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1부
본능적으로 오른쪽 아래 골드란을 바라보니 4200이라는 아라비아 숫자가 선명하다.
가만있자, 내가 그동안 직접 숨통을 끊은 괴수의 숫자가 얼마나 되더라?
훈련소에서 실습목적으로 처음 게이트를 넘었을때부터 지금까지 꽤나 많은 괴수들을 베어넘겼으니 어느 정도 골드가 쌓여있는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
경험치와 레벨업의 선례로 미루어보아 골드를 얻는 시스템도 아마 방어막만 벗기고 다른 사람이 처치한 괴수는 반영이 안 되고, 내가 직접 본체에 타격을 입힌 괴수가 죽은 경우에만 반영되었을 것이다.
보통 인게임에서 최종 완성아이템 하나가 삼, 사천골드쯤 했으니까 지금까지 쌓인 저 돈이면 최종완성 아이템 하나에 일차 재료아이템 하나쯤을 더 살 수 있는건가.
메뉴를 쭉 훑어보니 인터페이스며 아이템이며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게임의 상점창 그대로다.
혼란 속에서 얼이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나는 상점창의 스크롤을 내리면서 메뉴에 잔뜩 들어찬 아이템들을 둘러보았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면 현실감이 좀 없어지는게 정상이긴 한데, 그래도 지금까지 이 세계에서 20년 가까이 살아온 기억과 정체성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전생의 30년 넘는 인생은 보낸 시간의 절대적인 양은 더 많아도 어디까지나 먼 옛 기억에 불과한 것이다.
“아니지, 이게 아니야. 어휴, 큰 일날뻔 했네.”
무의식적으로 환영검사의 코어 아이템 하나를 구입하려던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주문력을 큰 폭으로 올려주고 이동속도 옵션까지 붙어있는데다 재료 아이템도 딜 로스를 최소화할 수 있게 짜여져 있어서 환영검사라면 상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가장 먼저 구입하는 최우선 아이템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게임에서의 이야기다.
난 지금 게임을 하고 있는게 아니니까.
“현실적으로 내 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잠깐. 이거 사자마자 진짜로 뭐가 나오기라도 하면 좀 곤란하지 않나?”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신전을 탐사하는 재미에 푹 빠진 윤기정은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보여서 나는 안심하고 고민에 빠질 수 있었다.
만약 방어아이템을 구입했는데 진짜로 철판으로 된 전신갑옷이 허공에서 툭 튀어나오기라도 한다면 팀원들에게 뭐라고 변명하기가 퍽 난감한데.
고블린과 페어리들의 주술이라는 선례가 있으니까 ‘어쩌다보니 아티팩트를 생성하는 이 제단의 기능을 발견했다’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윗선에 보고가 들어가는대로 곧바로 제단 이용에 외부적인 제약이 걸릴테고.
“아.”
메뉴를 쭉 내리면서 각양각색의 특수한 효과를 가진 아이템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한가지 아이템을 발견하고 탄성을 질렀다.
내가 왜 이 아이템을 떠올리지 못했지?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런가.
이거 뭐 고민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구만.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을 전부 해결해줄 수 있는, 현 상황에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아이템이 눈에 들어온다.
수호자의 맹약을 더블클릭하는 감각으로 바라보니 찰칵, 무려 3600골드가 차감된다.
이건 아이콘도 그렇고 아이템설정이나 설명도 그렇고 작은 사이즈의 목걸이니까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해도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기우였다.
“돈이 줄어든걸 보면 구입이 되긴 된 것 같은데, 역시 실물이 어디서 툭 떨어지는건 아닌가.”
혹시나 해서 전투조끼와 바지에 달린 도합 예닐곱개나 되는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수호자의 맹약과 같은 형태의 목걸이가 발견되지는 않았다.
중요한건 아이템 효과가 내 몸에 실제로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인데...
나는 내 몸을 내려다보다가 슬쩍 팔뚝의 살을 손가락으로 콱 꼬집어보았다.
음, 전보다 살짝 덜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아니지, 이 정도는 그냥 플라시보일수도 있는데.
잠시 고민하다가 남은 600골드로 물리방어력만 올려주는 300골드짜리 재료아이템을 두 개 더 샀다.
둘 다 갑옷종류였지만 실물이 튀어나오지 않는다는건 이미 확인했으니까.
아이템은 종류불문 여섯 개까지 착용할 수 있었지만 그 점 역시 문제될건 없다.
되팔거나 상위아이템으로 합성하면 그만인데다, 상점 이용을 여기서 마치고 당분간 이용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고 해도 방어력이 올라가서 손해볼건 전혀 없으니까, 최소한 중간은 가는 선택인 셈이다.
