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79화. 깨어지는 봉인
배는 빠르게 나아갔다. 중간에 갈 곳도 없고, 제나르로 직행하면 되었다.
“아라 항에서 정북 방향이니까. 달리자!”
배의 마도 엔진을 최대로 높여서, 달리기 시작했다.
루시안이 키를 잡으면서 해로를 확인하고 있는데, 그 흰 여우가 도도하게 걸어들어온다.
“응? 넌 왜 왔니?”
여우는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뒤에서 구리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구리 특유의 발걸음 소리가 있다.
“은호 찾았다!”
여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리고는 꼬리로 눈을 가린다. 구리가 다시 달려나간다.
“허, 그래 잘 놀아라! 그런데, 네 이름이 은호야?”
여우는 꼬리를 내리고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이 다 되었는지, 도도하게 다시 걸어 나간다.
“잘 지내면, 좋은 거지. 뭐.”
항해는 2교대로 했다. 발터가, 조금씩 배워서 하고 있다. 한참을 그렇게 항해를했다. 낚시도 하고, 무인도에 들려서 잠시 쉬기도 했다. 그러길 며칠이 지났다.
저 앞에 세이렌 섬이 보인다. 저 옆길로 빠져나가면, 제나르다. 얼핏 보니 한 곡 뽑으려는 모양이다. 무시했다. 그리고 다시 한참을 갔다. 익숙한 몬테 항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여전하네요.”
“야, 우리 집에서 하루 묵고 가자.”
“이젠, 아주 자연스러우시네요?”
“몇 번 오다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아졌어!”
타몬트의 집으로 향하니, 마침 밖에 나와 있던 샤이나와 마주쳤다.
“도련님, 이젠 아예 눌러 사시는 겁니까?”
“아닌 거 알잖아요? 이번에도 숙박입니다.”
“여기가, 여관입니까? 도련님?”
“하하, 좋은 면에서 그래! 자자 들어가자!”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련님이 자주 들어오시니 보기 좋습니다.”
“하루 또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늘 묵으시던 곳을 청소해두겠습니다. 응접실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응접실에 앉아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라펠라에게 연락해 보니, 드워프 마을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럼, 내일 바로 드워프 마을로 가면 되겠네.”
“응, 그래 야지. 물건 전달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무슨 일이 더 있을지 알 수가 없으니.”
“가보면 알겠지.”
한편, 루시안을 쫓던 호창의 일행은 이미 멀리 사라진 배를 찾을 수가 없어 난감해하고 있었다.
“어디로 간 거냐고!”
부하 한 명이 침을 손에 뱉더니, '탁' 친다. 북쪽으로 튀었다.
“저 쪽입니다.”
“,,,,,,,”
그래도, 평소 감이 좋다고, 자자하던 놈이라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그들은 세이렌의 공연에 넋을 잃고 말았다. 너무나도 감격해버린 나머지, 그곳에 배를 대고 내리기까지 했다.
호창은 이들보단 수련의 경지가 깊어, 내공을 일으켜 정신을 차렸다. 자신만 남고 다 세이렌의 치맛자락에 놀아나고 있었다. 황급히 배를 몰아 거길 빠져나갔다.
그렇게 그는 표류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곳은 회색 신전이 들어선 어느 섬이었다. 그의 눈엔 광신도의 모습으로 비추어진 곳이었다. 이때가, 루시안 일행이 드워프의 땅에 도착한 때였다.
회색 신전, 겉으론 희생의 신 랑기어를 모시는 신전, 스발란에 속하지 않아 이교도로 불리는 이들은 사실, 아기아스 교의 본거지였다. 이곳에서 교주로 있는 사르칸 나발론은정말 인자하고 푸근해 보이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이는 1사도 바실 보머였다.
“1사도님, 더 이상은 신의 파편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있는 거로 할 수밖에요.”
“제국을 비롯한 제나르, 말간테에서 저희 말단 지부를 자꾸 들춰내고, 잡아들이니, 활동 입지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교단의 검을 지원해드리지요. 가서 죽여버리세요. 방해하는 자는 모조리.”
“예, 1사도님.”
“보아하니, 소피아르는 문제가 없는 것 같군요?”
“예, 소피아르는 아주 편합니다.”
“소피아르를 진의 중심으로 삼습니다. 여왕과 오크의 세뇌작업은 어떻습니까?”
“여왕 쪽엔 작업이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오크들은 세뇌가 완료되었습니다.”
“좋군요. 아주 좋습니다. 각 지역에 희생의 마법진을 깔아야 합니다. 더 힘내주시길 바랍니다.”
