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1부
사실 내게 게임캐릭터의 성능이 덮어씌워졌다고 가정할 때 레벨업을 할 때마다 기초 스펙, 그러니까 체력이나 방어력, 공격력 등의 스탯이 오르는게 마땅하지만, 그건 확인할 길이 없다.
당장 지금 내 상태만 봐도 긴장이 풀렸는데도 불구하고 컨디션이 무척 좋긴 하지만, 그게 레벨업에 따른 체력회복의 결과인지 아니면 스펙업이 된건지는 구분하기 힘드니까.
레벨업 전후로 연구소에 가서 신체능력을 정밀검진한다면 뭔가 결과가 나오겠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까지 내 카드를 까면서 확인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무엇보다도 레벨마다 캐릭터 성능이 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스탯보다는 스킬에 있었고.
“그런데... 이건 사실상 쓸모가 없지 않나?”
게임에서처럼 스킬포인트를 내 뜻대로 배분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에테르 블레이드가 2레벨이 된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에테르 블레이드부터 선마하는게 환영검사의 정석 스킬트리이긴 하지.
에테르 쉬프트와 에테르 폼은 라인전 상대나 게임 상황에 따라 우선순위가 바뀌지만 유일한 공격스킬인 에테르 블레이드는 어떤 경우에든 최우선이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인게임 플레이에서의 이야기지.
에테르 블레이드는 스킬레벨이 올라가봐야 기본 공격력과 주문력 계수가 올라갈 뿐인걸.
특성 덕분에 주문력이 사실상 무한이라 더 이상 화력에 신경쓸 필요가 없는 나로서는 사정거리와 쿨타임이 고정된 에테르 블레이드에 들어가버린 포인트가 아까울 수밖에 없다.
스킬레벨마다 쿨타임이 줄어들어 최종적으로 10초까지 줄어드는 에테르 쉬프트나 은신 시 이동속도 보너스의 폭이 증가하는 에테르 폼에 비하면 메리트가 전혀 없잖아.
“사격 중지! 사격 중지! 지호야, 다시 아까처럼 내려가서 확인해볼 수 있을까?”
“예. 맡겨만 주십쇼.”
다시 안전장비를 껴입고 절벽에 내려가는 내 동작은 아까보다 훨씬 더 과감했다.
괴수가 완전히 죽은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툭툭 벽을 박차면서 쭉 내려와 불타고 패이고 온갖 수난을 다 겪은채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괴수의 사체 위에 사뿐히 내려선 나는 안전장비를 벗고 조심스레 몇 걸음을 옮겼다.
사방으로 튄 피와 고깃점은 그로테스크했고 아직도 타들어가는 비늘가죽에서 탄내섞인 역겨운 연기가 올라와 그야말로 지옥의 어느 한 구석에 와있는 것 같았다.
경험치가 들어온걸 함구하더라도 역시 죽은게 확실하다.
이런 꼴을 하고도 고통을 참으며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움직임을 멈추고 참고 있다면 그 성의를 봐서라도 당해줘야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죽었습니다. 확실해요. 근데 이거 시체를 어떻게 꺼내죠? 갖고 가긴 해야할텐데.”
보통 괴수를 사냥하면 사체에서 비싸게 팔리는 부분만 잘라가는게 일반적이지만, 이건 뭐, 어떻게 해체를 하면 좋을지 감도 안 잡히는데?
가죽과 살은 샘플 정도만 챙길 수밖에 없을테고 마석도 찾아서 빼고, 아, 이빨이나 눈, 각종 내장 샘플, 그리고 혹시 있다면 독샘도 챙겨서 가져가보는게 맞겠지.
아무래도 미발견 괴수다보니 다양하게 샘플을 챙겨가서 연구소에 넘기는게 정석이다.
그러려면 높은 확률로 머리가 있을 저 앞쪽까지 파헤쳐야 한다는 소리인데...
당연히 한두시간으로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다 준비해왔지 인마.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지만 거대괴수라는건 미리 들었잖냐.”
레펠 장비로 절벽을 내려오던 강 팀장이 유쾌하게 대꾸하면서 웃는다.
그 뒤로 팀원들이 따라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탱커들은 레펠장비 외에도 저마다 커다란 장비를 하나씩 낑낑대며 짊어지고 있었다.
저거, 장갑차 적재함에도 다 안 들어갈 크기라서 차체 위에 올려놨던 정체모를 장비다.
음, 사실 난 지금까지 저게 분리되는 장비인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방호용으로 덧붙여놓은 장갑차의 일부인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첫 원정때는 저런게 붙어있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왜 이제껏 몰랐지?
“이렇게 큰 경우는 처음이지만 해체하기 곤란할 정도로 거대한 괴수를 사냥하는 일이 전례가 없는건 아니거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챙겨왔지.”
