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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화 〉1부 (17/110)



〈 17화 〉1부

이종족과의 두 번째 전투에 임하는 헌터들 중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숫적으로 우세한데다 무기를 사용한다고 하지만 오닉스 3팀의 전력은 저런 석기시대 수준의 무장을 한 작달막한 놈들이 모인다고 어떻게 해볼만한 수준이 아닌 것이다.
사람 기준으로는 초등학교 고학년생 정도 되어보이는 작은 체구에 걸맞게 방어막도 별로 강력한 편이 아니라서 공격조의 B급, C급 이능력자들도 서너번의 타격으로 어렵잖게 상쇄할 수 있는 수준이니 화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발견한 오륙십 정도의 무리가 전부였다면 어렵잖은 승리로 간단히 끝났겠지.


“젠장. 어쩐지 집이라고 할만한게  보이더니, 땅굴에 사는 놈들이었어?”


“얼마나 나오는거야?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오는데...”

“후,후퇴해야 하지 않을까?”

수십여 구의 사체가 널부러진 가운데 공터 중앙의 구덩이에서 끊임없이 기어나오는 이종족들을 보면서 철수 이야기가 나왔지만 사태는 이미 낙장불입이다.
발견되기 전에 뺐으면 모를까,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등을 보일 수 있을 리가 있나.
아직까진 전방 탱커들의 단단한 진형이 깨지지 않았지만 갈수록 힘에 부쳐보인다.
저 놈들도 머리가 있어서, 당장 눈 앞의 실더들보다 뒤에서 화력을 쏟아붓는 공격조원들에게 더 적의를 보이며 부딪혀 왔던 것이다.

“크윽. 팀장님, 저도 전방 투입하겠습니다.”


“기정이 넌 여차하면 지호 들고 뛰어야... 아니다. 가서 틀어막아.”

쿨타임마다 에테르 칼날을 날려  놈씩 목을 잘라내는 내 옆에 서서 대기하던 윤기정이 초조한 목소리로 요청하고, 강경호 팀장은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승낙한다.
그렇지, 지금 나 지키는게 문제가 아니지.
전위가 뚫리면 걷잡을 수 없이 피해가 나올텐데 그때가서 나 하나 잡고 몸 뺀다고 뭐가 되는게 아니잖아, 우린 지금 요정의  한복판에 있는데 말이야.


“진형 무너지지 않게 조금씩 물러나! 수호야, 2번차량 안에 소이수류탄 있는거 다 꺼내라.”

“그거 별 의미 없잖습니까?”


“최소한 잠깐 멈칫거리게는  수 있겠지. 지금은 그 정도 여유도 절실해.”


방어막의 열 전도율은 높은 편이 아니라서 화염으로 방어막째로 구워죽이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래도 좀 불편하게 만들수는 있을 것이다.
그 정도 효과를 기대하고 쓰기엔 소이탄이 그렇게  물건은 아니지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 아껴서 뭐하겠는가.
그나저나 저 놈들, 정말 징글징글하게 많이 나오는구만.
공터가 그리 넓은 편도 아닌데 대체 땅 속에 얼마나 우글거리고 있었던거야?
무슨 지하도시라도 세워놓은게 아닌 이상... 아, 그런가?
생각해보니 땅굴 아래에 얼마나 되는 규모의 근거지를 꾸려놨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지하에서 서식하는 놈들이라서 그동안 요정의 숲을 지나다닌 원정대의 눈에 안 띄었나?


“끼이익!”

“아, 저거 소리 진짜 거슬리네...”

