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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1부 (29/110)



〈 29화 〉1부

페어리 마을을 한바퀴 도는데는 빠른 걸음으로도 삼십여분 이상이 걸렸다.
인구는 수백, 아니 천 단위 이상이  것 같다.
움집 하나에 대여섯 들어간다고 치고 그런 집이 눈어림으로 이백여개 이상은 있었으니까.
원래 저런 형태의 움집은 수변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짓는게 보통인데, 좀 특이하긴 하네.
마을 가운데에 작은 개천이 하나 흐르긴 하는데, 저걸로 마을에 물을 다  수 있을까.
아, 집집마다 작은 텃밭 말고는 대규모로 조성된 경작지가 안 보이는구나.
농사를 거의 안 짓고 수렵채집을 한다면 농업용수가 필요하지 않을테니 저걸로 충분할지도.

“저 다녀왔습니다. 아직 교대시간  됐죠?”


“무슨 교대? 아, 보초? 그거  서기로 했어. 군인 아저씨들이 철저히 경계하고 있으니까 걱정할거 없대. 그보다 저녁 먹어. 이거 맛이 색다른데, 딱 내 취향이더라.”


“예? 아니, 그러고보니까 이건  뭡니까?”

저녁은 당연히 전투식량으로 가져온 레토르트 식품을 까먹을 줄 알았는데 천막 옆에 피워놓은 모닥불 위에는 돌로 된 큼지막한 솥 안에 정체불명의 국이 끓고 있었다.
음, 냄새는 제법 먹음직스러운게 나쁘지 않은데.
 옆에는 꼬치에 꿰여 구워지고 있는 고기와 뿌리채소도 보인다.

“페어리들이 가져다 준거야. 김 대위님이 그러는데 사람이 먹어도 된대. 군인들도 가져온 전식 아끼면서 여기서 대접하는 식사를 자주 먹는다더라. 내 생각엔 전투식량 아낀다기보단 그냥 따뜻한 일상식이 그리워서 핑계대고 먹는  같았지만.”

“처음 먹고 이상 없다는걸 증명한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참 겁도 없고 생각도... 아니, 용감하네요. 얘네들 내장 구조가 어떻게 되어먹은건지도 모르면서...”


“사람하고 대충 비슷하겠지 뭐. 먹고 탈만 안 나면 상관없는거 아냐? 자, 한 입 먹어봐.”

“음? 오, 이거 괜찮네요. 나름 고소하고 은은한 단맛도 있는게.”


“그렇지? 감자하고 비슷하지만 또 다른 묘한 풍미가 있어. 난 돌아갈 때 적당히 챙겨갈 생각이야. 기정이 하는거 보니까 잡동사니로도 얼마든지 살  있을 것 같던데.”


하긴, 장갑차에 간이분석기도 하나 실어왔으니까 알아서 분석하고 이상없으니 먹는거겠지 뭐.
불 가에 앉아  익은 꼬치를 하나 골라들고 후후 불어 식혀서 한 입 베어물었다.
생각해보면 페어리와 인간이 비슷한 형태의 내장의 구조와 유사한 소화체계를 갖고 있어서 서로 식재를 공유할 수 있다는건 여러모로 좋은 소식이다.
앞으로 페어리와 한국, 나아가 인류 사이에 교류가 이어지고 무역이 이루어질텐데, 솔직히 문명의 발달 수준이나 사회규모 면에서 우리 쪽이 압도적이라는 표현도 민망할 정도잖아.
당연히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공간왜곡 결계를 방지할  있는 이들의 주술의식은 확실히 획기적이고 대단하지만,  외에는  뭐가 있을  같지가 않으니까.
움집 짓고 돌도끼로 사냥하고 가락바퀴로 섬유얽는 페어리들의 생활상으로 보아 우리쪽에 딱히 어필할만한 상품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이건 서로에게 좋지 못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식문화라도 서로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소소하게나마 수출길이 열리는거지.
이종족의 식문화라니, 잘만하면 대단한 유행을  수도 있을걸.
뿌리채소와 고기를 한 입에 집어넣고 씹으니 새롭고 꽤나 만족스러운 풍미가  안에 퍼진다.
입을 우물거리며 감탄하다가 나는 마을 안쪽에서 몰려나오는 무리를 발견했다.
물론 적대적인 모양새는 전혀 아니었다.