“명진아! 각도 잘 잡아라! 잘못해서 무너지면 다 네 탓이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기다려. 중간에 꼬인데 없지? 시동 걸기전에 더블체크 해.”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생긴 기계를 갖고 내려온 채명진이 다 헤지고 찢어진 비늘가죽 위를 돌아다니다가 적당한 위치를 찾아 비스듬한 각도로 설치한다.
기계 뒤에는 신축성있는 재질로 된 굵직한 호스가 길게 늘어져 하늘로 연결되어 있었다.
처음보는 기계지만 아무래도 입구의 커터로 사체를 갈아내서 호스를 통해 빨아들이는 형태의 채집기가 아닌가 싶다.
신형 기계가 아닌 이상 저 기계에 대해서도 분명 훈련소에서 이론 시간에 배우긴 배웠을테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걸 보니 내가 졸았나보지 뭐.
그 채집기를 메인으로 다른 팀원들도 저마다 도구를 들고 샘플 채취에 여념이 없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역할을 해서인지 내게 일을 도우라고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어? 아이고, 안쪽이 다 짓물러서 터졌나보다. 조심해요, 넘어지지들 않게.”
기계가 가죽을 찢고 파고들기를 얼마쯤, 바닥이 한차례 출렁인다.
괴수가 되살아나서 움직이는건 물론 아니었고, 수없이 많은 충격을 받아 뭉개진 안쪽의 근육과 힘줄이 탄력을 잃고 무너져내리면서 생긴 현상인 것 같았다.
비늘가죽도 특유의 광택은 여전했지만 힘없이 쭈글쭈글하게 구겨진다.
그 서슬에 빈틈없이 맞물려 꽉 차있던 동굴과 괴수 동체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공간이 생겼는데, 사람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새가 나왔다.
“음, 저 안에도 한번 수색을 하긴 해야할텐데.”
그 틈새를 보고 찝찝해진 듯 강 팀장이 팀원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꺼낸다.
이 동굴이 뱀 거대괴수의 둥지라고 간주한다면 안에 다른 괴수가 더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채집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수색을 할 필요는 있었다.
강경호 팀장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팀원들을 바라보다가 윤기정을 지목한다.
“기정아, 올라가서 파워라이트 좀 갖고 내려와라. 자, 주목! 저 안에 들어가서 클리어하고 올 사람? 이 놈이 죽을때까지 두들겨 맞으면서도 더 못 들어간거 보면 꽉 들어찼을테니까 그렇게 깊지는 않을거야. 한 서너명만 갔다와도 충분할 것 같은데.”
“제가 가겠습니다.”
“네가 제일 고생했는데, 좀 쉬고 있지... 뭐, 좋아. 그럼 기정이는 하던대로 지호 마크하고, 음, 민수랑 광현이까지 네 명이서 다녀와라. 혹시 모르니까 기정이가 선두 서고.”
가만히 앉아있기 지루했던 내가 손을 들고 자원하니 강 팀장이 즉시 승낙한다.
그의 말마따나 이 동굴의 주인인 거대괴수가 죽어 나자빠진 이상 위험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놀라운 속도로 로프를 잡고 절벽을 올라가 파워라이트를 들고 다시 내려온 윤기정을 선두에 세운채로 우리 네 명은 몸을 낮추고 어두컴컴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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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괴수의 시체를 밟으면서 걷는 느낌은 썩 좋지 않았지만, 의외로 냄새는 심하지 않았다.
벌써 시체가 부패할거라곤 물론 생각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뱀이 사는 굴이니 안으로 들어갈수록 비린내가 날거라고 여겼는데 의외네.
걸어가는 도중에도 시체는 점점 더 물컹거려서 발이 빠지는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진다.
음, 비늘가죽이 찢어지지 않아서 뭐가 묻어나는건 아니지만 이거 감촉 더러운데.
파워라이트로 전면을 비추며 걷던 우리는 삼, 사십여미터를 나아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눈 앞에 펼쳐진 동굴의 끝을 바라보았다.
최광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제안한다.
“어... 내가 돌아가서 팀장님 데려올게.”
“그,그래. 어서 다녀와. 잠깐만. 사진, 사진은 찍었어? 나 카메라 안 가져왔는데.”
“내가 가져왔어. 그나저나 지원팀 요청해서 무리를 해서라도 시체 다 끄집어 내야겠는데? 우리끼리 사진만 찍어가서 끝낼 일이 아니야, 아무리 봐도.”