부지런히 목을 수확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고 눈에 힘을 주어 더욱 집중했다.
소모값이 없고 다만 3초의 짧은 쿨타임만 있는 에테르 칼날을 쉴새없이 날려 매번 최소한  마리에서 많으면 두세마리까지 잡아내고 있지만 적세는 줄어드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와, 저 놈들은 무슨 무서워서 주춤하는 기색같은 것도 없네.
혹시 북유럽 광전사들처럼 죽기 위해 싸우는 뭐 그런 종교관같은거라도 있는건가.
그러던 어느 순간.
생소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렴풋이 기억날듯한 감각이 몸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나는 이것이 바로 몇 달전 처음 고등학교 급우들과 함께 센터에 가서 각성유도제를 맞고 이능력을 각성했을 때 느꼈던 감각임을 알아차릴  있었다.
오히려 그때보다 더욱 강렬한  같기도 했는데, 이게 어찌나 강렬한지...
나는 그만 신중함을 잃고 몸이 시키는대로 내  번째 이능을 발현하고  것이다.

“억! 뭐,뭐야?”


“지호 네가  거기... 잠깐, 너 언제 우릴 지나쳐서 앞으로 나간거야?”

“가,갑자기 나타났는데... 조심해!”


인해전술로 부딪혀오는 이종족 군대를 틀어막고 있던 탱커들이 깜짝 놀라서 소리친다.
그들이 아무리 놀랐어도 나만큼 놀라기야 했겠는가.
 번째 이능을 발현하자마자, 나는 방어진형을 지나쳐 적진 한복판에 서 있었던 것이다!
살기를 뿜어내며 흉흉한 기세로 달려들던 이종족들도 갑작스레 자기네 무리의 가운데에서 솟아나듯 나타난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눈만 끔벅이며 한순간 멍하니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녀석들이 침착하게 손에  돌도끼나 돌칼을 휘둘렀다면 난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끼이익!”

물론 멈칫거리며 멍하니 서있었던건 불과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도 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거슬리는 기성을 내지르며  놈이 내게 돌도끼를 휘두르기 전에 녀석의 목을 베어낸 것이다.
다음 칼날 발출까지 3초, 나는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등 뒤에 서늘하게 뭔가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어 등골이 쭈뼛거릴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쿨타임이 돌자마자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놈에게 다시 한 칼 먹이고 왼발에 힘을 주어 간신히 방향을 비틀고 왼쪽에서 찔러오는 나무 창을 손으로 밀치며 뛰어넘는다.
그리고 이 급박한 상황에,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
행군의 피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생생한  상태에 갑작스레 각성한 새로운 이능력에...
결론은 명확하다.
방금 레벨업을 한게 틀림없다.
레벨이 올라서 체력도 일정부분 회복되고 새 스킬을 찍었다고밖에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냥 스킬 하나만 딸려온게 아니라 아예 캐릭터 자체가 덧씌워졌나보네.
 이제야, 하는 생각도 안 드는건 아니지만 되짚어보면 그간 거대괴수도 여럿 잡고 꽤 많은 사냥을 했지만 방어막만 상쇄해서 총기로 마무리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에테르 칼날로 ‘막타’를 친 것만 경험치로 계산되는건가.
그래, 레벨업 한건 좋은데...


“아니,  멋대로 스킬이 찍히냐고. 크읏, 비켜 이 새끼야!”


서걱, 쿨타임이 돌자마자 에테르 칼날을  번 더 쏘아서 무기째로 몸통을 베어냈다.
푸른빛이 감도는 내장이 쏟아져내리며 지독한 악취가 코를 찔렀지만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
으으, 새로운 이능력 각성했다고 시험해볼 생각도 없이 즉석에서 써본 내가 병신이지.
어렴풋이 떠오르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환영검사의 이동기인 에테르 쉬프트는 쿨타임이 십초대였던 것 같은데.
그럼 슬슬 다시 쿨타임이  때가... 아, 지금! 됐다!
에테르 칼날을 쏘아낼 때와는 또 다른 기묘한 감각이 다시 내 몸에 차오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이종족 무리가 아닌 우리 방어진의 안쪽에 있었다.


“구해야 된다! 돌격해! 기정이 네가 책임지고 구해오... 어?”

