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1부
은신기능이 형체를 투명하게 해주는 것 이외에 소리나 기척도 죽여줄 것이라는 예상은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설령 발소리가 그대로 나더라도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저 놈들이 그 정도 소리에 반응하여 투명인간을 예측할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예상대로 나는 아무런 제지없이 적들의 코 앞에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이따금 위협사격만을 날리면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지휘관인듯한 인물 두 명이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눈치로 봐선 이 놈들도 우리의 출현에 상당히 당황한 것 같았다.
뭐, 적의 사정이야 내 알 바가 아니지.
나는 홀스터에서 아까 받은 자동권총을 꺼내 조정간을 격발로 놓고 심호흡했다.
다들 방탄복을 걸치고 있으니 확실히 제압하려면 얼굴을 쏘아야 하는데, 심리적 부담감은 제쳐두고서라도 마구잡이로 난사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에테르 칼날까지 동원하는 수밖에.
각도가 이 정도면, 아, 조금 더 비트는게 좋겠네.
에테르 칼날을 최대한 크게 뽑아 날리는 것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긴다.
타타타탕!
에테르 칼날이 일직선으로 십여미터를 날아가며 궤적 안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잘라버리고 권총의 총구 앞에 있던 꽤 준수한 얼굴이 알아보기도 힘들 지경으로 으스러진다.
뭐야, 난 한 번 당겼는데, 이거 권총이 무슨 기관총처럼 연발로 나가?
살아남은 놈들은 갑자기 멀쩡하던 상관의 얼굴이 벌집이 되고 동료들이 두 쪽으로 잘려나가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신은 아마 풀렸겠지.
과연 놈들의 눈이 반사적으로 허공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일 나를 향한다.
상황을 파악하고 총구를 들어올리기 전에 에테르 쉬프트.
미처 베어내지 못한 무리가 뭉쳐있는 쪽으로 순간이동하며 이번에는 대충 지향사격으로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 요란한 총성이 들리고 철컥, 노리쇠가 후퇴고정된다.
아니, 딱 두 번 방아쇠를 당겼는데 열 다섯발짜리 탄창을 다 비웠다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긴 한데, 다행히 변수는 없었다.
날 겨눈 라이플에서 권총 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굉음이 들리며 총알이 날아오는건 유쾌한 경험이 아니지만, 다행히 2초 동안은 에테르 쉬프트의 주문력 계수 보호막이 있거든.
주문력이 사실상 무한이므로 이 보호막도 2초동안은 절대 뚫리지 않는다.
분명히 몸에 맞았는데도 튕겨나가는 총알에 놈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보호막이 사라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 새 쿨타임이 다 돌아온 에테르 칼날을 한번 더.
조끼 사이에 끼운 금속제 플레이트 따위는 아무 저항도 되지 않는다는 듯 긋고 지나가는 칼날에 이번에도 사람의 몸이 고깃덩이가 되어 무너져내린다.
단 두 번의 칼질에 스무명의 훈련된 군인이 고혼이 된 것이다.
권총의 경우 두 번째로 흩뿌린 난사는 별다른 데미지를 주지 못하고 방탄복에 막힌 것 같았지만, 산개하지 않고 분대별로 옹기종기 모여있던게 치명적이었다.
첫 공격에 쓸려나간 십여명의 사체를 보고 재빠르게 반응을 했는지 개중 한 녀석이 몸을 낮추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칼날의 높이가 너무 애매했다.
허리께와 복부를 기준으로 썰려나간 다른 동료들과 달리 경동맥이 반쯤 잘려 피가 솟구치는 목을 부여잡은 그는 꺽꺽거리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푹 스러져 죽었다.
나는 그제야 차오르는 욕지기를 더 이상 억누르지 않고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게워냈다.
충분히 익숙해져 있다고 여겼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대상이 고블린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이 조각나서 안에 있는 것들을 쏟아내는 광경을 보니 이건 뭐,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할 짓이 못 되는 것이다.
“최지호! 너 인마, 이게 무슨...”
“우욱. 후우, 죽겠네 그냥. 아,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뭔가 새로운걸 각성할 느낌이 살살 왔다고. 아무튼, 다 잘 된거죠? 사상자 없이 모두 제압했으니까.”
“그게... 휴우, 나중에 복귀하면 다시 이야기하자.”
뒤늦에 달려온 팀원들이 경악해서 멀거니 목불인견의 참상을 바라본다.
다만 다들 놀랐을뿐 나처럼 구역질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젠장, 뭐 이리 비위들이 좋아? 나만 쪽팔리게.
