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1부
사냥을 위해 떠난 원정이 아니었으므로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하지 않고 파악된 괴수의 서식지들을 피해 전속력으로 달린 우리는, 겨우 두어시간만에 요정의 숲에 다다랐다.
튼튼한 궤도를 이용해 험지돌파 능력이 탁월한 장갑차가 엔진을 터질 듯이 혹사하면서 속도를 낸 결과였는데, 한나절 거리를 두시간 반으로 단축시켰으니 그야말로 기록적인 행군속도다.
“으어... 죽는줄 알았네...”
“잘 참았어. 급속행군은 처음 해보지? 비닐봉지도 다 준비했는데 용케 구토는 안 했네. 하핫.”
“저 좁은 차 안에서 게워내면 그게 무슨 민폡니까? 이 악물고 참았지. 어이구, 죽겠네 아주.”
안 그래도 승차감에는 최소한의 배려라도 했는지 의심되는 종류의 전투차량이 작정하고 최고속도를 뽑아내니 안에 탄 사람은 소음에 흔들림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처음 급속행군을 할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라는 말에는 코웃음쳤는데, 이거 장난 아니네.
솔직히 내가 전생에 군대 다 갔다오고 행군도 여러번 하고 했으니까 수십킬로그램짜리 군장메고 밤새 걷는 것에 비하면 좀 불편한 차 안에 실려서 몇 시간 달리는게 누가 봐도 휴식이지 행군은 무슨 행군이냐 하는 생각이 안 들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 걱정말라고 큰소리를 쳐놓고 멀미에 시달려 끙끙댔으니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다.
“찍찍! 째액!”
“알았어, 알았어.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겠네. 어서 가자구.”
“이 친구가 지호를 제일 잘 따르는 것 같은데? 얼마전엔 무서워서 접근도 못 하더니.”
“자기네 마을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거 아니겠어요? 지호가 제일 임팩트가 커서 무서워하던 거잖아요. 지금 우리가 도와주러 가고 있다는건 알고 있을테니까. 지호야, 페어리 마을에선 어쩌면 네가 대장이라고 여길 수도 있어. 큭큭큭.”
자원하여 우리와 동행한 페어리는 숲 입구에서 잠깐 지체하는 시간도 아까운지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자고 성화다.
그는 한글단어 카드 몇 개를 가지고 그걸 조합해서 간단한 의사표시를 할 줄 알았다.
아직 제대로 된 문장을 구성하는건 무리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천재라고 할만하다.
성대구조가 완전히 다르니 말을 하는건 불가능하겠지만 약간의 노력만 거치면 필담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니 이들이 우리와 동등한 지성체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성역을 복구하기 바쁠 고블린 놈들이 벌써 대대적인 제물사냥에 나섰을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그래도 너무 느긋하게 생각하지들 마라. 어쨌든 전투는 피하기 힘들테니까.”
강경호 팀장이 웃으며 나를 놀리는 팀원들에게 가볍게 주의를 주고 행군을 지시한다.
최고속도로 달리느라 고생을 하긴 했어도 그래도 여기까진 차를 타고 왔는데, 이제 요정의 숲 안으로 진입하면 꼼짝없이 차에서 내려 사주경계를 하면서 걸어야 한다.
장갑차를 숲 외곽에 세워두고 갈까 하는 의견이 나왔지만 기각되었다.
전투가 벌어질 경우 차량지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꽤 크니까 기도비닉을 일부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되는데까진 끌고 가야겠다는게 팀장의 결정이었다.
실더가 둘이나 보디가드로 붙는 호사를 누리며 선두에서 길을 안내하는 페어리의 인도에 따라 꽤나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를 얼마나 되었을까.
저번에 들어왔을때와 달리 우리는 한참을 이동하는동안 괴수와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우연인 것 같지는 않고, 페어리들에게 숲 내부의 괴수들을 피해가는 요령이 있는게 분명하다.
“현재 위치는 잘 표시되고 있나?”
“속도계와 방향계 모두 정상작동합니다. 휴우, 저번같은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요.”
“괜찮을거야. 그만한 규모의 결계를 아무 때나 마구 펼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그 놈들이 요정의 숲 중심부에서 깨작거리며 살았을 리가 없잖아. 진작에 나와서 우리가 발도 못 붙이게 난리를 부렸겠지. 분명 오래 준비한 의식이었을거야.”
페어리들의 파편적인 증언을 모아 이능관리부와 행성관리국의 두뇌들이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고블린들이 왜 갑자기 요정의 숲을 외부와 차단하려고 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추측하기를 서식지가 약간 겹치는 페어리들과 팽팽하게 대립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최근 접촉한 중국 헌터들의 도움을 받아 승세를 잡은게 아니겠냐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러니까 그동안 못 하던걸 막 할 수 있게 되었는데 하필 그 시간에 우리가 휘말렸다는 것.
물론 한국이 증거까지 확보하고 개입한 이상 외교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지금 페어리 마을에 가서 수비를 도와준다고 중국 헌터들을 상대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없겠지...? 다시 생각해보니 걔들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놈들인데... 어?”