적진에 떨어진  구해오기 위해 단단한 방어진형을 포기하고 앞으로 튀어나오려던 실더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공격조 사이에서 나타난 나를 바라본다.
안전이 확보되니 맥이  풀리면서 뒤늦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에테르 쉬프트의 쿨타임이 다시  때까지 겨우 십이, 삼초 정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이 십여초지 칼을 맞아도 몇 번은 맞아 쓰러질 수 있는 시간이다.
와,  진짜 다 죽다가 간신히 살아나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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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내가 목숨을 걸고 적진 한복판에서 한바탕 난장을 부린 뒤 돌아온 것은 전세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난데없이 자기네들 사이에서 나타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창 끝을 돌리느라 녀석들의 대열이 형편없이 꼬이고 무너져서 물밀 듯이 달려들던 기세가 한풀 꺾였던 것이다.
물론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땅 속에서 기어올라오는 놈들은 끔찍했고 숫적으로 압도적인 열세였던만큼 수월한 싸움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겼고 살아남았다.
노련한 헌터들도 이렇게 패색이 짙은 싸움에서 구사일생한 경험까지 많은건 아닌 듯 다들 잔뜩 흥분해서 두 배 가까이 빨라진 맥박과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어려운 모양이다.
적어도 창백하게 질려 겁을 먹었던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정예라는 말이 어울리지.

“이능이 진화하는건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이건 진화가 아니지. 지호가 새로 발현한건 순간이동에 가까워. 무형의 칼날을 날리는 기존의 이능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잖아?”

“순간이동 맞아요? 혹시 제어하기 힘들 정도의 고속으로 이동하는 능력이라던가...”

“순간이동이 맞아.   우리 탱커진이 어깨 맞대로 막고 있었잖아. 우리가 인식하기 힘들 정도의 고속이동이라도 적어도 경로는 확보되어 있어야 말이 되잖아?”


“순간이동이든 뭐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번째 각성이라. 없는 일은 아니지. 캐나다의 S등급 실더 있잖아. 그 양반도 헌터등록한지 3년만에 완전히 새로운 이능을 하나 더 각성해서 등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러니까 사례가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전투가 끝나고 이백여 구에 달하는 시체들이 쌓여있는 공터를 간단히 정리한 뒤 장갑차 안에서 비상식량을 꺼내 나눠먹는동안 오가는 화제는 단연  두 번째 스킬이었다.
당장의 안전이 확보되었을뿐 요정의 숲에 일어난 기현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깜깜한 상황이었지만 그런 상황마저도 잠시 제쳐둘만큼 다들 내게 관심을 집중했다.
장갑차 차체 위에 자리잡고 무려 칠,팔십여 발의 사격을 하며  발의 미스조차 없이 모든 탄을 적의 머리와 심장에 박아넣은 피니셔 한수호가 이온음료를 들이키다가 한 마디를 보탠다.


“단순한 순간이동이 아니었어. 음, 난 아직도 헷갈리는데, 두 번째 이능이 아니라 세 번째 이능까지 동시에 각성한건지도 몰라. 뒤돌아서 이쪽으로 달려나올 때 내가 분명히 봤거든.”

그의 말에 의하면, 정신을 차린 내가 탈출과 복귀를 위해 주변의 이종족을 닥치는대로 베어내며 발악하기 전에 분명히 돌도끼가 먼저 내 등판에 닿았다고 한다.
이렇게 역대 최고의 재능을 지닌 신입을 덧없이 보내는가 싶어서 절망하는데 등에 도끼가 박혀 무너져 내려야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게 아닌가.


“...그리고 두 번째로 순간이동해서 우리 진영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지금  팔의 그 상처가 생긴거지. 그걸 보면 방어막이 오래 가는 것 같지는 않아.”

“아마 2초일거예요.”
“아, 그래? 역시 감각이 있었나보지? 강도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


“글쎄요. 약하진 않은 것 같은데 얼마나 단단한지는 맞아봐야  것 같아요.”


