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1부
언어를 더 정밀하게 해석해 완전한 통역이 이루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증언만으로도 우리가 무척이나 복잡한 일에 휘말렸다는 것은 분명했다.
중국에서 고블린이 보유한 공간왜곡 기술을 탐내 요정의 숲 서쪽 어딘가에 비밀기지를 건설했고 특작부대를 파견해 연합작전까지 폈는데, 그렇게 공을 들여가며 준비한 의식을 우연히 딸려들어간 우리 오닉스 3팀이 산산히 부숴놓은 꼴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최초발견자가 우리가 아닌건 뭐, 그럴 수 있는거고 사실 억울할 일도 아니긴 한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죠. 되놈들이 진짜 미쳤나. 세상에, 할 짓이 있고 못 할 짓이 있지.”
“음, 그건 어떨까. 따지고보면 둘 다 이종족인데 말이야. 늑대가 양을 잡아먹는다고 늑대를 비난할 수는 없는거잖아. 물론 이런 중대한 일을 국제사회에 숨긴건 큰 잘못이지만...”
“아니, 그건 틀린 말입니다. 페어리와 고블린은 단순한 괴수가 아녜요. 원시적이긴 하지만 분명 사회를 이루고 초기의 문명을 일구고 있는 지성체들입니다. 자연의 섭리와 순환으로 보기보다는 인신공양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는게 더 적절해요.”
강경호 팀장이 잔뜩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할 것을 선언한다.
사실 페어리들을 구출해서 한국 전진기지까지 데려올때부터 우리는 이미 그들을 암묵적으로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외국인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안 통하긴 하지만 명백하게 일정한 체계를 지닌 음성신호를 주고받고 있었으니까, 무슨 고대인도 아니고 우리말 못 한다고 말을 못 하는걸로 여길수는 없었던 것이다.
계속 보다보니 익숙해져서 그런가, 이질적인 생김새도 나름 친근하게 느껴졌고 말이지.
“공론화하면 안 됩니까? 자료 싹 다 공개하고 언론 불러다놓고 성토하는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간이나마 페어리 종족이 겪고 있는 비극에 공감하며 분노할 수 있었다.
둘 다 이종족이라는 점을 지적한 박우진도 진지하게 중국을 편든다기보다는 그저 우리의 분노에 다른 사람들이 공감해 줄 수 있을것인가를 따져봤을뿐 분노하기는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인마, 그렇게 순진하게 굴어서 뭐가 되겠냐? 중국에서 가만히 있을리가 없잖아. 잠깐. 우리가 페어리들을 구조해서 데려온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지금쯤 뭔가 움직임이 있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중국 이능관리총국의 그 누구냐, 하여튼 실세라는 양반이 방한했다더라. 보통 일정 통보하고 여유롭게 들어오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 하룻저녁만에 날아왔대.”
“설마 자기네 계획을 망쳤다고 항의라도 하러 온겁니까?”
“아무리 뻔뻔한 패권외교로 유명하더라도 그럴순 없지. 잘잘못이 이렇게 명백한데. 그리고 당위성을 떠나서 그 놈들, 지금 고블린과의 교류를 숨기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강 팀장은 어젯밤과 오늘 새벽에 걸쳐 급하게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내린 결론을 전했다.
첫째, 중국이 공식적으로 이종족과의 교류사실을 부정한 이상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현재 전진기지에 머무는 손님들을 증인으로 동원하여 억지로 사실을 드러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단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외교적 레버리지를 가져올 수 있는데다, 결과적으로 외계문명과의 첫 접촉이라는 업적을 한국이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도 적잖이 영향을 끼쳤다고.
아, 그러고보니 총선이 얼마 안 남았지 참.
이렇게 되면 이종족들의 이름은 최초발견자가 명명한대로 페어리와 고블린으로 확정이다.
저들 스스로 어떻게 부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완전히 언어가 해독될때까지 그저 막연하게 ‘이종족’ 혹은 임시 코드네임으로만 부를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럼 그냥 묻어둔다구요?”
“야, 중국이야 중국. 공론화한다고 새삼스레 뭐 달라지는게 있겠냐? 괜히 우리 정부 입장만 곤란해지는거야. 그냥 사소하나마 빚 하나 지워두는걸로 만족해야지 뭐.”
“젠장.”
“어... 그러고보니까 걔들이 막 나가는게 하루이틀도 아니긴 한데.”
씩씩거리며 욕설을 중얼거리는 윤기정과 달리 나는 상황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외계행성의 역사를 배울 때 중국에 대해서도 배웠거든.
