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93. 탐식자 카르칸 (94/95)



〈 94화 〉93. 탐식자 카르칸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몸이 기가 뒤틀리고 역류하기 시작한다. 화광이 그녀의 등에 죽은 피를 뿜어냈다. 그때가 나드비온의 심장을 터트린 순간이었다. 앞뒤로 피에 적셔져 혈귀 같은 모습이  그녀가 그제야 몸이 엉망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미친 늙은이가!”

화광은 선기를 최대로 일으켜, 그녀의 몸 안을 더욱 헤집기 시작했다. 리오나가 그 거대한 기의 물결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나드비온의 심장을 터트린  채로 굳어버렸다.

선기가 리오나의 내부를 돌아다니며, 아기아스로부터 받은 힘과 충돌을 일으켰다. 그 짧은 틈을 노리고, 쌍장이 다시금 그녀의 어긋난 어깨를 후려쳤고, 그녀의 왼팔이 선기를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오른팔은 나드비온을 공격한다고 힘을 주었던 상태라, 내부의 날뛰던 힘을 이겨 낼 기운이 남아있어서 무사할 수가 있었다.

“두 팔을 가져가려고 했거늘! 어쩔  없지.”

 줌의 내공마저도 모두 태워 그녀의 몸 안에 집어넣어 내부를 엉망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순수했던 환수의 기운 대신 타락자의 기운으로 더럽혀진 기운들, 그 꺼풀이 벗겨져 나간다. 선기에 영향을 받았던 순수했던 환수의 기운들이 하나로 뭉쳐 들기 시작했다.

“이거, 좋은 선물을 하나 줄 수 있겠군”
“미친, 노인네가 놔! 놓으라고!”

크론과 센바가 나서려고 했으나, 이미 주변을 짓누르는 기의 파동에 선뜻 다가가도 힘들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불태워버리는 거센 공격에 그들도 위축될 지경이었다.

그녀의 몸에 선기들이 똬리를 단단히 틀고, 뭉쳐서 구슬이 된 환수의 기운을 화광이 그녀의 몸에 손을 찔러넣어 뽑아낸다.

“커억! 미친, 노인네가!”
“제자놈아, 스승의 마지막 선물이니라!”

구슬을 루시안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쏘아내었다. 화광이 피를  바가지 쏟아낸다. 서서히 기의 압박이 줄어들자. 리오나가 손톱을 길게 뽑아 그대로 몸을 돌려 화광의 몸에 쑤셔 넣었다.

“윽!”

왼팔을 재생하려고 해도 재생이 되질 않는다. 게다가 내부에서 일정 이상의 힘을 내려고 하면 그걸 단단한 쇠사슬이 묶고 잡아당기듯이 움직이지도 않는다.

“이 망할,  몸에 대체 무슨 짓을  거야!”

그녀가 성질이나 서서히 꺼져가는 화광의 몸을 발로 짓밟기 시작했다. 서서히 핏물이 되어버려 형체도 알 수 없게 으깨져 버린 화광의 몸.

리오나는 분이 안 풀리는지 여전히 씩씩거렸다.

그때 화광의 몸에 하얀 기운이 맺히더니 그의 몸과 피가 하얀 구슬로 변했다. 그 구슬에서 작은 빛이 새어 나와 나드비온의 시체에 비춘다. 나드비온의 육체도 곧 하얀 구슬이 되었다. 그리고는, 하늘로 향해 솟구쳐 사라져버렸다.

“리오나, 아주 호되게 당했군?”
“그러게, 적을 가지고 놀아도 방심은 하면 안 되지.”
“몰라, 빨리 위치나 잡아! 차원이 열리면 잡아 세워야 하잖아! 하필 지점 중 하나가 여기라니 젠장.”
“여기가 그나마 힘이 덜 들어가는 곳이니 리오나 네가 맡아라.”

리오나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화광에게 당해버려 힘을 제대로  수가 없었다.

“쳇, 알았어! 알았다고.”

그녀가 품 안에서 검은 수정을 꺼내,예정된 지점에다가 박아 넣었다. 그녀를 핵으로 삼아, 마법진이 그려진다. 센바와 크론도 각자의 지점으로 이동해 리오나와 똑같이 움직였다.