“어? 저기 페어리들이 또 뭘 갖고 오는데요? 이렇게 자유로이 접촉해도 됩니까?”

“인마, 우리가 무슨 군인도 아니고 그렇게 까다롭게 통제할 필요가 있겠냐. 정작 진짜 군인 아저씨들도 쟤들이랑 말만 안 통하지 서로 안면도 익히고 친해진 모양이던데. 음, 근데 진짜 무슨 일이지? 등짐을 짊어진게 하나, 둘, 어이쿠, 많기도 해라. 승호야, 명진아! 잠깐 나와.”


박우진이 소리치니 텐트 안에서 쉬고 있던 강승호와 채명진이 지퍼를 열고 나온다.
머리가 부스스하고 눈을 비비는걸 보니 이른 시간인데도 숙면을 취하고 있었던  같다.
그들은 어리둥절하며 무슨 일인지 눈치를 살피다가 박우진의 성화에 마지못해 페어리들에게 다가가 짐을 옮기는 것을 거들었다.
잘 쉬고 있는데 괜히 일거리가 생겼으니 짜증은 나겠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둘 다 탱커조인데, 신체강화 이능력자에게 힘 쓰는 일이 어려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승호야,  잠깐 안에 들어가서 라피드 씨를 좀 불러와라. 말이 안 통하니 어쩔 도리가 있나. 아무래도 이 분들이 우리한테 이걸 주려고 이러는 모양인데... 아이고, 더는 필요 없는데. 배가  차기도 했고 많이 먹으면 또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고...”

“금방 갔다올게요.”


“어? 우진이형, 이거 식재료는 아닌데요?”

강승호가 이능을 발현하며 그야말로 바람과 같은 속도로 마을 안쪽으로 달려나가고 혼자서 괴력을 발휘하며  손에 두어짐씩 등짐을 잡아나르던 채명진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말에 박우진이 가까이 집히는 것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풀어보니 과연 그랬다.
모닥불 한켠에 입구가 벌어진 채로 방치된 자루와 달리 그들이 짊어지고 온 자루의 안에 담긴건 뿌리채소와 고깃덩이가 아니라 나무로 된 각종 조각과 악세사리 류였다.
반지나 귀걸이, 목걸이 따위의 조잡한 악세사리가 큼지막한 자루로 몇 짐이나 되었다.

“선물이라기엔  많은데. 이걸 다 어디다 쓰지? 가져가서 팔아도 얼마 안 나올건데.”


“이걸 지구에 가져다가 판다구요? 에이, 누가 사겠어요? 만듦새도 엉성하고 품질도 조악한게, 노점상에서 파는 싸구려 장신구가 훨씬 낫겠네.”

“당연히 스토리를 붙여서 팔아야지. 이계의 신비로운 유물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전반적으로 모양이 길쭉길쭉하네요? 특이하네. 이러면 장식용으로 세워두기에도 불안정하고 여러모로 좋을게 하나도 없을텐데. 페어리들 덩치나 손 크기를 생각하면 더 그렇고.”

“이쪽의 미적 감각이 그런가보죠 뭐.”

지구에 가져가봐야 별로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준다는걸  받기도 그렇고, 괜히 호의를 사양했다가 오해를 받을수도 있고 해서 우리는 자루를 받아 한쪽에 챙겼다.
지금까지의 일로 미루어보면 이들이 손님을 맞는 접대의 관습이라던가 은원에 관한 문화는 우리와 크게 다를게 없어보이지만, 그래도 이종족을 대하는 일이니 뭐든 조심하는게 좋다.
그런데 가장 앞장서서 마을 사람들을 지휘하던 페어리가 우리를 기대에 차서 바라본다.
어... 다 받았는데  안 돌아가지?
혹시 그냥 준다는게 아니라 뭔가 거래를 하자는거였나.
손짓을 하면서 짹짹거리는 소리로 뭔가 지저귀는데 그래봐야 우리가 알아들을수 있을리 없다.
다행히도 마을 중앙으로 갔던 강승호가 금세 통역을 데려왔다.