저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동굴부터가 내부 표면이 매끈한게 자연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는 의심을 할만하긴 했지만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다면 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거대괴수가 혀를 빼물고 죽어있는 대가리 위로, 석조건물이 떡하니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뱀 괴수의 사이즈를 감안하면 이 동굴은 2,3층 건물이 들어갈만한 높이의 꽤나 규모있는 동굴이었는데, 저 석조건물은 동굴의 끄트머리 한 면을 완전히 차지하고 있었다.
최광현이 보고를 위해 돌아간 사이에 우리는 용감하게도 건물 안을 수색하기로 했다.
석조건물의 입구는 바닥이 아니라 꽤 높은 곳에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만약 1층 높이의 바닥에 있었다면 저 크고 무거운 괴수의 대가리를 치우기 전까지는 입구를 확보할 수 없었을테니까.
가까이 가보니 붙어있는줄 알았던 대가리 끄트머리와 건물 입구 사이에 2미터가 좀 안 되는 거리가 있었다.
윤기정이 먼저 대가리 위에서 훌쩍 점프하여 가볍게 입구 안에 올라선다.
신체능력이 그럭저럭 잘 훈련된 일반인 수준에 지나지 않는 이민수는 괜히 무리해서 뛰어넘으려다 떨어져서 다치느니 얌전히 후방을 경계하기로 했고, 같은 입장이지만 순간이동 스킬이 있는 나는 에테르 쉬프트로 간단히 들어왔다.
“신전...인 것 같지? 페어리들의 문명일까, 아니면 역시 고블린 쪽일까?”
“글쎄요. 제 삼의 문명일지도 모르죠. 솔직히 걔들 생활상을 보면 이만한 규모의 동굴을 파서 지하신전을 건설할만한 역량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고블린들은 지하도시를 건설했잖아. 우리랑 중국 특수군 애들이 다 깨부숴서 그렇지.”
“에이, 솔직히 그게 지하‘도시’라고 표현할만한건 아니었죠. 기껏해야 토굴 수준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생각 외로 진짜일지도 몰라. 공간왜곡 기술이나 버프주는 아티팩트 같은거 봐. 반지 하나 낀다고 신체성능이 올라간다니, 상상이나 했냐?”
그건 그렇지만, 주술 아티팩트 만드는 것과 집 짓고 터널 파는건 완전히 다른 영역이잖아.
우리는 라이트를 비추며 천천히 건물 안을 탐사했다.
돌을 깎아 만든 벽면의 부조는 생각 외로 묘사가 정밀했고 건물도 안쪽으로 꽤나 길었다.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언제든 이능을 발현할 준비를 한 채로 자동권총을 겨누고 조심스레 들어갔는데, 그 조심성이 무색하게도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전 끝에는 돌로 된 제단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봐, 역시 신전이야. 딱 봐도 여기다가 제물을 진설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 같잖아.”
“먼지 쌓인걸로 봐선 오래 되어도 보통 오래된게 아닌가봐요.”
“그런데 보통 이런 신전에는 신상이라던가, 상징물같은게 있어야 하지 않나? 벽에 새겨진 부조를 보면 돌을 조각하는 능력은 충분히 있는 것 같은데.”
“기독교처럼 우상숭배 금지나 뭐 그런 교리가 있는 종교인가보죠 뭐.”
라이트로 이곳저곳을 비추며 감탄하는 윤기정의 옆에서 나는 제단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음, 저거 모양이 뭔가 익숙한데.
아니, 익숙하다기보다는 머릿속 기억을 살금살금 자극하는게, 어디서 본 모양새야.
내가 저걸 어디서 봤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간질이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조금 더 가까이서 봐야겠다는 생각에 제단 앞으로 몇걸음 더 다가간다.
윤기정은 천장에 라이트를 비추면서 천장이 돔 형태로 되어있다고 호들갑이다.
거 어차피 땅 파서 만든 신전인데 천장이 플랫이면 어떻고 돔이면 어떻다고 저러는지 원.
코 앞까지 다가가서 내려다보니 제단 위에는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제단을 어디서 봤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거... 우물인데?”
“뭐?”
“아무것도 아녜요. 제단 위에 새겨진 문양이 예쁘다고요.”
“그러게. 고블린인지 페어린지 아니면 다른 종족인지는 몰라도 미의식이 우리랑 비슷한가봐. 천장에 새겨진 무늬도 화려한데?”
전생의 마지막 순간 하던, 그리고 내 이능의 기반이 되는 바로 그 게임.
기억을 되짚어보니 확실히 그 게임에서 체력과 마력을 회복하고 아이템을 구입하면서 정비를 하던 시작의 우물이 딱 이렇게 생겼다.
잠깐, 그럼...
급히 제단에 손을 올리자 눈 앞에 떠오르는 홀로그램을 보고 나는 속으로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상점창이 내 눈 앞을 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