그들은 정확한 정삼각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사르칸이 움직여 역 정 삼각형으로 시체들로 이루어진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두 삼각형의 중앙 그곳에 바실이 조종하는 거대한 차원문이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중앙에 아기아스가 서서 그 차원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카라함의 쌍둥이 탐식자 카르칸! 포식자 카라함의 육체를 얻은 나에게 더욱 강대한 힘을  제물이 될 테지. 어서 오거라! 큭큭”

살짝 열린 차원문의 틈으로 굵은 검은 촉수  개가 튀어나와 차원문의 양쪽을 물었다.

아기아스가 만족한 듯 크게 웃어댄다. 그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간다.

제피르칸 제국의 수도는 데칸은 다시 고요해졌다. 광증이 도진 황제는 연일 왔다 갔다 하는 정신에 잠도 제대로  자고 있었다. 시종하나가 부리나케 달려온다.

그가 밝은 얼굴로 황제에게 보고를 올린다.

“황제 폐하! 좋은 소식입니다. 제국에 나타났던 차원문이 사라졌습니다.”
“정말이냐!”

황제가 반색하며 밝게 웃었다. 얼마 만에 듣는 희소식이란 말인가. 이제 이 지긋지긋한 광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간 불안함에 잠들지 못했던 그였다. 오늘 밤은 숙면을 취할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하지만, 이미 민심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건 차원문의 괴수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자가 칼을 높이 치켜든  여기저기 퍼져나가 있는 몬스터들을 베어나가고 있었다. 모두의 마음속에 그가 깊이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프란츠 경! 대승입니다.”

프란츠가 투구를 벗으며, 환히 웃었다.

제국의 황성 지하, 음침하고 음습한 그곳, 거대한 차원문을 열기 위해 모든 힘이 하나로 모여든 탓으로 창원에너지를 잃고, 스스로 살기 위해 황성의 지하로 피신한 차원문이 있었다.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웅크렸다.

웅웅거리는 미약한 빛만이 아직 그 건재함을 알릴 뿐이었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고통에 머릿속이 하얘질  같다. 여기서 정신 줄을 놓아버리면 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 이곳에 그대로 주저앉은 패배자로 남을 것이다. 몸의 내부를 휘젓는 기운들 통제를 따르지 않는 그 힘과 줄다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애써, 유지하던 모습도 이제는 버리고 성장해 더 나아가야 할 때였다. 과거의 기억만 가지고, 행복만 가지고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집착하던 마음, 조급하던 마음을 버린다.

분노에 삼켜지지 않게, 본성은 날카롭게 유지하고, 이성은 차갑게 식힌다. 밀고 당기던 힘의 균형을 풀어버린다. 알아서 날뛰도록 고삐 풀린망아지처럼 날뛰다 제풀에 지치도록.

새로운 힘의 운용, 잊었던 고대의 기억, 잔류한 기억들이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덮쳐온다. 그렇게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고, 힘을 다스리고 의식 저편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구리가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난 거야?”
“대충, 6시간쯤이네요.”

루시안 일행은 구리가 있는 민가 주변에 야영지를 꾸렸다. 구리가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 로웰이 정신없이 달려왔다. 그가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거대한 환수들이 나타나서 어쩌고저쩌고. 도통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흐른 후 드레가 도착했고, 아시카, 겐과 넨, 아시카의 수족, 드레이크 다크, 테란페와 타니엘이 속속 도착했다.

그들은 구리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는 사정을 듣고는, 모두 주변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세 명의 거대 환수들이 나타났고, 나드비온님과 화광 스승님, 네로니아가 남았다는 겁니까?”
“가장 먼저 튄  로웰 너였다는 거지?”

발터와 루나, 라펠라의 눈초리가 로웰에게 꽂힌다.

“아니,  환수들을 어떻게 잡으라는 건데? 난 죽고 싶지 않아!”
“솔직히, 굳이 네가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지가 않는다.”

타몬트가 대검을 땅에 내리꽂으며, 으르렁거렸다.

“아니, 과거의 악연은 좀 접어두면  될까?”

로웰이 검지를 서로 맞부딪히며, 눈치를 본다. 아무리 봐도, 예전에 베카린을 데리고 사라지던 그놈 같지가 않다.