교주는 교단의 대외적인 일을 맡겨둔 인물인데, 충성도도 높고 일 처리도 마음에 들었다.이어서, 1사도는 다른 사도들을 불러모았다.
“3사도는 아직인 것입니까?”
“각자, 일을 맡아 나간 후론, 계속 실종입니다.”
“흐흠. 알 수가 없는 일이군요. 그리고, 다들 얼마나 수거하셨습니까?”
2사도가 파편 하나를 꺼낸다. 제법 크기가 있다. 1사도가 흡족해하며, 받아든다.
“아스타리안 대륙도, 다른 곳도 도대체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끌끌.”
“맞습니다. 1사도님. 일전에 엘프들이 난리 친 후부터 이렇습니다.”
5사도가 곧바로 엘프 탓을 한다.2사도도 말을 덧붙였다.
“그, 루시안인가 하는 그자들이 더 문제일 겁니다. 그들 손에 파편이 얼마가 들어가 있는지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1사도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구할 수 없다면, 생 제물이라도 써야겠지요. 지금부터 마녀의 숲에 다음, 마법진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제국의 인물들을 움직여서, 수인과 엘프의 납치를 주도하세요. 인간보다 힘이 넘쳐 맛이 아주 좋습니다.”
1사도의 표정이 아주 기기괴괴했다. 다른 사도들은, 그에 압도되어 말없이, 지시를 따랐다. 각자 마법진을 분할 받았고, 재료를 구하러 떠났다.
2사도도 일단 자리를 일어났지만.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왜, 우리가 마법진의 일부인 것 같지?’
1사도는 신전의 지하실에 내려와 있었다. 그의 앞에는 기괴한 마법진이 있었고, 그 중앙에는 하얀 피가 담긴 잔이 있었다. 한쪽 벽에는 호창이 전라의 몸으로 거꾸로 매달려있었다.
“안 그래도 신선한 마나의 제물이 필요했는데, 잘 되었군요.”
그가 마법진의 곳곳에 각양각색의 신의 파편을 놓았다. 그리고 호창의 머리 아래에 커다란 나무통을 가져다 놓았다.
“이거 놔! 너, 누구야! 누구냐니까! 여긴 어디야!”
“착한 아이는 소리치지 않습니다.”
호창이 뭐라고 소리치든 말든 1사도는 휘파람을 불며, 칼을 들어올렸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칼날이 그의 목의 피부를 베어내고, 혈관을 잘라낸다.
“꺽….”
피가 콸콸 쏟아진다.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한 방울도 밖으로 튀지 않고 나무통으로 조용히 흘러 들어간다.
“좋습니다. 향이 아주 좋아요.”
그가 혈항을 음미하듯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호창의 혈색이 완전히 창백해진다. 몇군데를 추가로 그어 남은 피가 없도록 꼼꼼히 빼낸다. 그리고, 복부에 손을 쑥 쑤셔 넣은 채로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거린다.
“호오, 제법 실합니다.”
피가 묻은 벌건 손에 무엇인가 들려있다. 마나석 같은 동그란 푸른 결정체가 더운 피를 묻힌 채 김을 뿜어낸다.
호창의 눈이 완전히 허옇게 뒤집힌다.
“흐음, 네빌론 대륙인이라, 몇몇 더 잡아달라고 해야겠습니다.”
그가 피 묻은 손을 쓰윽 핥으며, 피를 음미했다.
“맛이 아주 좋아요.”
마법진에 호창의 피를 뿌리고, 푸른 결정체도 두었다. 주문을 읊자, 마법진에서 검은 기운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피를 타고 거칠게 질주하여 결정체도, 신의 파편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그 피가 가운데 술잔으로 향한다. 술잔 속, 하얗던 피가 서서히 붉게 물든다. 그러다 완전히 붉어지기 직전. 마법진이 힘을 다한 듯 사그라든다.
“이런이런, 재료가 더 필요하겠군요.”
그가, 흉신악살처럼 웃어 보인다. 광기에 휩싸인 그의 모습이 아주 기괴했다.
루시안 일행은 만달리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라펠라를 다시 만났다.
“누님! 여전히 건강하시네! 난 누님 생각에 술 한 모금도 못 넘겼다. 아닙니까?”
“타몬트?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아무도 안 믿지 않겠니?”
“하하하”
“잘 지내셨어요?”
“보다시피!”
일행은 쿠드비온에게 향했다. 쿠드비온도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새 다녀온 것인가?”
“떠난 지대략 1년은 되었습니다.”