게이트를 넘어오기 전에 외계 박테리아에 대한 기본적인 종합백신은 맞고 왔지만 혹시 몰라서 팔에 생긴 상처를 소독하던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깊은 상처는 아니고 다만 돌로 된 뾰족한 창날에 살짝 긁힌 정도지만 아프긴 엄청 아프네.
감각적으로 보호막이 생겼다가 없어지는걸 느낀건 아니지만 지속시간은 2초가 확실했다.
그야 그런 스킬이니까.
아까는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침착하게 돌이켜볼 여유가 없었지만 전투가 끝난 후 나는 차분히 생각한 끝에 환영검사의 액티브 이동기 에테르 쉬프트의 스펙을 기억해낼  있었다.
사정거리는 40미터.
사실 40미터라고는 해도 인게임 체감거리는 살짝 부족하게 느껴지는 길지 않은 거리였다.
무조건 최대거리로 순간이동하는게 아니라 마우스 포인트로 이동하므로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었으니 아마 연습을 하면 나도 거리조절이 가능해질 것이다.
순간이동한 직후 2초간 주문력 계수의 보호막이 생기는데, 기본수치도 낮은데다 계수도 별로 높은 편이 아니라서 탱킹기로는 좀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음, 그런데 특성으로 주문력이 사실상 무한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하면 2초간은 그냥 뚫리지 않는 보호막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네.


“끄응. 뭐가 한 줄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맞다. 켈록켈록.”

“어어, 뭐야, 사례들렸어?”


“후우, 이온음료 분말이 제대로 다  녹았나봐요. 목구멍에 달라붙네요. 크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에테르 쉬프트에는 조건부 쿨타임감소가 붙어있었는데, 적을 한번 타격할때마다 쿨타임이 1초씩 줄어드는 옵션이었다.
에테르 쉬프트로 진입한  평타와 에테르칼날을 섞어 모션캔슬을 하며 중거리와 근거리를 종횡무진하는 전투를 벌여 쿨을 빨리 돌린 후 다시 에테르 쉬프트로 빠져나오는 것이 환영검사의 주요 전투방식이었는데,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라 자살돌격이 되기 십상이다.
내 경우에는, 음... 깔끔하게 포기하자.
평타라니, 괴수한테 주먹질이라도 하라고?
신체강화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미쳤다고 근접전을 하겠어?

“팀장님, 이젠 어쩔까요? 다시 출발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보는게...”

“내가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이대론 답이 없다. 설령 운이 좋아서 전투를 더 벌이지 않더라도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길에서 지쳐 죽을거야.”

“그건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습니까? 희망을 걸어보는 수밖에는...”

“구조대가  때까지 숲에서 버티는 방법도 있지. 식량이 없으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저 놈들 봐라. 딱 보면 석기문명 정도 되는 원시부족같지 않냐? 내가 아까 시체 하나 간이분석기에 돌려봤는데, H타입이란다. 정확히는 몰라도 일단은 지구의 포유류하고 생명체 매커니즘 자체는 동일한 부류야.”


“어... 설마 저 시체들을 뜯어먹으면서 버티자는건 아니죠?”


“저 땅굴 봐라. 지하에 분명 마을이 있어. 지구의 포유류하고 비슷하다면 저 놈들도 먹을걸 모아놨을거 아니냐, 이 정도 되는 규모의 무리가 배고플때마다 사냥을 할 리는 없잖아.”


그러니까 저 놈들이 저장해놓은 먹이를 탈취해서 먹으며 구조대를 기다리자는건가.
우리는 공터 중앙에 볼록 솟은 땅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미친 생각같지만 그럴듯한데?
적어도 정처없이 헤매는 것보다는 살아날 확률이 더 높을 것 같아.
난 비위가 강한 편이 아니라서 좀 걱정이 되긴 하는데... 죽는 것보단 낫잖아?
혹시 저 놈들이 의외로 미식가 종족이라서 사람 입맛에도 잘 맞는 먹이를 모아놨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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