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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화 〉1부 (39/110)



〈 39화 〉1부
방탄방검복의 강화세라믹 플레이트가 조끼 안주머니에 단단히 결속된 것을 재차 확인한 나는 에테르 폼을 취하고 에테르 쉬프트로 최대거리를 이동해 바깥으로 나왔다.
순간적으로 내 몸을 감싸는 주문력 계수의 방어막이 수  뒤 덧없이 사라진다.
이종족들은 다행히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은신효과가 통하는  같다.
나지막히 안도의 한숨을 쉬고 나는 저 멀리서 고함을 질러대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이게 처음 생각할땐 쉬울 것 같았는데 마음먹은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면에서 뛰어오는 적과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뒤에서 쏟아지는 헌터들의 공격이능에도 긁히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워야하니 머리끝이  곤두설 지경이다.
그러니 달리면 늦어도 이십초 안으로 들어올 백여미터 정도의 거리를 전진하는데 거의 오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고 해도 오히려 빠른 편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른다.


“후우, 후우...”

빙 둘러가는 내내 잔뜩 긴장한채로 움직였기 때문에 숨도 조금씩 가빠와서 목표 지점에 도달할 즈음에는 마치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땀에 젖어 급한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전의를 고취하기 위해서인지 여기저기서 고함을 질러대서 안 그래도 스킬에 붙은 기척제거 효과로 감소했을 숨소리 때문에 들킬 염려는 거의 없었지만 사람 기분이  그렇지가 않다.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키는 조금 작아도 무게는 한배 반에서 두배는  나갈듯한 근육질의 이종족들이 지나가는데 안 들릴걸 알아도 숨을 죽이는게 본능 아니겠는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중한 보람이 있어서, 나는 가마 위에 짐짓 위엄넘치는 포즈를 취하며 앉아있는 적 지휘관의 근처 15미터 안에 접근하는데 성공했다.
심호흡을 한  녀석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에테르 블레이드를 발출할 각도를 잰다.
세로로 그어 목을 따면 옆에 있는 부관 비스무리한 놈까지 한번에 베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확실하게 죽이는게 더 중요할 것 같아서 일격이살은 포기하기로 했다.
역시 세로로 뻗어서 정수리부터 가랑이 사이까지 잘라  쪽을 내는게 가장 확실하겠지.
시각적인 효과도 있으니 주변에 충격을 전파할 수도 있을테고.
야성에만 의존하는 괴수무리라면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겠지만 이 놈들은 명백하게 지휘체계를 갖춘 ‘군대’니까 지휘관을 최대한 잔인하게 쓰러트리는 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음 순간, 나는 칼을 뻗어 목표를 명중시켰다.

“케에엑! 끄으윽! 케엑!”

귀를 찌르는 이 불쾌하고 요란한 비명소리는 목표가 아니라 가마 옆에서 보고를 하다가 피와 뇌수, 내장을 뒤집어쓴 시종인지 부관인지 모를 놈이 지른 것이었다.
그야 목표물은  소리도 못 하고  쪽이 나서 가마 좌우로 떨어져 널부러졌으니까.
무게중심이 기우뚱 일그러진 탓에 다시 균형을 잡느라 고생하던 가마꾼들이 땅에  떨어진 두 조각의 시체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둥그렇게 뜨다가 곧 패닉에 합류한다.
공포와 경악이 번져나가는건 꽤나 볼만한 장면이었지만 아쉽게도 나는 진득하게 내 암살의 여파가 퍼져나가는 것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칼날을 뻗는 순간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적의 모습에 당황해서 얼른 도끼를 휘두르지 못하던 이종족 전사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흉흉한 기세로 공격을 시도한 것이다.
나는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않고 즉시 에테르 쉬프트로 몸을 뺐다.
물론 복귀를 위한 최단경로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기지까지는 직선거리로 무려 칠,팔십여 미터나 되었기에 최대거리로 이동해봐야 한창 공성을 위해 진격중인 군세의 한가운데에 튀어나올 뿐이니까.
측면의 군진 외곽으로 이동하고 곧바로 에테르 폼을 활성화해 은신효과를 받으면서 십여 걸음을 더 물러난 후에야 숨을 고르면서 놈들을 관찰했다.

“좋아. 어... 잠깐, 기지까지 복귀하는건 여반장이겠지만 이대로 돌아가긴 좀 아쉬운데?”

