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1부
오백밀리짜리 맥주 두 캔과 육포 한 봉지를 먹어치우고 공용 침낭 대신 따로 가져온 부드러운 극세사 이불에 휘감겨 숙면을 취하던 나는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고 잠에서 깼다.
머리맡에 풀어놓은 손목시계를 더듬어 라이트를 켜보니 새벽 세시 반.
지구 기준으로는 여름철이더라도 아직 어둑할 시간이지만 여기선 슬슬 동이 틀 시간이다.
그래도 대부분은 잠에 빠져있어야 할 시간인데, 무슨 일이지?
헐렁한 트레이닝복 위에 점퍼만 걸쳐입고 방을 나오다가 강경호 팀장과 맞닥뜨렸다.
“무슨 일이에요?”
나처럼 막 깬 것이 아니라 미리 나가서 소식을 듣고 온 듯 옷을 제대로 갖춰입고 있는 강경호 팀장에게 물어보니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혀로 아랫입술을 슥 핥았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최지호, 마침 잘 나왔다. 팀원들에게 전해서 전부 집합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팀장님은 안 주무셨어요?”
“나도 방금 연락받고 나갔다가 오는 길이야. 아무튼 서둘러.”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건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방을 돌면서 팀원들을 전부 깨워 건물 밖으로 나오니 기지 입구에서부터 축 처진 패잔병의 몰골로 들어오는 일행이 보이는데, 어제 봤던 비탈 팀이었다.
하나 둘 셋... 뭐야, 겨우 다섯 명밖에 없네?
어제 끌고 들어오던 차량도 어디다 팔아치웠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걸음걸이도 이상하다.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두 명은 아예 옷 사이로 피딱지가 내려앉은게 보였다.
“다들 모였나? 급하니까 짧게 브리핑하지. 저녁때 이차 출정을 나간 프랑스의 비탈 팀이 이종족에게 습격당했다. 지금 이종족의 무리가 협곡을 향해 몰려드는 중이라고 한다.”
“이종족이요? 괴수가 아니라?”
“그래. 이종족. 무기를 들고 자기들끼리 말까지 했다고 하니 괴수는 아니지.”
아무래도 우리가 대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긴 한가보다.
고블린이냐고 물었더니 살아서 도망쳐온 비탈 팀의 증언에 의하면 고블린은 아니란다.
아티팩트와 공간왜곡 기술에 대한 정보는 암암리에 돌아다니며 아는 사람만 아는 기밀정보였지만 페어리와 고블린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떠들썩하게 전 세계 언론을 달궜으니 프랑스의 헌터들도 알고 있을텐데, 직접 맞닥뜨려본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거겠지.
“괴수와는 달라. 명확한 목적성을 보이고 있어. 방어준비를 해야 한다. 다행히 기지가 바깥쪽에 대해 방어에 용이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최대한 이용할거야.”
“일본 놈들, 혹시 이거 다 예상한거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상식적으로. 분지 안에서 괴수군락을 토벌한다면서 정작 협곡 기지는 바깥쪽에서 들이치는걸 방어하는 구조로 만들어놓고, 절벽 중간중간에 파놓은 포구도 다 그런 용도 아닙니까.”
“나도 의심가는 바가 없는건 아닌데... 그 정도 정황가지고 뭐라고 할 수는 없어.”
애초에 계약할 때 외국 회사들에게 후한 조건을 퍼주는 것부터가 이상하긴 했지.
아무튼 지금 급한건 일본 정부의 숨겨진 의도가 아니라 당장 기지를 방어하는 일이었다.
비탈 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종족의 군세는 적게 잡아도 수백 단위.
협곡 기지에 머물고 있는 각국의 헌터들만 합쳐도 백여명에 가까우니 막아내는게 불가능해보이진 않지만 이쯤되면 이건 사냥이 아니라 완전히 전쟁이네.
“장비 다 챙겼으면 어서 따라와. 아니, 당연히 장갑차도 다 끌고 와야지.”
“보나마나 입구에 세워서 바리케이드 보강하는데 쓸텐데, 그러기엔 너무 아깝지 않아요?”
“지금 돈이 문제냐. 그리고 어차피 일본 정부에 항의해서 피해본 금액은 다 받아낼거야. 그러니까 탄약도 아끼지 말고 있는대로 쏟아부어. 효율같은거 생각할 필요 없으니까.”
