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85화. 각자의 자리에서 (86/95)



〈 86화 〉85화. 각자의 자리에서


“일단은 쉬자.”

구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은호가 구리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몸을 말았다.

얼마의 시간이흐른후, 모닥불을 피워놓고 구리와 루시안이 앉아있었다. 발터에게 루나를 데리고 돌아가 라펠라와 마리엔을 다독여달라 부탁했다.

“마음을 다친 자들, 목숨을 잃은 자들, 마음이 부서진 자들…….”

루시안은 말없이, 나뭇가질 모닥불에 던져넣었다.

“구리야.”
“응?”
“넌 앞으로 어떻게 할래?”
“몰라. 그냥, 지쳤어. 형…….”

은호가 구리의 품을 파고 들어가 머리를 비비적댄다. 구리가 은호를 쓰다듬어준다.

“형은, 아기아스와 맞서 싸우러 나갈 거야. 그가 아직 본격적으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도 곳곳이 혼란스럽거든. 발테리안 마을도 공격을 받았고, 또 소중한 사람이 떠났어.”
“형?”

구리가 눈을동그랗게 뜨고, 놀란다.

“구리야, 앞으로 말이야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소중한 누군가를 잃을지, 아니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지.”
“형!”
구리는 그런 건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낸다. 루시안은 반응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말이야. 난 계속 나아갈 거야.  주변의 모든 이들의 일상을 지켜주기 위해서. 이렇게 되고보니까, 같이 떠들고 여행하던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드네. 그걸, 지켜주고 싶어졌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싶진 않아.”
“형…….”

루시안은 묵묵히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던져넣을 뿐이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가  수 있는 것을 하자. 무리하지 말고. 나는 모두의 선택을 존중할 거야.”

구리는 얼굴을 파묻고, 말이 없다.

“형은 이틀 후 아침에 떠날 거야. 발테리안 마을로 가서 정비하고 싸움을 시작할 거야. 그렇게 알아둬. 잘자라, 구리야.”

루시안이 여전히 고개를 파묻고 미동도 없는 구리 옆에 침낭을 깔아준다. 은호가 구리의 다리 옆에 기대고 자리를 잡는다.

“은호야, 네가 구리를 잘 돌봐줘.”

은호가 루시안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한편, 이제는 어엿한 아기아스의 본진이 되어버린 랑기어 교단의 건물. 새로 태어난 샤르칸과 니겔 그리고 바실까지 자리에 모여 있었다.

“아기아스님, 차원문이 전부 소피아르로 집중되었습니다.”
“큭큭, 드워프 놈들 용을 쓰는군. 그 놈들 덕에 벨가의 처리가 쉬웠는데 말이야.”
“앞으로는 저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세계를  발아래에 꿇리는 것이지. 내가 염원하던 것. 그걸 실현할 때야. 예전엔 내 이상을 몰라주고 나를 막아 세웠지만, 이젠 막을 자들도 없어! 난 이 세계의 신이 될 것이다!”
“아기아스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기아스님, 그렇다면 거짓된 신들을 없애버려야 하지않겠습니까!”

니겔의 말에 아기아스가 흡족한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검은 구슬 하나를 건넨다.

“이것이 대수림의 반을날려버린 악의 포자다. 이걸 스발란에 던져넣고 그곳을 정화해버려라. 심연의 군단을 내어주겠다.”
“예, 깨끗이 정화해버리겠습니다.”

니겔이 환하게 웃으며, 구슬을 받아들었다.

“바실은 배신자로웰과 제리코를 추적해라. 그들을 찾아다 내 앞으로 데려와라. 샤르칸은 소피아르로 향해 그곳을 점령하고 전진기지로 만들어라. 차원문이 한곳에 모인 김에 그곳을 내 거처로 삼아야겠다.”
“예, 아기아스님!”
“알겠습니다.”

아기아스가 흡족히웃으며,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각자의 군세를 만들고, 종을 늘려라, 아기아스의 위대함을 떨쳐라!”

모두가 사라진 곳, 아기아스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이제 슬슬, 시작인가. 아스타리안으로부터 아칸다, 네빌론까지 모두 다 집어 삼켜버리겠다. 그보다, 먼저 귀찮은 장치로 장난을 치는 드워프부터 없애버려야 할텐데 어떻게 해야 괴로워할까? 흐흐흐”

달빛마저, 구름에 숨어든 어두운 엘프 숲, 혼자 남아있던 쿠드비온이 눈을 떴다. 포자는 사라졌지만, 포자가 자신을 집어삼켰던 그때의 강렬함, 만큼은 뇌리 깊숙이 박혀있었다.

