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1부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쳐진 철조망과 군데군데 위장막으로 덮어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지나는동안 장갑차 안에서는 길이 너무 좁다는 운전자의 불평이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방어를 위해 임시로 설치한 외곽지역을 지나 마을 중심부로 진입하니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움막 형태의 집이 여러채 늘어서 있는게 보였다.
페어리들은 고블린과 달리 동굴생활이 아닌 움막 생활을 하는 것 같다.
마을 안으로 우리를 안내하던 지휘관이 설명했다.
“그동안 손짓발짓 다 해가며 의사소통을 하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더군요. 이들은 우리와 언어체계만 다른 외국인이 아니라 아예 종족부터가 다르지 않습니까? 혹여 쓸데없는 오해가 생길까 싶어서 접촉도 최소한으로 하고 방어만 굳히고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희가 도움이 될 수 있겠군요. 여기 라피드 씨는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우리 말을 알아듣고 글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일단 고블린들에게 잡혀간 포로들을 송환한 덕인지 우호적이긴 한데... 그러고보니 그 포로들을 구조한게 바로 여러분이죠? 아, 다 왔습니다.”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궁전’의 모습에 눈을 끔뻑거리며 침을 삼켰다.
아니, 조화가 깨져도 정도가 있지, 나뭇가지랑 마른 풀 모아다가 움집 짓고 사는 마을에 갑자기 돌로 쌓은 궁전이라니, 이게 말이 되나?
음, 다시 보니 주변과 워낙 괴리되어 궁전처럼 보였을뿐 평범한 석조 단층저택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말이 안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지휘관, 아마 5군사 1팀장일 군인이 쓴웃음을 짓는다.
“얘들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힘도 그럭저럭 센 편이고, 돌 날라다가 이 정도 쌓을 수준은 충분히 됩니다. 안에서 왕을 만나면 표정 조심하시구요.”
“왕이요? 얘들 왕도 있습니까?”
“부족장이라고 하기엔 다른 페어리들이 보이는 공경심이라고 할까, 태도가 너무 공손하거든요. 아시다시피 농경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사회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신분제도 형성되지 않는다는게 정설이잖아요? 근데 얘들은 좀 다른가봅니다.”
그야 이 석조저택만 봐도 페어리들이 경직된 신분제 사회라는 것쯤은 간단히 알 수 있다.
이걸 쌓을 노력으로 차라리 마을 외곽에다 얕은 돌담이라도 두르고 엉성한 초소라도 지었다면 고블린의 노략질에 형편없이 당하지는 않았을테니까.
지휘관은 입구에 달린 나무로 된 관악기 비스무리한 것에 입을 대고 힘차게 불었다.
그러자 저택에서 키가 작은 페어리가 나오더니, 지휘관의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우리 일행을 둘러보다가 라피드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짹짹거리며 말을 건다.
라피드가 허리를 반으로 접다시피 하면서 공손히 뭐라고 고해바치니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 녀석은 아무리 잘 쳐줘도 왕이 아니라 문지기나 시종 정도 아닌가.
그 자연스럽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니 왕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알만 했다.
그 위세에 비하면 왕궁(?)의 경비나 보안 수준이 기술 레벨을 고려해도 심각하게 형편없었지만, 그거야 뭐 평화로운 종족이라서 그렇다고 봐줄 수 있겠지.
대화를 마친 문지기가 사뭇 당당한 동작으로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들어간다.
“자, 따라서 들어갑시다.”
고개를 숙여 낮은 문을 넘어가니 창과 도끼 등을 든 병사들이 예닐곱이나 서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긴장이라거나 불안같은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제법 널찍하고 크긴 했지만 그래봐야 원시인 수준의 무장들인걸.
제아무리 날카롭게 갈았다고 한들 돌과 나무로 된 무기를 들고 있으니 우습게 보일 수밖에.
높다란 단상 위에 올려진 의자에는 약간 덩치가 큰 페어리가 하나 앉아있었다.
“오,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공손한 태도라니, 표현이 좀 부족했네요. 큭큭큭.”
옥좌에 앉은 페어리 앞으로 달려나가 철퍽 소리가 날 정도의 기세로 엎드리는 라피드를 보면서 박우진이 신기하다는 듯 웃었다.
그 말에 동의하며 다들 웃음기를 보이긴 했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다.
그는 어쨌든 우리 회사에서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대접을 해주는 인사인데 저렇게 온 몽을 내던져가며 예를 표하는게 뭐라고 할까, 우리까지 싸잡아 낮아지는 느낌?