우리뿐만 아니라 기지 중심부의 다른 팀 숙소건물에서도 마치 벌집에서 벌이 쏟아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쏟아져나와 장비를 챙기면서 부산을 떠는게 보였다.
십여대가 넘는 장갑차와 수십여대의 트럭이 기지 전역에서 입구로 몰려든다.
금속제 바리케이드와 철조망으로 입구를 완전히 봉쇄하는걸로도 모자라 몇 겹씩 둘러친다.
“우린 정문 바로 위를 맡는다. 내가 가서 그랬거든, 우리한테 S급 공격이능력자가 있다고.”
“쓸데없이 위험해지는거 아닙니까? 반대급부는 받으셨죠?”
“날 뭘로 보고 그런 소릴 하냐. 당연히 받았지. 전리품 분배에서 많은 양보를 받았어.”
“전리품이라니... 아, 저 놈들도 몸에 마석 있으려나? 괴수가 아니라 이종족이면 마석 없는거 아니었어요? 전에 보니까 고블린들은 없던데. 페어리는 아직 모르고...”
잡담으로 전투 직전의 긴장을 풀면서 정문 초소 위에 올라간 나는 저 멀리서 보이는, 조금씩 꿈틀거리는 적의 군세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산이나 언덕도 없이 쭉 뻗은 평야라서 가시거리가 길다는게 오히려 저주였다.
“수백이요?”
“적게 잡아도, 라고 했잖아. 프랑스 놈들이 본건 그냥 선발대나 정찰대였나보지 뭐.”
허탈하게 웃으면서 반문하니 역시 맥이 탁 풀린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온다.
이건 뭐, 끝이 안 보이는게 어림잡아 수천 단위는 되어보이는데?
삼국지에서나 수만대군 수십만대군 하는거지 수천 단위만 되어도 그 위세는 어마어마하다.
일개 보병사단의 병력이 보통 일만 남짓하니까 지금 보이는 저 이종족의 무리는 머릿수만 따지면 두어개 연대 이상의 규모인 셈이다.
아니, 저 뒤에 줄이 더 늘어서 있다고 가정할 때 진짜로 만 단위일지도 몰라.
게이트로 지구와 연결된 이래 지금껏 문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이 행성에 갑자기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렇게 연속적인 컨택트가 벌어지는건지 모르겠다.
페어리나 고블린같은 작은 부족국가 규모라면야 숲 속이나 땅 속에 숨어서 살던 애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치는데 네자릿수나 다섯자리수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규모의 문명을 이룩한 놈들이 이제 와서 새로 발견된다니, 공교로워도 너무 공교로운데.
“미개척지에 저 놈들 나라가 있나보죠?”
“그렇겠지. 다들 무기를 들고 있으니 전부 군사인데, 부족사회나 도시국가 레벨로 뽑아낼 수 있는 머릿수가 아냐. 음, 내가 보기엔 저거 철제무기 같은데... 설상가상이군.”
손바닥만한 크기의 고배율 쌍안경을 들고 내다보던 강 팀장이 침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같은 생각인지 주변의 다른 나라 헌터들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냉병기를 쓰는 수준의 군대니까 까짓 기관총 몇 정만 있으면 백만대군인들 두렵겠냐만 문제는 여기가 지구가 아니라 저 놈들의 행성이라는데 있다.
방어막을 상쇄하려면 이능력이 필요하니까 화력을 마음대로 투사해봐야 의미가 없잖아.
괴수 사냥할때나 고블린같은 수십, 많아야 백단위 병력을 상대할때는 그저 약간 불편하게만 느껴졌던 점이지만 이렇게 꼼짝없이 대규모 재래식 공성전을 벌이게 되니 아주 미치겠다.
“그래도 저 놈들 무기로 외벽을 부술수는 없을거야. 죄다 합금 강판이니까. 문도 단단히 잠가놨으니 기어오르는 놈들만 상대하면 돼. 우리끼리만 싸우는 것도 아니고.”
수백여 미터 밖에서 작은 점으로 보이던 놈들의 군세가 점점 기지를 향해 다가온다.