그가 무슨 결심을 내린 듯 슬며시, 문을 열고 나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빠,그냥 놔줘도 되는거에요?”
“흠. 아직 적이 아니니 뭐라 할 수도 없는 것 아니냐. 네로니아, 일단 타니엘에게 이 일을 알려라.”
“흥, 그냥 죽여버리면 편한데!”

네로니아가 몸을 놀려 타니엘에게로 달려 간다.

“별일이 없어야 할텐데….”

나드비온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폐허가 된 마녀의 숲에도 해가 비추고, 어둠이 물러가며 날이 밝아왔다. 구리는 밤새, 모닥불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루시안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따로 구리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구리야,  갔다 올게!”
“......”

구리는 아직 결정을 못 내린 모양이다. 루시안의 눈과 은호와 눈이 마주친다. 잘 살펴주라는 무언의 당부와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이 오고 간다.

그간, 루시안은 구리가 지낼 오두막을 손보고, 벨가의 무덤을 손보았다. 구리가 지내는 데 무리가 없게 해뒀다. 좋아하는 음식들로 오두막을 채웠다.

다시 한번 오두막을 둘러 문제가 있나 살피고, 벨가의 묘로 향했다.

벨가의 묘, 밸가가 남긴 물건들을 묻어, 추모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서면 벨가가 자신을 반겨주는 듯했다.

“벨가님,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구리를 잘 보살펴 주세요.”

가볍게 묵념을 올리고, 루시안은 마녀의 숲을 떠났다.

한참 뒤, 구리가 수척한 얼굴로 벨가의 묘에 들렀다.

“벨가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 더 이상 누군가를 지킬 용기가 나지 않아요.  옆에서 누군가 다치고 죽어가는  볼 용기가 없어요. 벨가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리가 고개를 숙인채 그렇게 한참을 어깨를 들썩였다. 은호가 그 뒤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루시안은 공방으로 돌아왔다, 라펠라는 약간의 기운을 차린 상태, 마리엔은 울다 쓰러지다를반복하다가 겨우 잠들었다고 한다.

“공방은 휴업하자. 지금은 운영할 마음이 들지 않아.”

네코이도 헥터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테리안 마을의 상흔은 깊었다. 아마, 쉽게 치유되진 않을 터였다.

“형, 구리는요?”
“맞아, 구리는?”

루시안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다, 그 의미를 알기에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이겨 내야 할 텐데…….”

헥터가 구리를 걱정했다.

루시안은 타몬트를 찾아갔다. 그는 라펠라를 돌보고 있었다.

“누님, 거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난 위선자야. 위선자.....난  그렇게 분노했을까?”
“누님!”

답답해 소리치는 타몬트의 어깰 루시안이 가볍게 두드린다.

“타몬트 형, 누나는 잠시 쉬도록 두시죠. 그리고,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겠어요?”

그렇게, 루시안은 발터, 루나, 타몬트를 불러 한자리에 모았다.

“구리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누나는 마음이 무너져서 계속 저러고 계시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저는 내일 이곳을 떠나, 저들의 본거지인 랑기어 교단으로 향하고자 합니다.”

다들 말이 없었다. 각자 마음이 복잡했다.

“강요하지 않을 겁니다. 가실 분은 가시고 남을 분은 남으시면 됩니다. 저와 함께하실 분은 함께해 주시면 됩니다. 여러분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루시안은 그 말만 남긴 채 일어섰다. 건물을 나서서 라이야 상단으로 향했다. 상단 건물도 피해를 입었는지 복구가 한창이었다.

“여기도 난리군요.”

알텐이 루시안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래도 죽거나 크게 다친이는 없어서 다행입니다.”

루시안은 상단에서 연금술에 필요한 물품을 죄다 사들여서 공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렇게 차근차근 일전을 준비해나갔다.


소피아르 수도에 열린 차원문은 끊임없이 침입자를 뱉어냈다. 마기에 잠식된 마물과이종족들은 광기에 휩싸여 살육을 원하는 악귀가 되어있었고, 이곳의 몬스터보다 힘이 더 강력한 변종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발테리안 마을은말간테로 가는 길목에 있는 터라, 침입자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루시안과 발터가 마녀의 숲에 가 있을 때에는 타몬트가 경비대들과 합심해 막아 내다가,  후엔 돌아온 발터와 루나가 합류해 같이 막아 내었다. 방어가 굳건하다 보니, 몬스터들이 슬슬 우회하기 시작했다.

루시안이 돌아왔을 즈음이 몬스터가 슬슬 다른곳으로 눈을 돌리던 때였다.