새삼스레 드는 불안감에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앞장서던 페어리가 펄쩍 뛴다.
째액하는 날카로운 소리는 아마 비명일 것이고, 뭐야, 공격받았나?
페어리를 근접경호하던 탱커 두 명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습을 당한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 왜 잘 가다가 혼자 저러는거야?
펄쩍펄쩍 뛰며 통곡하듯 소리를 질러대던 페어리는 다급하게 단어카드를 마구 꺼낸다.
강경호 팀장이 다가가 애써 진정시키며 대화를 시도했다.
“어... 그러니까 마을이 공격받고 있다는거지? 그걸 대체 어떻게... 하긴,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어서 안내하라고. 허리업! 가만있자... 이거. 오케이? 이거.”
“팀장님, 걔 외국인이 아니라 외계인인데요.”
이걸 대화라고 봐야할지는 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쨌든 손짓발짓과 표정과 저 페어리가 며칠간 이해하는데 성공한 몇 안 되는 단어카드를 이용해 오간 대화에 의하면 그가 온 마을이 현재 공격받고 있으며 그는 방금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듯 하다.
시야도 없고 소리도 안 들리는데 어떻게 갑자기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요정의 숲에 사는 원주민이니까 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수단이 있겠지.
“전투태세로 이동한다. 긴장 풀지 말고. 차량 외부장갑도 펼쳐놔. 수호, 넌 올라가고.”
“예. 혹시 모르니까 소이탄도 미리 준비해 놓겠습니다.”
“팀장님, 저도 길 뚫는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지속력이 좋은 편이라서 지금까지 이능을 한계까지 써서 탈진해본 적이 없어요.”
“음... 그래도 안 돼. 너무 비효율적이야.”
수풀을 헤치고 길을 가로막는 나무나 덩굴 등을 이능으로 부숴가며 걸음을 재촉했다.
역시 이계의 정글은 그 자체로 지구의 정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장애물이다.
지구에서도 내가 이런 우거진 숲 속을 돌아다녀본 적이 있는건 아니니까 직접적인 비교는 안 되지만, 최소한 지구에선 길을 뚫는데 이능을 쓸 필요는 없을거 아냐.
페어리가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우리를 이끌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우리는 밧줄로 페어리들을 줄줄이 묶어서 끌고 이동하는 고블린 무리와 마주칠 수 있었다.
와, 이거 타이밍이 너무 공교로운데?
서로를 발견한건 거의 동시였지만 미세하게나마 고블린들 쪽이 더 빨랐다.
아무래도 육중하고 소음을 많이 내는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이상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먼저 공격에 들어간건 전투준비를 마치고 만반의 태세로 이동하던 우리 쪽이었다.
“인질과 가까운 쪽부터! 방어막 깨지는대로 지시없이 자유판단 사격해.”
“공격조, 인질들 다치지 않게 조심해. 우진이 넌 특히.”
강 팀장의 지시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공격조의 이능이 발출되어 방어막에 부딪힌다.
우리가 표현한대로 고블린들이 정말로 포로로 잡아가던 페어리들을 인질 개념으로 활용했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파졌겠지만 저들에게 그럴만한 상황판단능력은 없는 것 같다.
묶어서 끌고가던 포로들을 내팽개쳐 방치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이쪽으로 달려오는걸 보면 호전성이 대단하기도 하거니와 이쪽을 얕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빠르게 세 걸음을 내디뎠다.
그동안 겪었던 실전도 실전이고, 무엇보다 반복된 훈련으로 인해 내 공간지각능력과 거리감각은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예리해져있는 상태였다.
특히 에테르 칼날의 최대사거리인 15미터는 정확하게 잴 수 있게 되었거든.
끄트머리에 선두가 들어오자마자 가로로 발출하니 목이 베여 머리통이 하늘로 솟구친다.
혈압이 높았는지 꽤나 높게 솟구쳐서 피를 사방으로 뿌려댄다.
선두에서 기세를 올리던 자기네 돌격대장의 피를 뒤집어쓴 고블린들이 순간 주춤했다.
우리 공격조가 쏟아부은 대여섯 발이나 되는 원거리 공격이능을 받아낼때는 방어막 덕분에 육체에 직접적 피해가 없어서 그런지 별로 동요하지 않고 달려들던 놈들이 막상 한 놈이 목이 잘려 나뒹구니 새삼스레 겁을 먹은 듯 기세가 확 죽는 것이다.
타아앙.
귀가 먹먹해지는 총성과 함께 막 방어막이 전부 상쇄된 녀석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어어? 저 놈들, 이젠 아예 도망을 가려고 하잖아?
나는 한 걸음을 더 나아가며 쿨타임이 돌아오자마자 다시 한 칼을 횡으로 날렸다.
완전히 패닉에 빠져 아예 등을 돌리고 달아나던 두 놈이 수평에 가깝게 뉘여서 날린 칼날의 영향범위 끄트머리에 닿아 각각 왼쪽과 오른쪽 허벅지를 베여서 붙들고 쓰러진다.