“끌끌, 인간과 드워프의 시간은 다르다 보니 그렇다네. 하하하”
루시안이 쿠드비온이 말했던 재료를 꺼내 놓는다.
“오오, 그래 이것들만 있으면, 고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
“얼마나 소요되는 겁니까?”
“재료가있어도 뚝딱하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서 말일세, 한 달에서 두 달은 걸릴걸세. 그때가 되면, 제국의 상공에 차원문 옮겨지면서 열릴 테지. 옆에 아가씨의 노력이 어떠한 결실을 맺을지 궁금하군,”
라펠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럼, 저희는 돌아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남은 건, 시간에 맞추어 제국으로 가거나, 마녀의 숲 봉인을 살피는 일이 되겠군요.”
“그렇지, 나중에 다시 볼 일이 있을걸세. 다녀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그는 희귀 광석과 보석, 무기 그리고 통신용 아티펙트를 주었다.
“내가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하겠네. 드워프 일족을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하겠네. 연장자로서 말일세!”
일행은 그렇게, 만달리안을 떠나, 제나르로 돌아왔다. 배를 타고 소피아르로 향했고, 그들의 보금자리인 발테리안에 도착했다.
“네코이! 잘 있었어?”
“오, 루시안 돌아왔네? 안 그래도 공방 이름을 네코이 공방이라고바꿀 참이었는데.”
“꿈은 얼마든지 꾸라고!”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점심 라펠라와 일행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간 있었던 일을 알려줄게. 일단, 제국을 비롯한 각 나라에서 교단이 무언갈 꾸미고 있다는 건 확실해. 마을에 이상한 마법진 같은 걸 깔려다가 사살된 적이 있거든.”
“교단이 확실한 거예요?”
“검은 바탕에 흰색 사슴. 패가 없다면 신체 어딘가엔 새겨져 있더라고, 혓바닥이건 입천장이건 간에 말이야.”
“무슨 목적인지는 파악이 된 건가요?”
“다들 처음 보는 형태라고 했어. 그냥 찝찝해서 제거한 거였지. 그런데, 그런 게 여러 군데 발견된 거야. 제국이 혼란에 빠졌지. 드워프와 다툴 때가 아니란 걸 안 거지.”
“그래도, 차원문이 클 텐데요?”
라펠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도에만 병력을 집중적으로 배치한다. 그걸로 대책은 끝이었어. 황제가 그러더군. 제깟 드워프가 날뛰어봤자 얼마나 날뛰겠냐고. 차원문이 애들 장난이냐고”
“대책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라펠라가 테이블을 세게 내리친다. 울분에 차 있었다.
“이 미친 귀족 돼지 새끼들이 말이야! 말을 안 들어 처먹어! 아우!”
“큼큼. 그렇군요.”
“그리고, 내가 그들의 본거지를 찾다가, 뭘 찾았는지 알아?”
그녀가 테이블에 검 한 자루를 올려둔다..
“라칸의 무덤을 발견했어. 그가 쓰던 검, 검술과 함께.”
“누님! 누님! 내 대검이말이오, 라칸이란 자의 친구가 썼던 거였다는 거 아닙니까? 나도 무덤을 발견했다니까요?”
둘이 한참을 떠들었다.
“누나?”
“아! 미안. 교단에서도 위기를 느낀 모양이지, 어느 순간부터는 모습을 완전히 감추어버렸어. 그 뒤로 조사단원들의 납치 살해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 네 연락을 받을 때까지도.”
“제국은 그나마 실마리를 잡았다 치면, 다른 나란 전혀 모르고 있겠군요?”
“내가 각국에 서신을 보내긴 했었어. 소피아르는 콧방귀를 끼더라. 말간테에선 보탄이, 제나르에선 국왕이 직접 고맙다는 답신을 보내줬지.”
“각자 알아서 대책을 세우고 있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한 가지 더,스발란 종교연합이 이교도로 낙인찍은 랑기어 교단이 아기아스 교단과 연관이 있다는 정보야.”
“확실한 증거는 없는 거죠?”
“그렇지. 랑기어에 직접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했는데, 그냥 종교단체라고 하더라. 아무런 문제도, 접점도 없다고.”
“일단은, 드워프나 엘프가 신호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겠네요.”
“그동안 바쁘게 달렸으니까. 쉬는 시간이지 뭐.”
“그러네요. 공방도 좀 둘러보고, 벨가님도 다시 찾아뵙고 그래야겠네요.”
일행들은 그렇게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현재로선 딱히,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 마치, 폭풍이 치기 전의 고요함 같은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