“아, 저기 라피드 씨 오시네.”


라피드는 도착하자마자 무슨 상황인지를 알아채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글자카드를 꺼낸다.
어설프게 이루어진 통역에 의하면, 이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맞다는  같다.
고맙게  받았으니 이만 들어가 보라고 하자 라피드가 이어서 전하기를 이들은 우리가 여기서 선물을 시험삼아 한번 써보기를 권하고 있다고 한다.

“써본다고? 어... 이거 소모품이야? 혹시 먹는건가? 아무리 봐도 조각상인데.”

“가만있어봐. 라피드, 어떻게 쓰는건지부터 알려줘야지. 음, 그러니까...”

라피드는 시범을 보여주겠다면서 자루에서 가로세로는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길이는 두 뼘이 조금 안 되는 크기의 조각상을 꺼내들고 양 손으로 잡더니 그대로 부러뜨린다.


“뭐, 뭐야? 가연성 물질이었어?”

“부러뜨리는 정도로 불이 붙을 리가... 잠깐, 라피드, 안 뜨거워요? 이건 대체...”

나무조각은  분질러지기 무섭게 보랏빛의 불이 붙는가 싶더니 절단면에서부터 확 타오른다.
우리가 크게 놀라 뒤로 나자빠지며 경호성을 내지르니 라피드는 짹짹거리며 웃었다.
타오르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서 눈 한두번 깜빡할 사이에 조각상은 모두 불타없어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보랏빛의 불꽃 사이에 안개와 같은 흔적이 남아있는게 아닌가.
불꽃이 모두 사그라들기 전에  연기같은 미세한 입자는 라피드의 손으로 모여 깃든다.
우리는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으로 이 신비로운 현상을  없이 지켜보았다.
물론 사람들이 이능력을 각성해서 아무것도 없는 맨 허공에 불꽃을 날리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톤 단위의 근력을 내기도 하는 세상에서 이만한 일을 가지고 특이하다고 할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페어리들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지나치게 얕보고 있었나보다.

“응? 뭐라고? 아, 잠깐만. 버프? 아니, 라피드 씨. 그런 용어는 또 어디서 배웠어요?”


“보나마나 사장님이겠지. 아직 일상회화도 어색한데 게임용어부터 가르치시다니.”


박우진이 투덜거리면서 라피드가 늘어놓는 글자카드를 주의깊게 읽었다.
라피드의 말에 의하면  나무조각들은 모두 일종의 성물이었는데, 페어리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고 지혜가 깊은 노인들이 사흘 밤낮을 기도하여 만들어낸다고 한다.
방금처럼 부수면 부순 자의 몸에 스며들어 무려 반나절동안 팔다리에 힘을 더하고 심폐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상처를  빨리 낫게 하고 가벼운 독까지 해독한단다.
뭐야 그게, 만병통치약인가?
과장이 적잖이 섞였을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보물도 보통 보물이 아니다.

“여기 악세사리들도 부숴서 사용하는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래. 일회용으로 소비하는 성물보다 악세사리로 된 성물들의 효과가 비교할 수도 없이 미약하지만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는 것 같아. 음, 들어보니까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방문한 이종족 손님들을 위해 선물하자고 장로들이 합의했다는데?”

“잠깐만요. 그럼 이것들, 이 마을에서 앞으로도 생산할 수 있다는거죠? 와, 그럼 이건...”


“대박이지. 큭큭큭, 세상에 일이 풀려도 이렇게 풀릴수가 있나. 중국 놈들은 우리보다 한참을 앞서서 얘들을 발견한 것 같은데, 그 놈들은 황금을 버리고 구리를 선택한거야. 어떻게 고블린들을 도와서 이 대단하신 분들을 노략질할 생각을 했지?”