이렇게까지 순조롭게 생각대로 일이 풀려나가니 욕심이 커진다.
쿨다운 타임이 돌기를 기다렸다가 몇 번이고  치고 빠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성과를  덕분에 몸에 활기가 돌고 흠뻑 젖은 등의 식은땀도 오히려 시원하게만 느껴진다.
좋아, 한 번 더 해보자.
외곽에서 공격해서 쓸데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아까처럼 하는게 낫겠지.
나는 아직도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 적진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총대장이 죽었으니 다음 순위로 권위가 있는 후계자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나서겠지.
피를 뒤집어쓰고 울부짖던 부관이 고함을 지르며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보인다.
좋아,  놈이 차순위 지휘권자인가보군.
일격을 날린  탈출할 때 에테르 쉬프트를 사용해야하므로 접근은 도보로 해야한다.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자신감이 붙어서인지 아까보다는 훨씬 더 빨라진 속도로 접근한 나는 사거리 안에 걸리자마자 곧바로 에테르 블레이드를 쏘아보냈다.
촤아악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다.
겨우 수십여초 전에 반으로 갈라져 죽은 제 상관과 똑같은 꼴이 되어 좌우로 나뉘어 무너져내리는 녀석의 뒤로 경악에 찬 눈동자가 수십여 쌍이나 데굴거린다.
이번에는 속으로 카운트다운을 세며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나는 근처의 전사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에테르 쉬프트로 빠져나왔다.
반대쪽으로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에테르 폼 토글을 켜서 은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녀석들이 순간적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떠들어대며 달려오지만 곧바로 몸을 숨기고 한참이나 더 물러난 나를 찾지 못하고 괜스레 허공에다 도끼질을 허우적댄다.


그 이후로는 기계적인 일격 후 이탈의 반복이었다.
저 놈들도 바보는 아닌지  잡아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건 아니었지만 내가 늘 같은 자리에서 공격을 개시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트인 지형에서 철통같이 막을 수 있을 리가.
놈들의 반응속도가 빨라져 에테르 블레이드를 날린 후 결과를 확인할 새도 없이 곧바로 에테르 쉬프트로 이탈해야 했지만 나는 실패없이 도합 다섯 놈을 격살하는데 성공했다.

“음, 여기까지인가. 뭐,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다섯 번이나 습격을 당해 머리가 잘려나간 군세는 뒤늦게 완전히 진형을 웅크렸다.
이렇게 되면 설령 공격에 성공하더라도 순간이동을  거리가 넉넉하지 않다.
물론 아무리 머릿수가 많아도 진형의 횡거리가 40미터가 넘을 리는 없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부터 쉬프트 직후 은신을 할 때 위치를 계속 특정당하고 있었으니까.
더 이상 쓸데없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직까지 최전방에서 공성을 위해 달려드는 놈들의 기세는 죽지 않았지만 정작 후방 지휘부는 전의를 거의 상실하고 있었으니, 혼란이 퍼지는건 순식간이리라.
기지 쪽에서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아, 그러고보니  위에서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보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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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로 돌아오는 것은 적 지휘부 요격을 위해 나설때보다 한결 수월했다.
뒤에서 쏟아지는 아군의 공격이능 포격을 신경쓸 필요가 없었으니까.
눈어림으로 거리를 재서 에테르 쉬프트의 이동거리로 방벽 사이의 초소 건물 위에 올라가기 충분한 지점까지 도착한 나는 마지막으로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적 선두 병력 셋을 단칼에 베어버린 후 곧바로 순간이동하여 안전하게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의기양양하게 복귀한 내게 여기저기서 찬사가 쏟아진다.


“최지호! 이 미친 놈. 아무리 각이 나온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생각을 하냐? 간덩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어. 원래 이런 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론 지당하신 말씀이지만, 나도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한 짓이다.
에테르 쉬프트에 달려있는 순간 방어막과 더불어 아이템창 첫 칸에 보이는 수호자의 맹약은 이런 위험한 곡예에도 대담하게 나설 용기가 되어주었다.

“수고했다. 정말 대단했어. 이번 방어전은 사실상 네가  한거야.”

“저도 이렇게까지 잘  줄은 몰랐어요. 하하하. 그런데 저 놈들, 안 빼네요?”


“더 좋지. 봐라, 체계적인 공격을  하고 있잖아. 오히려 후퇴명령을 내릴 정도의 기본적인 지휘체계도 완전히 무너져내렸다는 뜻이지 않겠냐. 곧 산발적으로 도망을 가겠지.”


