 점점 넓어진다 했더니, 더 안쪽은 아예 장갑차를 동원할 정도인가보다.
분지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협곡이 남쪽에서부터 이어졌으니까 북부 절벽 뒤로는 높은 고원이 꽤나 넓게 펼쳐져 있는데, 그 지하에 이런 유적지가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인류의 외계행성 개척 역사가 그리 짧은 것만도 아닌데 요 몇 달간 그 역사에 굵직하게 이름을 남길만한 발견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공격! 있는대로 쏟아부어. 방어막 깨진 놈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하고! 잠깐, 누가 총 쐈어? 이 얼빠진 놈, 아직 총화기가 안 통한다는거 몰라?”
“연막! 연막 터뜨리라고! 이 바보야, 저 뒤쪽에 터뜨리란 소리잖아. 저대로 두면 우리 탱커들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대열을 흩어놔야 할 거 아냐.”
“충돌한다! 버텨!”
알아듣기 어려운 뭉개진 발음의 일본어 고함이 소란스럽게 난무한다.
음, 대충 예상은 했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구만.
안쪽에서 쏟아져나와 사람 키보다 약간 더 큰 사이즈의 창과 도끼 등을 곧추세운 채 대열을 갖추고 돌격하는 수십의 오크들에 맞서 장갑차와 임시 바리케이드, 방패를 든 탱커 등을 방벽으로 삼고 열심히 이능을 투사하는 스물 남짓의 팀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모양새를 보니 우리 팀만은 못해도 상당히 노련하다.
반면 오크들은 분노에 찬 표정으로 기세를 돋우며 무턱대고 덤벼들뿐 이렇다할 진형이 없었는데, 전술이라곤 오로지 몸으로 밀어붙이는 돌격밖에 모르는 것 같았다.
협곡 기지를 습격한 수만이나 되는 대군은 원시적이나마 전술적인 개념이 있고 개개인의 전투기술도 상당한 것 같던데 여기 있는 놈들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네.
숫자는 훨씬 더 많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덤벼드니 상대가 될 리가 없다.
방어막의 힘으로 탱커들의 방어진을 밀어붙이던 오크들은 방어막이 하나 둘씩 깨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머리와 몸통에 총격을 받고 허무하게 무너져내린다.
헌터들은 마지막 오크의 머리통이 터져나가고 전투종료 콜이 나오자마자 능숙하게 전장을 돌아다니며 확인사살을 하고 가슴과 배를 갈라 마석을 채취했다.
동쪽의 광산에서 덩어리째로 캐내는걸 다들 알텐데 저런 자잘한 마석을 일일이 다 모으네.
전장정리가 끝나고 잠시 휴식한 후 다시 안쪽으로 진출하려는 헌터들을 지나쳤다.
에테르 폼의 기척제거 효과에 더해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주의한 덕인지 아무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생체실험에 이용할 오크들을 잡기 위해 전투를 하는거라기엔 너무 망설임없이 숨통을 끊었지.
즉, 포로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거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건데...
이 안에 대체 뭐가 있기에 저러는건지 나도 한번 들어가서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