그나저나 훈련소에서 날 오닉스로 스카웃했던 스카우터의 감언이설에 의하면 헌터는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고 했는데, 모조리 사기였던게 분명하다.
이대로라면 원정 서너번을 다녀오기도 전에 목숨이 남아나지 않겠어.
“팀장님, 신분증이나 기타 신분을 추측할만한 유류품은 없습니다. 하지만 뭐...”
“그래, 뻔하지. 설마 민간 헌터팀이 이런 복장을 하고 들어와 있겠어? 보나마나 중국에서 단물 빨 거 다 빨고서 우리에게 들키니까 증거인멸을 위해 벌인 짓이야.”
“그럼 놈들이 이미 공간왜곡 기술을 입수했다는거 아닙니까? 미련없이 폭파한걸 보면.”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면 단순히 계산해보고 손절을 친 걸수도 있고.”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실 문제가 아닌데요.”
낙관적으로 보면 한국이 낌새를 느꼈으니 괜히 교류를 이어가서 국제사회에서 입장이 곤란해질만한 꼬투리를 잡히느니 깔끔하게 손절을 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폭파를 지시했을수도 있다.
얼마나 오래 교류를 했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방금 겪은 폭발의 규모로 봐선 핵이라도 터뜨린게 아닌 이상에야 상당한 양의 폭발물이 필요했을테니 관계가 제법 깊었으리라.
그러나 동시에, 비관적으로 보면 원하던 기술을 이미 얻었을 가능성도 크다.
솔직히 이 석기시대 수준의 부족민들에게 바랄게 뭐가 있겠는가, 공간왜곡기술 하나뿐이지.
주술의식을 베껴갔을수도 있고 어떤 성물같은걸 가져가서 분석을 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공간을 왜곡해서 일정 구역을 차단하는 기술을 중국이 얻었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보통 문제가 아니니까 민간기업인 우리 오닉스 팀이 정부의 요구에 적극 협조하여 선발대의 역할을 맡아 여기까지 들어온게 아니겠는가.
수심에 가득찬 얼굴로 중얼거리는 박우진에게 강경호 팀장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왜 우리가 걱정하냐?”
“예?”
“우린 할 거 다 했다. 안 그래? 나머지는 나라에서 어떻게든 대처하겠지. 중국하고 외교적으로 짝짜꿍을 해서 떡 한조각이라도 받아오건 국제사회에 공표를 해서 망신을 주건. 이번 협력임무 수행으로 본사에서 얻어가는게 꽤 될텐데, 보너스는 안 나올지 모르겠네.”
무너진 토굴 사이에서 살아남은 고블린들이 간간히 기어나왔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 놈들도 우리에게 뭔가 적대적 행위를 할 기력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처참하게 널부러진 중국군 특수부대로 추정되는 헌터들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암만 생각해도 국가에 취직해선 좋은 꼴 보기 힘들지.
이들의 희생은 덧없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마이너스가 될 예정이다.
확실한 증거가 될테니까.
이 시체들을 갖다준다고 우리나라 정부에서 중국을 상대로 압박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강 팀장의 말대로 그건 어디까지나 나랏일이니 내 소관이 아니다.
“저 무너진 굴을 파본다고 뭐가 더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이만 돌아가자고.”
“팀장님, 다음 원정은 절대 이 쪽으로 오지 맙시다.”
“저도 앞으로 요정의 숲 쪽으로는 오줌도 싸지 않을겁니다.”
부족민들을 모조리 잃고 겨우 여섯 남은 페어리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거 참, 얘들은 진짜 불쌍하게 됐구만.
결국 페어리들과의 교류는 물 건너 간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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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시체들을 주워담은 바디백 스무개가 장갑차 짐칸에서 끌려나온다.
그걸 바라보면서 한국 전진기지의 수뇌부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강 팀장의 설명을 들었다.
사후 보고를 위해 남아야 하는 팀장과 달리 우리에겐 곧바로 해산명령이 떨어진다.
이번에도 역시 팀 선배들의 관심은 온전히 내게 쏟아졌다.
첫 원정에서 에테르 쉬프트, 그리고 두 번째 원정에서 에테르 폼.
어째 한번 기지 밖으로 나갔다 올 때마다 하나씩 이능을 더 각성해서 오는 꼴이 되어버렸다.
앞으로는 더 레벨업을 해도 궁극스킬을 배우는 10레벨 전까지는 기존의 스킬이 강화될 뿐 새로운 스킬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는 없잖아.