어쩌면 말은 안 통해도 함께 사선을 넘고 여행을 하며 정이 든걸지도 모른다.
문화상대주의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일인건 알지만 입맛이 쓴건 어쩔 수 없다.
“어, 설마 우리한테도 저렇게 절을 하라고 하진 않겠지?”
“에이, 그러진 않을거예요. 봐요. 저 군인아저씨도 그냥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잖아요.”
“하하하, 그 문제는 이미 다 매듭을 지었습니다. 저 친구들도 그렇게까지 꽉 믹힌 친구들은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그럴 처지가 아니잖습니까? 이런 말 하긴 좀 뭣합니다만 힘의 우위가 더없이 명확한 상황인데.”
하긴, 국가체계가 잡히지 않은 원시국가일수록 왕이 멍청할 확률은 더 낮은 법이다.
고블린들과의 세력다툼에서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우린 하늘에서 내려온 동앗줄로 보이겠지.
페어리 왕은 라피드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우리에게 근엄하게 몇 마디를 건넸다.
표정에 비해 여전히 높게 지저귀는 목소리 때문에 전혀 근엄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라피드가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강경호 팀장에게 다가와 한글카드를 꺼낸다.
“수호하고 우진이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서 밥이라도 까먹으면서 쉬고 있어. 괜히 주민들한테 민폐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아, 저기, 뭐라고 부르면 될지...”
“그냥 김 대위라고만 부르십쇼.”
“여기 김 대위님 통제에 따라서 도와드릴 일 있으면 도와드리고. 알겠지?”
그렇게 우리는 ‘알현’을 끝내고 궁전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보니 제법 그럴듯한 석조 저택과 대비되는 움집들과 엉성하게 갈린 텃밭들, 한쪽에 모아 묻어놓은 토기들과 불을 피워놓은 돌화덕이 눈에 띈다.
여기서 뭐 민폐를 끼칠만한 일이 있기는 있겠는가 싶다.
“아으, 빨리 용건 끝내고 집에 돌아갔으면 좋겠다. 이번 원정은 사냥원정도 아니라서 전리품 얻어갈 것도 없잖아. 보너스 나와봐야 몇 푼이나 나오겠어?”
“그래도 우리가 처음 시작한 일이나 다름없는데, 좋게 마무리 지어야죠.”
“인마, 우리가 일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냐? 어쩌다보니 휘말린거지. 음, 여기 사는 페어리들 말인데, 뭔가 지구에 가져가면 돈이 될만한 것들을 갖고 있지 않을까? 내가 뭐 훔치거나 약탈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물물교환을 할 수도 있잖아.”
그러면서 꺼내는걸 보니 유리구슬과 금속메달, 라이터 따위의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다.
무슨 생각으로 챙겨왔는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어처구니가 없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윤기정은 탱커조장의 허가를 얻고 마을을 헤집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뭐, 마음대로 해보라지.
나는 장갑차에 결속된 군장에서 레토르트 식품과 가열팩을 하나씩 꺼내 그늘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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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은 꽤나 오래 진행되어 해질녘까지 이어졌다.
논의할 일이 많았다기 보다는 통역과정이 수월치 않아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글카드로 어설프게 단어와 문장을 만드는 라피드와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걸 해석하느라 골머리를 앓았을 강 팀장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오닉스 3팀, 집합. 전달사항이 있다. 야, 윤기정이. 넌 그거 다 뭐야? 내가 주민들한테 민폐끼치지 말라고 말 안 했냐? 돈 너무 많아서 감봉이 고픈거야 뭐야.”
“민폐라뇨. 이거 뺏은거 아닙니다. 돈 주고 산거라구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얘들이 한국 돈을 받는다고?”
“유리구슬을 보여주니까 갖고 싶어서 아주 환장을 하던데요. 아, 라이터랑 성냥도 몇 개 팔았는데 그건 단순히 갖고 싶어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팀장님이 보셨어야 하는데.”
“이 자식, 그 짧은 사이에 여기서 이세계물 놀이를 하고 앉아있었네. 너 인마, 그거 장갑차에 적재할 생각하지 말고 네가 다 들고 다녀 새끼야. 크흠. 자, 다들 주목해라.”
약초로 보이는 마른 풀 뭉치와 가락바퀴같은걸로 얼기설기 짠 듯한 섬유, 씨앗과 과일, 동물 뼈로 만든 공예품 등을 한아름 안고 있던 윤기정의 입이 시무룩해져서 댓발이나 튀어나온다.