허리춤의 대검피에서 날 길이가 한 뼘쯤 되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팔에 가져다대니 서늘한 감촉에 소름이 돋는다.
깊게 베이지 않도록 살짝만 그어보자, 아주 살짝만.
“읍! 오, 안 베인다! 안 베여. 크크큭.”
물론 자국이 깊게 남은데다 아릿하게 통증까지 느껴지는걸 보면 여기서 더 힘주어 썰거나 가속을 붙여 내리치면 여지없이 베이면서 당분간 붕대를 감고 있어야 할 상처가 남겠지만, 여기까지만 확인해도 충분하다.
원정 나오기 전에 시퍼렇게 갈아놓은 예리한 칼날인걸.
그야 다용도 나이프니까 최소한의 내구성을 확보해야하니 면도칼처럼 닿으면 베일 정도로 날을 세운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의 피부 정도는 슬쩍 긋는것만으로도 갈라져야 정상이다.
무딘 가검으로 베기라도 한 것처럼 눌린 자국정도만 남는다는건 분명히 아이템으로 올라간 물리방어력이 내 신체에 적용되고 있다는 뜻이지.
소식을 듣고 왔는지 강경호 팀장의 목소리가 건물 입구에서부터 들려온다.
“와, 이게 다 뭐야? 어째 요정의 숲으로 원정을 오면 고생은 해도 항상 성과가 넘치는구만.”
“오셨습니까 팀장님. 팀장님이 보기에도 장난 아니죠?”
“이종족에 대해 발표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 행성의 고대문명에 대해 발표를 하게 생겼네.”
석조건물을 둘러보면서 연신 탄성을 지르는 강경호 팀장에게 아이템 상점의 역할을 하는 제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실수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꼭 먼저 제단을 발견하고 손을 댔던 윤기정의 반응이 아니더라도 아이템 상점창을 이용할 수 있는게 캐릭터가 덮어씌워진 나뿐이라는 사실을 추측하는건 전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동안 적잖은 정이 쌓이고 완연히 한 가족이 된 오닉스 사람들이 연구소 괴짜들처럼 날 해부하고 싶어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짓이지.
내게 다가오던 강 팀장과 윤기정이 멈칫한다.
아, 칼을 안 집어넣었네.
“그런데 지호 넌 왜 칼을 뽑아들고 있냐?”
“아, 이거요? 제단에 뭐가 달라붙어서 무늬를 가리고 있길래 떼어냈어요.”
“야, 함부로 건드리면 어떡해? 사진만 찍고 최대한 원형보존한채로 연구팀에 넘겨야지.”
“그냥 위에 쌓인 흙덩이가 굳은거였어요. 다른건 안 건드렸구요.”
대강 둘러대고 단검을 다시 플라스틱 칼집에 꽂아넣고 싱글싱글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어떤 공식에 따라 쌓이는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껏 쌓인 골드는 다 썼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이곳은 학자들이 붙어서 조사한 후 유적지로 공개될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와서 제단과 접촉하는 것도 크게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뭔가 신비한 현상이 일어난다거나 주변의 조각상 및 부조에서 중요한 기록이나 기술이 발견된다면 기밀시설로 지정될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이 제단의 기능을 오직 나만 활용할 수 있다는 전제가 맞다면 말이지.
“여기서 조금 쉬다가 나가자. 밖에선 한창 사체를 해체한다고 여기저기 지저분할테니까. 페어리들의 의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 돌아가면 보너스를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거야.”
“그거 사실상 선금으로 아티팩트를 몇 자루나 받은거 아닙니까?”
“아티팩트는 인마, 어디까지나 선물로 받은거지. 우리가 먼저 달랬냐? 그리고 우리가 잡은게 어디 보통 괴수냐? 난 아직도 오금이 다 떨려. 지호가 아니었다면 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거야. 도망치기만 하는데도 희생자가 적잖이 나왔을걸? 여러모로 운이 따랐지.”
“그건 그렇습니다. 녀석이 이 좁은 굴로 틀어박힌 것도 결정적이었죠. 그나저나 지호 쟤 정말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누가 보면 목숨이 두 개인줄 알겠어요.”
“그러게. 큭큭큭. 지호야, 너 이능 대단한건 알겠는데 몸 좀 사려 자식아.”
“다 잘 됐는데 이제 와서 잔소립니까? 하하하.”
윤기정과 강경호 팀장이 날 두고 잡담을 하는걸 들으면서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었다.