과연 강경호 팀장의 예측대로였다.
저 이종족들은 생긴 것처럼 꽤나 호전적이고 투지가 넘치는 것 같았지만 후방에서부터 전염되어온 공포는 광기에 가까운 돌격정신을 무디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달려들다가 집중된 공격이능에 방어막이 순식간에 벗겨진 후 이어진 총격에 핏덩어리가 되는 놈도 있었고 뒤돌아 도망치다가 아군과 얽혀 넘어지는 놈도 있었다.
전세계에서 모인 숙련된 헌터들은 전의를 드러내며 나서는 놈에게 능숙하게 화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혼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질서한 후퇴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재정비를 위한 일시적인 후퇴가 아니라 기약이 없는 완전한 패주였다.
다들 긴장이 풀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여기서 결사항전하면 막아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아무 피해도 입지 않고 끝날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팀장님, 다들 이 쪽을 흘깃거리는데요?”

“우릴 보는게 아니라 지호를 보는거겠지. 나가서 혼자 전투를 끝내버렸잖냐.”

흘깃거린다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었던 것이, 대부분은 그냥 대놓고 쳐다보고 있더라.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면서 괜히 선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긴장 때문에 땀을 좀 많이 흘리긴 했지만 결정적인 이동을 이능으로 한데다 적과 근접해서 백병전을 벌이는 보직은 아니다보니 약간 흐트러진 것을 제외하면 차림새는 멀쩡했다.
강경호 팀장은 오닉스 3팀의 명성이 높아지겠다며 그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기지 앞의 공터에 이종족의 시체가 가득했지만 전장 정리는 휴식 후에 따로 하기로 했다.
경계조는 돌아가며 맡기로 했는데, 로테이션에서 오닉스 3팀을 빼준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팀은 없었다.
외벽 초소에서 내려와 숙소 건물로 돌아오면서 긴장이 다 풀린 팀원들은 쉴새없이 떠들었다.

“그런데 우리 팀, 요새 너무 큰 사건에 연속적으로 휘말리는거 아닙니까?”


“그러게. 고블린들이랑 사생결단을 냈던게 바로 얼마 전인데 말이야. 얼마나 됐다고 또 이종족이야? 그것도 이번엔 아예 만 단위 적을 맞아 수성전을 하다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이트 진출 역사가 짧지 않은데 이렇게 급격한 변화가 같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남부 평원도 십수년째 잘만 이용하던 일본 애들 앞마당 사냥터나 다름없는데...”

“숨어있던 선주 종족들이 더 못 참겠다 싶어서 기어나오나보지 뭐.”


“지금까지 본 바로는 워낙에 원시적인 놈들이라... 박멸하는게 별로 어렵진 않겠지만요.”


“방금 죽을뻔했으면서 큰소리치기는. 바지에 지린 오줌이나  말리고 그런 소릴 해라.”


“그게 무슨 중상모략입니까? 지리긴 누가 지려요?”

그 선주종족 중엔 우리와 우호적 협력관계인데다 앞으로 결정적인 물주가 될 중요 사업파트너인 페어리들도 있는데 기어나온다느니 박멸한다느니, 말 표현  함부로 하네.
사실 따지고보면 쟤들 입장에선 우리가 침략자 아닌가.
우리도 갑자기 지구 각지에 열린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괴수들에 의해 먼저 공격받은 입장이라 반격명분이 충분하긴 하지만, 괴수가 아닌 이종족들의 입장에선 좀 억울하긴 할거다.
뭐, 개척의 역사가 짧은 것도 아니고 이미 이권이 복잡하게 얽혀있으니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지.


쓴웃음을 지으면서 동료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고 보다 중요한 일에 대해 고민했다.
 놈들, 역시 생김새부터 시작해서 전투방식까지 검투사를 쏙 빼닮았어.
요정의 숲 북부의 어느 동굴에서 상점창을 이용할 수 있는 제단을 발견했을 때 대충 이 행성과 전생에 하던 게임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점은 짐작했지만, 이건 역시 당황스러운데.
 이종족들이 게임 내의 캐릭터 검투사가 속한 종족이라면 어쩌면 다른 캐릭터들의 종족도  드넓은 행성 어딘가에 서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잠깐, 그럼 설마 인간도 있으려나?
그 게임, 분명 캐릭터의 절반 이상은 인간이었는데.

복잡한 마음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는 사이에 기지를 관리하는 공무원들이 다가왔다.
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감사인사라도 하려나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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