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화 〉1부 (41/110)



〈 41화 〉1부

오크들의 수만 대군은  번 다시 협곡 기지를 공격해오지 않았다.
목숨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광기에 차서 덤벼들던 기세를 생각하면 아무리 예봉이 꺾였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게 이상하다 싶었지만 정찰대는 가슴을 탕탕 치며 장담했다.
자기들끼리 칼부림을 하고 있는 모습까지 목격되었다더라.
추측하자면 절대적인 권위로 놈들을 통솔하던 총대장과 그 아래에서 조율하던 부관급들까지 전부 죽어서 하나로 묶어주던 끈이 사라져 부족별로 내분이 시작된게 아닐까 싶다.
 단위의 전사가 마을 한두군데에서 뽑아낼 수 있는 숫자는 아니니까.
내가 치고 빠지면서 베어낸 지휘관급 오크만 십수명에 달하니 혼란이 없으면 이상하지.

위기가 모두 지나갔다고 판단한 관리관은 내부에 머무는 외국 팀들에게 애초에 의뢰한대로 약속된 사냥일정을 소화해줄 것을 요구했다.
방어전을 벌이며 기지를 지키느라 용을 썼던 헌터들은 이 야박한 요청에 혀를 차며 투덜거렸지만 어쨌든 계약은 계약이니 다시 원정길을 떠나야 했다.
뭐, 다른 팀들이나 투덜거렸지 우린 오히려 반색했지만

“야, 얼굴 펴. 티를 그렇게 내면 어쩌냐.”

“여기서 좋아하는게 더 이상한거 아닙니까? 다른 나라 헌터들도 다들 얼굴 굳히고 있던데.”

“그거야 일본 놈들 하는 꼬라지가 마음에 안 드니까 그런거지. 하여튼 걸작이라니까. 아무리 규정상 그게 맞다고는 해도 융통성이 없어요 융통성이. 저러면서 또 국가이미지나 신뢰도 제고에는 돈을 억수로 쏟아붓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니까.”

“됐어. 더 말할 필요 없어. 그리고 인마, 피곤하고 짜증나서 얼굴 굳은거랑 너처럼 잔뜩 긴장한거랑 같냐? 정작 일 다 하는 우리 막내는 아무렇지도 않잖아.”

기지를 나선 후 나는 일행과 떨어져 분지 안으로 잠입할 예정이었다.
단순히 부당한 대우를 받아 뿔이 나서 심술을 부리려는 의도로 이런 짓을 벌이겠다면 모두들 쓸데없는 위험부담을 지는거라며 반대했겠지만 그 외에도 시도할 이유는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강경호 팀장의 추측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국가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민간기업이라지만, 그래도 외계행성에서 개척과 전투를 벌이는 직업인데 내셔널리즘이 다른 직종에 비해 심하면 심했지 덜할 수가 없다.
이건 단순히 세금  내고 그 댓가로 보호를 받는 정도의 관계가 아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정부에서 하라고 시키면 찍소리 못하고 따르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대한 국익이 달려있는 일에는 전폭적으로 협조하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도 중대한 국익이 달려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지.

“고블린들의 공간왜곡결계, 어마어마했지. 우리 상식으론 어떻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페어리들에게서 대처법을 받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끔찍했을거야.”


중국이 고블린들의 공간왜곡결계 기술을 탈취해간건 반쯤 기정사실이었지만 우리가 페어리들에게서 얻어낸 무효화 아티팩트를 비밀리에 주요 동맹국들에게 공급할 예정이니 중국 정부가 결정적인 전략병기로 사용할 위험은 크게 낮아진 셈이다.


“오크들에게도 비슷한 비전이 있을  있어. 휴우, 모르면 몰랐지, 이런 정황을 짐작하고도 가만히 앉아서 돈만 받고 돌아갈 수는 없다.”

“걱정마세요. 안에서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지 남김없이 다 찍어올테니까.”

“그렇다고 너무 무리할건 없어. 우리가 지금 추측하는 내용만 보고하더라도 정부에서 어떻게든 대응할 여유는 생길테니까. 사실 그 정도만으로도 최소한의 의무는  한거야.”

“조심해라 지호야. 나도 네 은신능력이 대단한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팀원들의 염려는 모두 합리적인 것이었다.
나도 에테르 쉬프트에 달린 방어막이나 수호자의 맹약같은 여벌 목숨이 없었다면 지금쯤 식은땀으로 등을 다 적시거나 아예 이런 일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했겠지.
그러고보면 그간 괴수들을 사냥하거나 오크들을 벨 때 방어막만 깨뜨리기보다는 되도록 직접 베어내서 숨통을 끊는 쪽으로 해서 꽤 많은 성과를 거뒀는데, 골드가 얼마나 모여있을까?
이번 의뢰가 끝나고 복귀하면 요정의 숲 쪽으로 원정을 갈 수 있도록 신청이라도 해봐야지.