중국은 영토 내에 게이트를 두 개나 보유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남쪽 끄트머리의 하이난 섬에 열렸고 하나는 서쪽 끄트머리의 티벳 고원지대에 열려있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중원’에는 하나도 열리지 않은 셈이다.
하이난 섬이야 소수민족들이 사는 곳이라고 해도 중앙의 통제가 확고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니 상관없지만 독립열기가 타오르던 티벳 지역에 게이트가 열린건 불행의 서막이었다.
중요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간 티벳 지역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장, 위구르 지역은 애교로 보일 정도의 잔혹한 인종청소가 벌어졌던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폭동 진압이라던가 전면 재교육 등의 명분을 갖다붙였지만 학살은 학살이지 뭐.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공론화되었고 하나같이 강력한 어조로 비난하지 않는 나라가 없을 정도로 세계의 여론이 일치했지만 중국은 ‘국내 문제에 신경쓰지 말라’는 태도를 고수했다.
무역제재 등도 뒤따랐지만 몇 달 안 가서 흐지부지되더라.
역시 말은 번지르르해도 누구나 남의 나라 남의 민족 사람들 인권보다는 당장 자기네 나라 경제와 자기네 기업들의 이익이 더 소중한 법이다.
“수백만 단위로 인종청소를 하고도 욕 좀 먹고 잠깐 경제성장률 좀 낮아진걸로 퉁쳤는데, 하물며 페어리는 종족부터 다르잖아. 정의구현같은게 될 리가 있냐.”
“그때는 처음 게이트 열리고 침공받아서 괴수전쟁 치르느라 전 세계가 혼란스러웠으니 그랬던거지, 지금처럼 안정된 시대에는 이야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정부에선 비밀을 지켜주기로 방침을 정한 모양이더라. 페어리들에게도 사실 그 편이 좋을지도 몰라. 한국을 시작으로 인류와 정식으로 교류를 시작하게 되면 지금처럼 툭하면 침략당해 산제물로 끌려가는 일은 당하지 않게 될테니까.”
“고블린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 잘 해봐야 아즈텍 꼴이 아니겠냐? 놈들에게도 대화에 나설 이성이 있다면 좋을텐데.”
“죽기 싫으면 이성이 생기지 않을까요?”
살벌한 말을 너무 천진한 어조로 꺼내는 선배들을 보면서 내심 나도 그렇겠다고 동감했다.
중국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기 싫다는 정부 입장이야 뭐 충분히 이해가 가는거고, 어쩌면 그 와중에 우리 팀의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그와 별개로, 고블린과 페어리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될거다.
이거야 원, 영락없이 메소아메리카에 쳐들어간 구원자 코르테스가 된 셈이구만.
강경호 팀장이 손을 휘휘 젓고 다시 설명한다.
“이능관리부 장관님이 그러시는데, 대통령님이 중국 주석하고 핫라인으로 통화를 했대. 중국에선 공식적으로 이종족과 접촉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고블린들을 도와 페어리 부락을 습격한건 국적불명의 일부 동양계 헌터들의 일탈이라는거지. 다시 말해서, 아직까지 철수하지 않은 놈들이 있다면 그 놈들은 공식적으로 중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거야.”
“어, 그럼 팀장님 말씀은...”
“쓸데없이 위험부담을 짊어지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페어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필요는 있거든. 그 선발대를 우리 오닉스 3팀에서 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전달했어. 구조한 페어리들이 우리를 가장 친숙하게 여기고 있기도 할거고.”
“전 찬성입니다. 사실 준비만 제대로 한다면 고블린 놈들은 이렇다 할 위협이 안 돼요. 중국 헌터들이 문젠데... 관련성을 부정하는걸 보니 걔들은 죄다 철수를 할 모양이니까 뭐.”
“그렇지. 나도 크게 위험한 작전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어. 하지만 어쨌든간에 수천, 어쩌면 수만 단위의 사회를 이루고 있을 종족과의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거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해왔던 사냥하고는 궤가 다른거거든.”
“팀장님, 설마 우리 팀만 가는건 아닐텐데, 병력지원은 얼마나 해준답니까?”
“위에서도 상황판단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거야. 지구 방어라면 모를까, 원정에는 이능력자가 아닌 병력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지원군을 편성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는 일단 페어리들의 안내를 받아서 그들의 마을로 출정한다. 후방에 자리해서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었을 성역이 파괴되었으니 고블린들이 꽤나 충격을 받았겠지만, 오히려 복구를 위해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하니까 대대적인 습격을 도모할수도 있다는 정보를 받았거든.”