치명상은 아니겠지만 결과는 다를게 없지.
거의 딜레이가 없는 총성이 두 번 울려퍼지고 놈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 했다.
에테르 칼날의 영향범위는 일 미터가 조금 넘는데, 지금처럼 횡으로 날려서 동시에 두 마리의 방어막을 단숨에 상쇄하는 테크닉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직은 빗나가서 한 놈을 어중간하게 자르는 경우도 많지만 효율을 생각하면 이 편이 나으니까 계속 연습해서 숙련되어야지.
퍼어엉, 박우진의 화염구가 고블린들의 키를 훌쩍 넘겨 날아가 위협이라도 하는 것처럼 퇴로를 가로막고 터지니 달아나려던 고블린들이 절망에 빠진 눈으로 다시 돌아선다.
그 때쯤에는 이미 다들 방어막이 버티지 못하고 상쇄되어 가고 있었으니 끝장이지 뭐.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던 강경호 팀장이 수신호를 보내며 공격조에게 소리친다.
“공격조, 이능 아껴! 방어막 다 까였다. 마무리하자.”
명령에 따라 피니셔인 한수호뿐만 아니라 공격조와 방어조할 것 없이 팀원들 대부분이 개인화기를 꺼내들고 조준사격을 했는데, 인당 겨우 두어발을 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블린의 피부는 사람의 것보다 좀 더 질긴 듯 했지만 그래봐야 짐승가죽이다.
삽시간에 열 놈이나 되는 무리가 전멸한 것이다.
“사격중지. 좋아, 다들 수고했어. 전투종료.”
“도망을 가려고 할 줄은 몰랐네요. 우리 숫자가 더 많은걸 보고서도 거리낌없이 덤벼들기에 역시 고블린이라는 놈들은 죄다 공격성이 대단하구나 싶었는데 좀 실망이네.”
“우리가 태웠던 곳이 성역이었다잖아요. 아무래도 거기 지키는 놈들이 최정예였겠죠. 이 놈들은 대장 대가리 날아가자마자 튀는게, 암만봐도 오합지졸이고.”
가슴에 총알구멍이 서너개나 나서 쓰러져있는 시체를 발로 툭 건드리며 실실 웃는다.
멀쩡히 포로운송을 하다가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습격을 당해 죽은 저 고블린들 입장에선 억울하게 들릴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오합지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놈들이었다.
처음 달려드는 기세는 좋았는데 선두가 죽자마자 곧바로 겁을 먹고 멈추다니.
한편, 우리를 안내하던 길잡이 페어리는 전투가 벌어졌을때는 장갑차 뒤로 몸을 날려 숨어서는 벌벌 떨고 있더니 안전이 확보되자 콧대를 높이 세우고 포로들 앞에서 뻐기는 기색이다.
새로 접촉한 페어리들에게 우리 일행의 정체와 목적에 대해 설명을 할 필요가 있으니 대화를 하도록 간섭않고 가만히 두었는데, 왠지 설명하기보다는 계속 잘난 척만 하는 것 같은데?
이 상황에 저러는걸 보니 잡혀서 끌려가던 포로들과 원래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다.
페어리들의 얼굴은 인간과 궤가 달라서 표정을 구분하려면 한결 더 주의깊게 들여다봐야 했는데, 길잡이 페어리의 얼굴에 어린 감정은 그럴 필요도 없이 한 눈에 알 법 했다.
아니, 싸운건 우린데 왜 자기가 저리 생색을 내는거야?
물론 그는 자랑을 하면서도 잊지 않고 포로들을 풀어주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했다.
단어카드를 활용해 이어진 어설픈 대화에 의하면, 저들은 우리가 목적지로 삼고 가던 바로 그 마을에서 살던 페어리들이 맞다는 듯 하다.
“째액, 찍찍. 짹.”
풀려난 포로들이 특유의 지저귀는듯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감사를 표한다.
말 뜻은 못 알아들어도 대충 고마워하는 감정은 충분히 전해져 기분이 꽤 괜찮더라.
생김새로만 따지면 고블린과 구분만 간신히 갈 뿐 별로 다를게 없는 종족인데도 이렇게 보니 작달막한 몸과 굴곡진 얼굴이 점점 더 친근하게 보이는 것 같다.
음, 아무리 그래도 ‘페어리’라는 네이밍은 좀 아니지만.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눈치를 보니 페어리 마을이 이미 습격당한 것 같은데.”
“그러게요. 너무 늦었네. 조금만 더 빨리 움직일걸.”
전장정리가 대강 마무리되었지만 3팀 수뇌부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출정 목표는 페어리 마을에 들어가 교류를 시작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고블린의 습격에 대응하면서 공동전선을 펼쳐 페어리들의 신뢰와 호감을 사는 것이었지.
그건 완벽히 물 건너갔고...
강경호 팀장은 두 조장을 불러 몇 분의 짤막한 회의를 거친 후 결단을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고블린 마을을 습격하여 끌려간 페어리들을 구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