몬스터가 눈을돌린 곳은 바로 옆 영지인 캐난 영지였다. 그곳을 통해 파괴된 대수림을 거쳐 말간테와 제피르칸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캐는 영지는 마물들에게 짓밟혔다.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과시의 일인자였던 베겐트 백작, 그의 위세를 빌려 기세등등하던 페트릭도, 루시안과 발터, 마리엔을 무시하던 식당도  쓸려나갔다.

베겐트 백작이 겉보기에만 그럴듯하게 꾸며놓은 병사들 덕에 방어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냥, 무참히 썰려 나갔다. 그러다 보니 마물은 아무런 손해 없이, 말간테로 가거나 제국으로 진출할  있었다.

말간테에서는 국경지대를 통해 들어오는 마물들, 변종 몬스터, 광화한 이종족들의 침입으로 몸살을 앓았다. 차원문이 없어져서 축배를 들기 무섭게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1왕자 시마 말간테, 왕국의 환난을 해결하고자 나서겠습니다. 국경지대로 출전하고자 합니다. 전하께서는 허락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말간테의 국왕 가르 말간테는 이를 허락했다. 어차피,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아직, 보탄이 탐탁지 않아 내보내는 것이 꺼려졌다. 그래서 1 왕자의 출전을 허락했다.

1 왕자는 호기롭게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온 그는 몬스터를 얕보았다. 자신의 무력이면 충분히 쓸어버리고 남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는 연전연패를 기록했다. 병사들은 죽어서 다시 일어나 1 왕자에게 무기를 들이댔고, 변종들의 힘은 병사를 압도했다. 뒤늦게서야, 1 왕자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 아무리 용을 쓰고 별의별 전략을 내세워 보아도 이미 기울어버린 전세를 뒤집을 순 없었다.

소피아르를 전진기지로 만들던, 샤르칸의 명에 따라 흑마법사들이 이번 전투에 참여한 것이 컸다.

와이번이나 박쥐, 그리핀의 시체를 일으켜 그걸 내다 꽂아, 폭발시켰다. 몸집이 크면 클수록 폭발의 위력은 거셌다. 살점과 쪼개진 뼈들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말간테와 마물의 일차 접전은 일방적이었다. 흑마법사들의 명을 받은 몬스터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점점 조여나가기 시작했다. 시체들이 그들에게 떨어져 내리고, 굴러 들어갔다. 그리고 폭발했다.

 전술은 매우 효과적이라, 죽은 이의 시체는 또다시 폭탄이 되어 죽음의 굴레가 시작되었다. 결국, 말간테의 1차 원정군은 모두 전멸해버렸다. 1 왕자도 전사했다. 말간테 왕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발테리안 마을은  이상의 칩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루나가 거대한 성벽을 세워버렸다. 거기에 네코이가 루시안에게 폭발포션을 정식으로 배워 찍어내기 시작하면서 방어는 더욱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꾸 대수림을 통해 넘어오는 몬스터들을 엘프가 막아 세우고 나섰다. 내부 수습이 끝난 것이다. 보탄이 2차로 원정군을 이끌고 국경선에 도착했고, 그는 엘프와의 지난한 협상을 통해 연합을 이뤄 공동 방어 전선을 폈다.

한편, 엘프 숲을 빠져나온 쿠드비온은 랑기어 교단의 섬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 소피아가 마물들에게 잠식당하고, 아기아스 교단이 그곳을 차지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수도 소피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섬을 벗어나, 왕성에 자리를 튼 아기아스와 대면하였다,

“아기아스님, 저는 인간의 멸살을 바랍니다. 인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필요가 없는 해충 같은 존재들입니다.”
“장차 나의 신도가 될 이들인데, 죽여서야 하겠는가?”

쿠드비온은 아기아스 앞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사정하고 또 사정했다.

“제가 차원문이동장치를 가져다 바치겠습니다. 저의 염원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드워프 일족을 배신하겠다는 건가?”
“이제는 다 필요 없습니다. 족장이란 자는 저를 버렸습니다. 저 또한버려주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기아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하하, 바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
“군대를 빌려주시길 바랍니다. 드워프 부족을  손아귀에 넣어 버리고,  세상을 정화하겠습니다. 인간만 없으면 됩니다.”
“사르칸, 친위대와 병력을내어 이자를 도와라!”
“알겠습니다. 아기아스님!”

아기아스가 왕좌에 앉아, 히죽거리며 웃었다.

“드워프가 알아서 재밌는 장난감을 가지고 온다니.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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