윤기정은 ‘이 녀석은 생명의 위기가 닥쳐오면 새로 각성하는 스타일이다’라고 주장하며 날 묶어놓고 살짝 빗나가게 총을 쏴보자는 헛소리를 하다가 몇 대 얻어맞고 입을 다문다.
아무래도 붕괴하는 토굴에서 탈출할 때 혼자 나갔던 원한이 작지 않은가보다.
“진짜 장난 아닌데? 중국 놈들 말이야. 물렁한 놈들을 거기까지 보내진 않았을거 아니냐?”
“그렇죠. 그쪽 각성자 특수부대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지만 당연히 최정예 팀을 보냈겠죠.”
“근데 그런 최정예 분대 두 개, 스무명을 우리 지호가 순식간에 싹 다 잡았다는거잖아.”
“에이, 그게 어디 단순비교가 되는건가요. 어디까지나 기습이었는데요 뭘. 아시잖아요, 역량하고 별개로 막상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허무하게 당할때도 많은거.”
“내가 사람 몸 연약한거 몰라서 그러냐? 그래도 네 이능이 대단하다는 사실엔 변함없어. 크으, 벌써 몇 개째냐? 세 개지? 야, 그거 한번 더 해봐라. 응?”
“하, 참.”
술이 얼근히 취한 박우진 조장의 강권에 나는 못 이기는 척 에테르 폼을 발현한다.
투명인간이 되는건 벌써 여러번 해봤지만 여전히 신기한 감각이다.
게다가 이건 입고 있는 옷과 손에 든 장비까지 동시에 투명하게 만들어주잖아.
대체 원리가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애초에 이능력을 과학으로 분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는 아무 성과가 없지만.
“여기 있는거지? 그렇지, 찾았다. 하하하, 앗 차거. 이거 뭐야?”
“뭐긴요, 맥주잔이죠.”
“오오, 진짜 신기해. 허공에서 나타나는 것 같단 말이지. 내가 이런걸 예전에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뭐냐...”
뻔히 눈 앞에서 은신을 했는데 거기에 손을 뻗어 건드려서 해제시켜놓고는 찾았다라니.
아까부터 술이 좀 많이 들어간다 싶더니 슬슬 주정의 영역으로 넘어가는건가.
그런데 오늘은 나도 권하는 술을 딱히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괴수를 사냥하는건 물론이고, 지성이 있는게 명백한 고블린들을 썰어제낄때도 좀 비위가 상한다 싶을 뿐이지 별다른 감정은 없었는데 말이야.
아무리 목숨이 걸린 전투라고 해도 외국 군인을 죽이고 나니 뒷맛이 영 찝찝하다.
아니 뭐, 그렇다고 후회를 한다거나 하는건 당연히 아니지만...
여러모로 복잡한 내 심정을 짐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팀 선배들은 나를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고 몇 번씩이나 투명화를 요구하면서 신기하다고 난리다.
가만히 앉아서 깊게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한둘은 피곤하다고 먼저 숙소로 돌아갈만도 한데 아무도 자리를 안 뜨네.
여기 물가를 고려하면 수백만원, 아니 어쩌면 천만원 단위의 돈이 나갈지도 모를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강경호 팀장과 최종수 보급관이 가게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래, 저녁 맛있게들 먹고 있냐? 다 먹고 올라가면 짐부터 싸라. 내일 아침 일찍 게이트 넘을거니까. 집에 가자.”
이야아, 하는 환호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온다.
첫 원정에서부터 온갖 매운맛 쓴맛을 다 봐서 그런지 엄마 얼굴이 보고 싶다.
소주가 절반이나 섞인 맥주잔을 높이 들고 환호하던 나는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데자뷰인가, 이런걸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전쟁영화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병사들의 반응이 딱 이랬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민간 헌터고 이건 단순히 장기원정, 아, 장기도 아닌가. 며칠 안 됐네 그러고보니.
아무튼 게이트를 넘어올땐 참 들뜨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넘었던 것 같은데.
난 괴수를 사냥하러 왔단 말이야, 중국군하고 싸워서 훈장을 받는게 아니라.
왜 억지로 끌려와서 죽을 고비란 고비는 다 넘기고 간신히 제대와 귀향을 허락받은 참전용사같은 기분을 느껴야 하는거지? 이거 뭔가 되게 억울한데.
헌터가 하는 일이 원래 이런거면 각성자들이 미쳤다고 헌터가 되려고 하겠어?
아니, 돈 되는 대신 좀 위험한건 나도 알긴 알았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기억은 모호했다.
내 첫 번째 외계원정은 그렇게 머리가 깨질듯한 숙취와 함께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