저걸 다 가져다가 어디다 쓰려고 저러는지 원.
“우선 우리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달성했다. 페어리 왕은 고블린의 공간왜곡결계를 무효화하는 비의를 공유하는데 동의했어. 다만 추가로 우리에게 제의한 일이 한가지 있다.”
“고블린 토벌인가요? 그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물론 고블린 토벌도 있지만 그건 군에서 알아서 맡아 해준다고 했으니 우리가 신경쓰지 않아도 돼. 왕이 요구한건 괴수퇴치와 광산수복이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페어리들의 주술에 쓰이는 광물이 나오는 광산이 있는데, 몇 년 전부터 거기 거대괴수가 한 마리 들어앉았다고 해. 그 놈을 사냥하고 광산을 수복하라는 의뢰다.”
요정의 숲은 뉴콜롬버스 반도의 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숲이라서, 북쪽은 바다로 이어진다.
이 페어리 마을부터가 상당히 북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여기서 더 북쪽이라.
광산의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그리 멀지는 않겠네.
아니, 잠깐, 그보다, 광산?
“광물이요? 여기 병사들 보니까 금속은 안 쓰는 모양이던데.”
“무기로 쓸만한 철이나 구리가 아니라 귀금속 광산인 것 같아. 주술의 촉매로 쓰인다거나 뭐, 대충 그런거겠지. 어디다 쓰는지는 우리 알 바가 아니고, 문제는 그 거대괴수다. 묘사를 들어보니 아직 데이터가 없는 미발견 거대괴수인 것 같아.”
“간단하네요. 지호보고 방어막 썰라고 하고 기관총 갈기죠. 제깟놈이 별 수 있겠어요?”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거 아닙니까?”
“내 생각도 같아. 방어막만 상쇄한다면 거대괴수든 뭐든 화력 앞에 다 녹아나기 마련이지. 하지만 지호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방어막을 빠르게 상쇄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미발견 괴수이니만큼 방어막이 상상 이상으로 튼튼할 확률도 간과할 수 없어.”
그래서 팀원들과 상의하기 위해 확답을 하지 않고 나왔다는거구만.
예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는 팀장이 리더십을 발휘하여 독단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지휘를 하는 것이 효율적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한 시를 다투는 상황이 아니니까 되도록 모두의 의견을 취합하여 결정하는 것이 맞다.
팀장의 신중한 태도와 달리 이어진 토론은 일방적인 분위기로 흘렀다.
미지의 구역을 탐험한다는 것은 언제나 리스크를 동반하지만, 페어리 부족에서 안내자도 따로 붙여주는데다 내 이능의 화력을 생각하면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는데 의견이 모였다.
당사자인 나도 의뢰를 받아들여 출정하자는 쪽에 목소리를 보탰다.
얼마나 크기가 크고 방어력이 높을지는 몰라도 에테르 블레이드 한 방, 설령 한 방으로 부족하더라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테니까.
경력이 없다시피한 막내였지만 내 발언력은 다른 선배들 못지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거대괴수를 잡을 계획의 핵심이 내 이능의 화력이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지금 라피드에게 가서 일을 맡겠다고 전하지.”
“그런데 팀장님, 공간왜곡결계를 부수는 비결이라는게 대단한건 알겠지만 우리가 페어리들에게 해준 일도 작지 않은데, 너무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뭔가 오해를 했나보군. 말했다시피 왕은 이미 비의를 공유하는데 동의했다. 여기 주둔한 특수군이 그걸 접수하고 고블린 잔당 토벌을 마무리할거야. 거대괴수 토벌은 어디까지나 추가의뢰지. 그 대가로 인근의 지도와 교역 독점권을 받기로 했거든.”
“교역 독점이라고 해봐야... 이 마을에서 돈 될만한게 뭐 있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다들 동의했으니 내일 아침 출발하는걸로 일정을 잡지.”
해산을 지시한 강경호 팀장은 통보를 위해 다시 석조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장갑차에서 천막을 꺼내 공터에 임시로 텐트를 쳤다.
빈 집을 달라고 하면 마련해 주겠지만 고생고생하며 말을 전하기도 귀찮고 무엇보다 저런 움집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천막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윤기정이 팀장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잔뜩 사들인 짐을 남은 적재공간에 실어달라고 운전수와 실랑이를 벌이는동안 나는 마을을 한바퀴 돌아볼 심산으로 산책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