“그 정보는, 아무리 생각해도 중국이 준 것 같은데...”
“어, 맞아.”
“와, 그 놈들은 하다못해 의리도 없는건가. 들키자마자 바로 뒤통수네. 큭큭큭.”
그러게. 어쩌면 한국이 페어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피흘려가며 고블린들을 말끔히 쓸어내면서 자기들과 결탁했다는 증인과 증거까지 씻겨나가는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물적인 증거는 어지간해선 안 나올거고 있어봐야 증인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이종족 증인을 내세워 외교적으로 공격하기엔 또 나라의 입장이라는게 퍽 곤란하니까.
하지만 놈들의 속셈이야 어쨌든, 우리는 전의에 불타올랐다.
한수호가 지적한 것처럼, 준비만 제대로 한다면 고블린들은 큰 위협이 되지 못한다.
물론 아무리 유리하다고 해도 사냥보다야 더 위험하겠지만 성공시의 보상도 훨씬 더 크니까.
“현재 남쪽으로 원정을 나가있는 2팀을 제외한 1,3,4,5팀이 일주일 안으로 합류할거야. 네 개 팀 총 150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대규모 작전이다.”
“다 모일때까지 기다리는겁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시가 급한 것 같은데...”
“우리 3팀은 선발대로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한다. 페어리들 중 하나가 자원을 했어. 아직 통역을 할 수준까지는 안 되지만 마을까지 안내하는건 가능하니까.”
즉, 숙소에 드러누워 숙취를 극복하느라 고생하고 있던 우리를 소집할 시점에 이미 결론이 나고 추가원정의 일정까지 모두 잡혀있었다는 소리다.
아무리 상명하복이 원칙이라고 해도 좀 기분이 나쁠만도 한데 아무도 군소리를 하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인데다 강경호 팀장이 평소에 팀원들에게 인덕을 많이 쌓기도 했나보다.
---------
숙소로 돌아온 3팀은 바쁘게 물자를 재보급하고 몸에 긴장을 불어넣으며 원정준비에 나섰다.
뒤늦게 알게된 사실인데, 한국 정부도 새로 발견한 이종족인 페어리와 고블린에 대해 발표를 하긴 했지만 우리가 요정의 숲에서 겪었던 기현상에 대해서는 보안을 걸었다고 한다.
두 종족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그저 고블린들의 야만적인 종교의식 때문에 페어리들이 희생당하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려는 모양이다.
사실 아무도 이상한걸 느끼지 못할게, 오히려 공간왜곡의 주술의식이니 뭐니 하면 그 편이 더 황당하고 안 믿길걸.
“그래서 우리 임무는 일차적으로는 고블린의 습격에서 페어리 부락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이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역공하여 포로를 잡고 자료를 수집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와, 그때 땅굴에서 제단을 모조리 불태우지 말걸 그랬네요. 제사장으로 추정되는 놈들도 몇 놈정도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 왔으면 좋았을걸.”
“난 후회 안 해. 그 끔찍한 꼴을 봤으면 공무원들도 아깝게 왜 태웠냐고 면박주진 못할걸.”
“근데 중국 놈들은 아무리 들켰다고 해도 이렇게 미련없이 발 빼는거 보니까 만족할만큼 성과를 얻어갔다는거 아냐? 그거, 상상만으로도 무지 위험해보이는데.”
“그러게. 당장 써먹진 못 하겠지만, 언뜻 생각해봐도 악용할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닌데?”
“그러니까 추가임무가 중요한거지. 뭐라도 가져와야 돼. 우리도 놈들이 얻은 기술을 얻던가, 최소한 대항해볼만한 성과는 내야지. 솔직히 너무 운에 맡기는 감이 있긴 하지만.”
요정의 숲에서 기약없이 떠돌며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던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기억을 되살릴 필요조차 없이 차오르는 위기감에 모두들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는 기색이다.
든든하게 저녁을 먹고 장비를 점검한 오닉스 3팀은 땅거미가 질 무렵 전진기지를 떠났다.
목적지는 요정의 숲 중심부에 위치한 페어리의 마을.
이틀, 아니 지금이 저녁이니까 가는 시간을 고려하면 사흘이나 지났지만 고블린들의 성역을 완전히 불태웠으니 녀석들도 피해를 수습하고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우리가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단 습격 전에 도착해서 준비를 할 수만 있다면 오닉스의 나머지 팀들과 정부에서 꾸린 지원대가 도착할때까지 며칠 버티는 것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