걱정어린 격려를 등에 업고 에테르 폼을 활성화한채 장갑차에서 내렸다.
짐은 등에 딱 달라붙는 작은 배낭 하나였는데, 사진기와 이틀치 비상식량이었다.
조끼에 달린 홀스터에는 저번에 받았던 자동권총을 한  꽂아놓았고 탄입대에는 열다섯발들이 탄창  개를 챙겨 탄약은 모두 합해서 예순발.
사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된다는 전제하에 이런 짐들은 필요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방향을 바꿔 십분 정도를 걸으니 방금 나온 기지가 눈 앞에 보인다.

“후우, 좋아. 그래도 인적이 드문 곳이 낫겠지?”

에테르 쉬프트는 공격판정이 아니라서 에테르 폼이 비활성화되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순간이동이니까 근처에 사람이 있다면 순간적으로 뭔가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게 어떤 원리로 순간이동하는건지  감을 못 잡겠으니 뭐든 되도록 조심하는수밖에.
시야가 닿지 않는 탓에 방벽 너머로 단숨에 이동할 수는 없었다.
벽 위로 이동해 안쪽의 시야를 확보하고 쿨타임이 다 돌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쉬프트.


기지 안의 익숙한 거리를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원 순찰의뢰를 받고 모여들었던 세계 각국의 헌팅 팀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한산했다.
아, 마침 스물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어느 팀이 한창 출정을 준비하고 있다.
내가 아는 외국어라고 해봐야 영어가 고작이니 저들의 대화를 알아들을수는 없지만 독일어라는 것은  수 있었는데, 우리 것보다  날렵한 차량에 짐을 실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살피니 우리가 쓰는 장갑차보다 얼핏 보기엔 작아보이지만 형태가 달라 용적량은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다, 바퀴도 궤도가 아니라 큼지막한 타이어였다.
저러면 조금만 험한 곳이라도 다니기 까다로울텐데,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부 평원은 지형이 상대적으로 평탄하고 고우니 굳이 험지돌파를 상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준비를 많이 해서 왔나보네.

조금 더 걸어 기지 중심부를 지나다가 이번에는 전에 봤던 관리관을 마주쳤다.
물론 마주쳤다는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 하는 말이고 저 사람은 날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식후 산책이라도 하는지 녹차 한 캔을 들고 부하와 대화하며 걷고 있었다.
나는 일본어 회화가 유창하지 않았지만 대강이나마 내용을 파악하는데는  지장이 없었다.

“다들 반발이 만만치 않지?”

“그거야 당연하죠. 아무리 달리 방도가 없었다고는 해도 기껏 목숨걸고 싸워서 불의의 습격으로부터 기지를 지켜냈는데, 쫓아내듯 내보내는 꼴이 아닙니까.”


“그렇지. 휴우, 위에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니까. 이렇게 반감을 사서 좋을게 없는데.”


한숨을 쉬며 대충 이런 뉘앙스의 대화를 나눈다.
역시 저 아저씨들도 아무것도 모르고 중간에 끼어서 고통받는 관리직들이었네.
녹차를 홀짝이던 관리관이 소화가   되는  연신 트림을 하니 부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속으로 픽 웃고 지나쳐 기지 중앙의 관리사무소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 팀에게 내 이능력에 관한 보고서 제출을 요구한 주제에 경각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 창문도 열려있고 얼핏 보니 문단속도 제대로 해놓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닫혀있어도 큰 장애는 안 되지만, 너무 허술한데?
배낭에서 사진기를 꺼내 목에 걸었다.
막상 들어와보니 밖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작은 사무실이라서 눈에 보이는 서류를 모조리 찍어가더라도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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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의 북문에서는 중무장병력이 삼엄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자위대 친구들인건 확실하고, 오크들의 습격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걸 보면 이능력자로 구성된 특수군이 아니라 그냥 일반인으로 구성된 단순한 정예병력인가?
아니지, 지휘체계가 다르다면 아닐수도 있어.
기지를 지킨다고 고생을 하건말건 임무대로 여길 틀어막는 것에만 열중했는지도 모르지.
살짝 호기심이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저들이 이능력자인지 아닌지 확인한다고 뭔가 일을 벌이는게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이라는것쯤은 안다.

“가만, 저거 혹시 적외선 감지기인가.”

샅샅이 둘러보니 기지 밖으로 나가는 북문 옆에 급히 설치한 기색이 역력한 장비가 보인다.
내가 어떻게 저걸 알아볼 수 있었냐면, 오닉스 연구소에서 에테르 폼의 적용범위를 시험해본다고 갖은 장비를 동원할  썼던 열감지식 적외선 장비가 딱 저랬거든.
외견부터 시작해서 색깔까지, 어쩌면 아예 같은 메이커 제품일지도 모른다.
관리관의 무례한 요구에 하는수 없이 은신이능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한게 바로 이틀 전이니까 그새 급히 어디서 공수해왔다고 봐야겠지?
열감지 장비를 사용하면 완벽하진 않더라도 희끄무레한 형체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정보를 제공한 것이 오히려 내게 호재로 작용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생해서 장비를 공수했을 저 자위대 아저씨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문으로 안 가면 되잖아.