뭐, 냉정히 따지자면 공간왜곡결계만 보고 눈이 돌아갔어도 이상할게 없겠지만.
박우진뿐만 아니라 방금의 현상을 목격한 세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혀를 내둘렀다.
내가 아까 페어리들이 문명수준이 낮아서 일방적인 시혜를 받을거라고 생각했었던가?
섣부르고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처음 요정의 숲에서 고블린들의 공간왜곡 결계에 손도 못 쓰고 당해 무력하게 허우적댈  이미 이들이 이룩한 문명이 우리와 방향성이 조금 다를지언정 절대로 얕봐도 될만한게 아니라는걸 짐작했어야 하는데, 겉모습때문인지 은연중에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루에서 반지 하나를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페어리들과의 체구 차이가 있어서 검지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새끼손가락에는 아쉬운대로 빡빡하게나마 들어갔는데, 반지와 살이 맞닿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올라온다.
효과가 미미하다고 했지만 분명히 끼자마자 체감이 된다.
적어도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라 진짜로 뭔가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확신할 정도는 되었다.
신기하다는 듯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나는 자루를 슥 들춰보았다.
크기도 작아서 이 자루 안에 든게 어림잡아 수백여 개는 되어보이는데.
이들이 그동안 모아온 물량을 한번에 선물로 넘겼다고 치더라도 절대로 적은 양이 아니다.

“무역 역조는 개뿔... 다들  싸들고 와서 내 돈 가져가라고 난리를 치겠는걸?”
“그러게 말이다. 후아, 갑자기 이런게 튀어나올줄 누가 알았겠냐. 여기 군인아저씨들도 그동안 모르고 있던걸 보면 꽁꽁 감춰두고 있던 비밀인 모양인데...”


“공교롭게 타이밍이 맞았나보죠. 아까 보니까 여기 왕이 꽤나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는 것 같던데, 라피드가 장로회의 운운하는걸 보면 그 강력한 왕도 자기 마음대로는 결정 못 할 사안인가봐요. 뭐, 얘들 내부사정이야 어떻든 우린 물건 받아가면 좋은거 아닙니까.”


“일단 팀장님한테 보고부터 하자. 이거 가벼운 일이 아니야.”


잠시 후, 대강의 사정을 연락받고 허겁지겁 달려온 강경호 팀장도 직접 조각상 하나를 부러뜨려 효과를 시험해보더니 입이 귀에 걸리면서 탄성을 내지른다.
그는 곧바로 쉬고 있던 팀원들을 전원 소집했고, 간단한 설명에 이은 격론이 벌어졌다.
모두들 지금껏 없었던 개념의 이 신상품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고평가했지만, 곧바로 기지로 복귀하여 본사에 보고하고 교역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과 우선 페어리들과 관계를 쌓는게 목적이니 의뢰받은 괴수토벌부터 성실히 수행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맞선 것이다.
약 한 시간에 걸친 논의 끝에 절충안이 나왔다.
의견을 조율하던 강경호 팀장이 결론을 내리고 지시한다.


“그럼 수호 의견대로 공격조에서 두 명을 빼는걸로 하자. 거대괴수가 얼마나 튼튼할지는 모르겠지만 지호가 있으니까 화력이 부족하진 않을거야. 단 둘이서 돌아가는건 불가능하니까 여기 주둔하는 군인아저씨들이 교대할 때 끼어서 함께 가는걸로 하고.”

“둘이서  짐을 다 들 수 있을까요?”

“장갑차 한 대 딸려보내야지. 어차피 보급은  마을에서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으니까 탄약만 옮겨 실으면 돼. 돌아갈 때 군인들 앞에서 입 조심하는거 잊지 말고. 뭐, 어차피 이만한 사업을 벌이려면 이능부에 보고하고 협조를 받아야겠지만 위쪽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아직 모르는거니까. 우리 월급은 나라가 아니라 회사에서 주는거잖냐.”


공격조에서 이능의 화력이 약한 순으로 차출된 두 명이  한 대를 지키면서 머물다가 군인들이 교대하는 행렬에 끼어서 지구로 복귀하기로 의견이 모인다.
우리는 페어리들이 가져온 자루를 단단히 여며 장갑차 한 대에 몰아서 적재했다.
물론 이번 사냥에 유용하게 쓰일까 해서 각자 두어개씩 챙기는 것은 다들  본체 하더라.
나도 목걸이 하나와 반지 하나, 조각품 세 개를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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