우리가 보고 있는 광경을 똑같이 본 기지 관리관은 새파랗게 질려서는 사람을 보내 분지 안에서 소탕작전에 임하고 있을 일본 헌터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겠다고 했다.
그래, 지금 한가하게 안에서 가만있는 괴수들 군락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을때가 아니지.
놈들이 발을 맞춰서 척척 걸어오는건 아니지만 워낙 머릿수가 많으니 무질서하게 두두두 울리는 발소리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와, 저 뒤에 또 있어... 농담 아니라 진짜로 만, 아니 몇만 단위가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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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금으로 된 방벽에 턱 노르스름한 손이 걸쳐졌다가 서걱 잘려나간다.
목이 찢어지는 불쾌한 비명이 들려오지만 소란스러운 전장에서 그 소리는 멀리 뻗지 못했다.
에테르 블레이드로 막 한 놈을 손부터 가슴까지 비스듬하게 통째로 베어낸 나는 쿨타임이 돌기를 기다리면서 초소에 거치된 50구경 기관총을 드르륵 긁었다.
대부분의 총알은 방어막에 막혀 허무하게 떨어져 내리지만 개중에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공격이능에 맞아 다 상쇄되었는지 피가 튀고 머리가 터지며 쓰러지는 놈들도 간간히 보인다.
우리 공격조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박우진 조장의 지시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이능을 발현하여 화력을 투사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되는대로 마구 쏘아내고 있었다.
쿨다운 3초가 지나고 초소건물 끄트머리에 붙어서 다시 아래쪽으로 에테르 블레이드.
이번에는 직선으로 세 놈이나 되는 적이 두쪽이 나서 갈라진다.
가장 앞에 있던 놈은 머리가, 그 뒤로 차례대로 가슴과 배가 갈라져 뇌수와 내장이 쏟아졌다.
“젠장. 이런 일이 있을줄 알았다면 아예 방벽으로 성을 쌓아야 했던건데.”
“누가 알았겠어요. 이런 공성전은 영화에서나 봤는데.”
한탄하면서도 부지런히 이능을 발현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우리의 목소리에 아직까지 절망의 기색이 어려있지 않은건 어디까지나 아직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던 덕분이다.
경로마다 설치된 바리케이드는 적이 달려드는 기세를 죽이면서 가치를 증명했고 금속으로 된 문은 겨우 창이나 도끼 따위로 두들긴다고 해서 부서질만큼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으며 각 초소건물을 잇는 높이 2미터 가량의 방벽은 성벽이라고 하기엔 낮아서 놈들이 기어오르기에 충분했지만 어쨌든 피해없이 안전하게 화력을 퍼부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놈들에게 원거리 투사무기가 없었던게 천만다행이다.
활 같은거라도 쏘아댔다면 진작에 사상자가 나오고도 남았지.
“놈들이 물러간다!”
부웅, 금속으로 된 커다란 나팔을 부는 소리에 맞춰 공성 중이던 이종족의 군세가 시체만 남기고 썰물빠지듯 물러가는 것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린다.
조금 있다가 재정비를 해서 다시 들이치겠지만, 어쨌든 소중한 시간벌이가 된다.
“중국 헌터들이 있던 오른쪽 방벽에서 피해가 나왔어.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중상이래.”
“아, 그거 아까 봤어요. 한 놈이 시체를 밟고 단번에 뛰어올라서 넘어왔던데. 어떻게든 처리한줄 알았더니 겨우 한 놈 때문에 세 명이나 피해가 나온거예요?”
“힘도 세고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아. 만만하게 봐선 안 될 놈들이다. 우리 전진기지 근처에 서식하는 이종족들이 페어리와 고블린 같은 녀석들이라 천만다행이지.”
에너지바 하나를 씹어삼키고 이온음료를 들이키면서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바닥난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티며 이능을 계속 발현해야 해서 몹시 지친 다른 공격조원들과 달리 쿨다운 타임만 돌면 아무 부담없이 칼날을 쏘아낼 수 있어서 약간의 전투피로를 제외하면 멀쩡했던 나도 방벽을 뛰어넘은 녀석의 싸움장면을 지켜볼 수 있었다.
들고 있던 도끼를 몇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방어막이 다해 온 몸에 총탄이 박혀서 쓰러졌지만 그 몇 번 휘두르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던건 분명하다.