“방어전 때 에테르 쉬프트도 썼는데... 머리가 굳은거야, 보고를  한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그냥 방법이 없어 포기했을지도 모르지.
혀를 차면서 기지에 들어온 방법 그대로 방벽 위에 올라섰다가 쿨다운을 기다려 다시 쉬프트.
두 번의 순간이동으로 나는 간단히 북문 밖의 좁은 절벽길로 들어섰다.
수성 과정에서 관리관도 분명히 내가 순간이동을 쓰는 장면을 목격하고 심지어 촬영장비로 기록까지 했을텐데 믿을  없을 정도로 안이한 대처다.
음, 어쩌면 내가 확실치도 않은 일로 사서 고생을 하지 않을거라고 판단했을지도.
그야 페어리와 고블린들을 겪으며 오버테크놀로지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겨우 기분이 좀 나쁘다는 것과 작은 의혹 정도로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겠지.

“가만있자... 분지로 들어가는 길이 꽤 험하다고 들었는데...”

에테르 쉬프트가 있으니 길이 험하다고 못 지나갈 일은 없겠지만, 고생길이 열렸구만.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다 알고 자원한 일인데 뭐 어쩌겠어.
15초마다 40미터씩, 그리고 쿨다운이 도는 동안에 에테르 폼의 이동속도 보너스를 받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스무걸음 남짓.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놀라운 속도로 협곡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험준한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을 지나 움푹 파인 분지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시간.
어찌 생각하면 무척 짧은 시간이지만 그 피로도는 결코 낮지 않았다.
물론 환영검사의 스킬셋은 소모값없이 쿨타임만 잘 관리하면 무제한으로 난사할 수 있는 스킬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걸 쓰는 나는 몇 달 전까지 학교 다니던 일반인인걸.
에테르 폼이야 신경쓰지 않아도 이동속도 버프를 부여하니 상관없지만 쿨다운이 될 때마다 에테르 쉬프트를 사용해 수십미터를 건너뛰는 일은 만만찮은 정신력의 소모를 가져온다.
심지어 직선으로 쭉쭉 나갈 수 있는것도 아니고 면밀히 관찰한 지형에 따라 높고 낮은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지그재그에 가깝게 움직여야 했으니까.

“다 왔다...”


그러니 절벽 중간에 삐죽 솟아난 바위에 걸터앉아 아래로 펼쳐진 분지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안도와 짜증, 환희가 동시에 묻어있을 수밖에.
지도를 보면 직선거리로 따져도 한나절 이상은 행군해야  거리를 겨우 한 시간여만에 주파했으니 이만하면 더할나위 없이 잘 했지 뭐.
혹시 북문을 나올  뭔가 흔적을 남겨 걸린게 있더라도 알리바이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일본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은신이능의 지속능력을 C급으로 판정해서 적었거든.
순간이동능력까지 보유한걸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설마 소모값이 없어 마음껏 쓰고 다닐 수 있을거라고 상상하긴 힘들테니 날 의심하기 어렵겠지.
그만큼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이동방식은 비상식적이었다.


분지는 꽤나 넓었지만 미리 들었던 바와 달리 수풀이 우거지지도 않았고 나무 한 그루 없는 평탄한 지형이라 끝에서 끝까지 한 눈에 다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분지 안에 숲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었네.
지구에서처럼 위성이 없으니 정보를 독점하는 쪽에서 숨기면 알 도리가 있나.
배낭에서 블록 형태의 비상식 한 끼분을 꺼내 씹으면서 쌍안경으로 분지 안을 둘러보았다.

“입구쪽의 저 가건물들은 아마 군사기지일거고, 중앙엔 연구소인가? 연구소 맞겠지? 생긴걸 보면 공장같기도 한데... 아.”


잠시 후, 어린애 팔뚝만한 크기의 바를  먹고 텁텁하게 메어오는 목을 복숭아 맛이 옅게 나는 비타민 워터로 씻어내린  나는 첫 목적지를 결정했다.
인부들이 차량까지 동쪽 절벽의  동굴 안에서 뭘 계속 실어오고 있구만.
우선 저 안에 들어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한  가능하다면 연구소 안에까지 가서 훔칠만한게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상식적으로 저런 국가시설에서 정보를 종이서류의 형태로 보관할리는 없겠지만, 일본이라면 혹시  모르지.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내가 올라선 바위의 모양새와 위치를 기억한 뒤 아래로 뛰어내렸다.
떨어지면서 여유롭게 에테르 쉬프트.
크으, 이거 영화에서 보고 꼭 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까 땅에 닿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순간이동하는건 보통 간덩이로는 못 할 일이네.
지상 2미터 정도로 순간이동을 했기 때문에 이동하자마자 조금  떨어졌는데, 낙하의 충격을 받아낸건지 2초간 유지되는 방어막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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