윤기정은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방금 내 목숨은 진짜로 두 개가 됐거든.
아니, 엄밀히 말하면 ‘겨우’ 두 개도 아니지.
'수호자의 맹약'의 아이템 패시브 쿨타임이 30분이었던가?
수호자의 맹약은 체력과 체력재생이 조금씩 붙어있는 아이템이었지만 그 수치는 최종 아이템은커녕 중간에 거쳐가는 아이템으로 보기에도 손색이 있을 정도로 낮았다.
사실상 장비에 붙은 패시브 기술, 그러니까 죽음에 달하는 피해를 받으면 2초의 경직 후 50퍼센트의 체력을 갖고 되살아나는 부활기능만 보고 사는 아이템이다.
이걸 사는건 거의 3,4코어 이상의 세팅이 갖춰진 게임 중후반에 물몸 누커나 딜러가 보험으로 간혹 사는 아이템인데, 그 패시브 기술의 쿨타임이 무려 30분이었다.
중후반에 갖춘다고 가정하면 한 판당 진행시간이 아무리 길어봐야 한 시간을 가는 법이 없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사실상 한 번 쓰면 끝인 셈이다.
무려 3600골드라는, 최종완성 아이템들 중에서도 싸지 않은 가격에 비해 부활기능을 포함하더라도 가성비가 워낙 낮아서 선호도가 낮은건 물론이고 설혹 딜로스를 감수하고 사더라도 부활기능이 빠지면 곧바로 되파는 아이템.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인게임 상에서의 이야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생명이잖아!
겨우 반 시간마다 목숨 하나가 예비로 생긴다니, 이건 무조건 최우선으로 사야지!
만약 중간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코어템을 샀으면 크게 후회할뻔 했다.
클릭미스 등에 의해 아이템을 잘못 사더라도 구입한 것을 되돌려 환불하는 기능은 없어서 반값에 되팔 수밖에 없는데, 그랬으면 수호자의 맹약을 사지 못했을테니까.
신전을 나가면서, 나는 전에 없는 무한한 안정감을 느꼈다.
앞으로 3팀이 아무리 위험한 원정길에 나선다고 해도 자신있게 앞장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제단의 정체가 뭔지, 대체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즐기던 게임과 이 행성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건지 의문은 넘치도록 남았지만, 나는 그 모든 의혹을 일단 한 켠으로 제쳐두었다.
지금 중요한건 내가 어마어마한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니까.
어쩌면 나는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에 환생한 순간에 이미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한 이해를 반쯤 포기하고 있었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적응하는게 수월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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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가까이 고생한 끝에 우리는 장갑차의 적재함을 각종 샘플로 가득 채우고 트레일러까지 꺼내 연결해서 챙길 수 있는만큼 최대한 사체를 챙겨 귀환길에 올랐다.
그러고도 동굴에는 거대한 뱀 괴수의 사체가 거의 그대로 남았는데, 우리가 챙겨서 가져올 수 있는건 겨우 전체의 5퍼센트 가량에 불과했으니 새삼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지구에 있는 본사에 보고하면 곧 남은 사체를 회수할 팀을 보내겠지.
동굴 끝에서 발견한 고대문명의 흔적에 대한 보고까지 같이 들어갈테니 아예 새로운 전진거점을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프로젝트 팀을 구성해서 파견할지도 모르겠다.
“페어리 마을과의 교류를 효율적으로 하려면 어차피 전진거점은 세워야 하니까. 마을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꽤 되긴 하지만 한국 전진기지보다는 훨씬 가깝잖아.”
“그럼 우리가 또 여기 파견될까요?”
“글쎄. 호위병력은 아마 다른 팀에서 차출하지 않을까? 우리 3팀이 최근 원정에서 얻은 성과가 이렇게 대단한데 유적발굴 호위로 박아두긴 아까울텐데. 명마는 초원을 달려야 하는 법 아니겠냐. 흐흐흐.”
“명마 좋아한다. 저 새끼는 죽을 고비를 넘겨도 참 변하는게 없어요.”
나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환영이다.
고대유적의 발굴 및 연구팀을 호위하는 임무도 제단과 접촉할 기회가 늘어날테니 나쁘지 않고 이 행성을 적극적으로 탐험하며 사냥에 몰두하는 것도 골드를 벌 수 있을테니 좋다.
월급과 성과급으로 돈을 버는 것 외에도 사냥에 나설 유인 하나가 더 생긴 셈이다.
그동안의 사냥만으로 벌써 코어아이템 하나를 맞췄으니 아이템창 여섯 개를 꽉 채우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내 가슴은 기대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