“너 팔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파편 찾는다고 찾아간 곳이 고대 골렘 연구소였거든!”

타몬트와 로웰이 한담을 나누는 사이에도, 엘프들은 초조하게 화광과 나드비온이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절한 엘란도 깨어나 정신을 차렸다.

그러길 또, 한 참여,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눈물범벅인 네로니아가 날아온다. 눈짓으로 풀어달라고 협박하고 윽박지르고, 결국엔 애원했다.

루시안이 한숨을 내쉬며, 배운 대로 점혈을 풀자, 네로니아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한다.

“으앙 아빠아아아, 으아앙”

테란페와 타니엘이 나서서 달래봐도 울음을 멈추질 않는다. 안 그래도 구리 때문에 심란하고, 화광이 걱정돼 죽겠는데, 네로니아가 저러고 있으니 짜증이 솟구친다.

구리가 있는 민가를 한 번 더 쳐다보다가, 아무 소식이 없음에 답답해서하늘을 바라보다가 다시 땅을 바라보고. 괜히 넘겨주었나 자책도 하고 심란한 마음을 잡질 못하고 있었다.

그때, 피닉스가 갑자기 날아오른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물고는 내려온다. 하얀색의 환수 구슬이다.

“이게 왜 날아오지?”

구슬이 날아온 방향을 가늠해보니, 화광과 나드비온이 남았다던 그 방향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드레는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 모양인지, 그 방향을 보며 눈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보일 만큼 하얀빛 두 개가 하늘로 올라가는  보였다. 역시, 그 방향이었다. 드레가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두 번의 절을 올렸다.

“드레? 설마?”

드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을 삼켰다.

“등선하셨다. 화광 선생님께서.”

주먹이 쥐어지고 부르르 떨려온다. 자기 주변에서 자꾸 사람들이 스러져간다.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을 삼켰다. 잠깐의 인연이었다지만, 엄연한 스승이었다. 무뚝뚝한 듯 따스히 감싸는 어른이었고 말이다.

루시안도 드레를 따라 절을 올렸다.

점차, 하늘이 어두워진다. 시간이 어느덧 흘러, 아침 해가 떠오를 때이건만,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또, 불길했다. 검은 기운들이 여섯 군데에서 솟구쳐,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거대한 차원문이 형성되고 입구가 살짝 벌어진다. 촉수  개가  사이로 튀어나온다.

“저게 뭐야!”

일행들도 모두 그걸 보았다. 떠오르는 해가 촉수를 더욱  비춰주었다. 촉수 끝에 달린 날카로운 이빨들이 문을 열 듯 차원문의 양옆을 물었다.

여섯 군데에서 치솟아 오른 기운들은 모두 쇠사슬이 되어 차원문에 걸쳐졌다. 세 개는 차원문을 단단히 고정 시켰고. 세 개는 차원문의 입구를 걸어 서서히 열어젖히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기아스야…….”

로웰이 제자리에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부르르 떨었다.

테란페와 타니엘이 엘란에게 무언가를 지시한다. 엘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휘파람을 분다. 그리곤 팔을 곧게 펴 옆으로 뻗었다. 주변을 날아다니던 새들이 그의 팔에 앉는다. 엘란이 새들에게 뭐라 뭐라 말을 하자, 곧,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잠시 후, 새들이 그의 머리와 어깨에 앉아 재잘거렸다. 엘란이 굳은 표정으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다시 타니엘과 테란페에게 말을 했다.

네로니아는 나드비온이 이젠,  세상에 없다는 걸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면 진즉에 돌아오고도 남음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마음 한구석 연결되어있던 끈이 툭 끊긴 공허함이 몰아쳤다.

구리는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루시안은 불안해하면서도 그의 눈은 구리가 있는 건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구리마저 떠나버린다면 그땐, 정말 마음을 다잡지 못할 것 같았다.

짙은선기가 감도는 하얀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었다. 드레의 말로는 화광의 선물일 거라고 했다.

“그분의 선기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아마, 루시안에게 남기는 선물 같은 거겠지요.”

루시안은 그 말에 울컥했다. 못난 제자는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화광이  지니고 다니던 침통이 루시안의 앞에 놓여 있었다. 그걸 쓰다듬어본다. 마음이 착잡하다.

죽음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언제나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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