그보다 그 놈이 도끼를 쓰는 모양새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는 기분이 드는데.
예전에 봤던 드라마에서 바이킹들이 싸우는 모습과 비슷했나 돌이켜보니 그것과는 전혀 달랐고, 오히려 나무로 만든 엉성한 방패를 아래로 비틀어내리며 울부짖는 광경이...
아, 내가 그걸 어디서 봤더라.
“어? 아니, 잠깐만...”
마시던 이온음료가 벌어진 입 사이로 주르륵 흘러서 급히 입을 다물고 옷으로 입가를 훔쳐내면서 나는 몹시 당황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공연히 기침을 했다.
저거, 아무리 생각해도 검투사인데?
검투사라는 캐릭터 이름에 걸맞지 않게도 방패와 한손도끼를 써서 네이밍 잘못 한거 아니냐는 불평이 잊을만하면 나오던, 전생에 하던 게임의 또 다른 캐릭터다.
그 캐릭터가 공격속도를 대폭 올리는 셀프 버프기를 사용할 때 인게임 모션이 딱 그랬어.
심지어 그 직후 직전의 공격보다 무시무시하게 빨라진 종횡 연속참격에 사망 피해가 나왔으니까 정황도 딱 들어맞는거 아닌가?
“놈들이 다시 몰려온다! 전투준비!”
진득하게 앉아 기억을 더듬어볼 여유가 있었으면 좋으련만.
물러난지 얼마나 됐다고 쉴 생각도 안 하고 또 4차 공격이 시작되려는 모양이다.
나는 급히 검투사의 스킬셋에 대해 떠올려보았다.
분명 공격속도 버프가 하나, 온힛 평타강화 단일기가 하나, 고정피해 광역기가 하나였지.
궁극기는 3초 무적이었나, 그랬던 것 같은데.
다행히 원거리 공격스킬이나 지형을 무시할 수 있는 이동스킬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그런게 있었으면 이런 낮은 방벽쯤 진작에 무시하고 들어와서 난전이 벌어졌겠지.
나는 초소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다시 몰려오는 놈들의 군세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렇게 쭉 훑어보다가 문득,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자그마치 여섯 놈이나 동원해서 어깨에 둘러메게 한 가마 위에 올라앉은 저 놈, 왕인지 부족장인지 장군인지, 아무튼 높은 지위같은데?
옆에 놓인 쌍안경을 들어 초점을 맞추고 보니 뭐라고 고함을 질러대며 명령을 내리는게, 지금 몰려온 이 공세를 지휘하는 지휘관인건 분명하다.
“강 팀장님! 저 잠시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뭐?”
“저기 저 놈, 지휘관만 잡으면 혼란에 빠져서 좀 쉬워지지 않겠어요?”
“네가 내려가서 뭘 어쩌게?”
“중국 특수군 애들 잡을 때 보셨잖아요.”
“그 은신스킬이 저 놈들한테도 통할까? 아니, 통한다고 치더라도 너무 위험해. 가까이 가서 죽이는 것까진 몰라도 직후에 주변에 있는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물론 에테르 폼 상태에서 허공에 휘두른 공격에 살짝 닿기라도 하면 곧바로 은신이 해제될테니 상당히 위험한건 맞지만, 가만히 계산해보니 꼭 그런것도 아니다.
내려가서 에테르 쉬프트의 쿨다운이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행하면 그만이잖아.
가까이 가서 에테르 블레이드로 두 쪽을 내자마자 최대 이동거리로 40미터를 이동해서 곧바로 재은신을 하면 저 놈들이 무슨 재주로 그걸 찾겠어?
“후우, 조심해라. 안 통할 것 같으면 바로 다시 올라오고.”
내 계획을 들은 강경호 팀장은 잠깐 머리를 굴려보다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계획이라고 판단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허가했다.
사거리 밖으로 물러섰다가 다시 다가오는 놈들에게 공격이능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아, 저거 거슬리네.
게임처럼 네 편 내 편 딱 나눠서 적용받는게 아니니까 우리쪽 광역공격에 스치기만 해도 에테르 폼이 풀려서 곤란한 지경에 처할텐데.
그렇다고 잠깐 공격을 멈춰달라고 요구하기도 난감하니 그저 조심해서 둘러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