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45화. 대수림으로 (3)
계속해서, 윽박지르고 고성을 내지르니 루시안도 결국 화가 났다.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인상을 썼다.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실례가 되는 행동입니까? 이런 분인 걸 알았으면 부탁을 듣지 않는 거였는데 말입니다.”
“이보게, 테렌페! 일단 진정하게! 진정!”
나드비온이 흥분해서 날뛰는 테렌페의 몸을 붙잡는다. 나드비온의 키가 크고, 덩치가 워낙에 큰 탓에, 키가 제법 큰 축에 드는 테렌페가 나드비온의 털에 폭 파묻힌 꼴이 되었다.
“자네라면 진정하게 생겼나! 하렌츠라고 하질 않나, 하렌츠라고! 이봐 거기 인간! 하렌츠 그로하임이 맞는가? 정말 하렌츠 그로하임이야? 맞냐고!”
일행과 나드비온과 테렌페는 탁자에 앉아있었다. 기존에 있던 탁자가 좁아서 나드비온이 어디선가 넓적한 큰 바위를 가져오더니, 손날로 반듯하게 잘라 만든 탁자였다.
찻잔이 김이 모락모락 난 채로 그대로 있다. 누구 하나 손을 대지 않는다. 테렌페는 여전히 불퉁한 얼굴로 루시안을 째려보고 있었다.
“하렌츠 이자가! 내가 그리도 생각하는 걸 알면서! 내가 준 선물을 홀라당 이런 인간한테 넘겨줘? 잠깐만! 벨가님과 타니엘도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벨가님은 그렇다 해도, 타니엘이 나를 속여? 어!”
이젠 아예 탁자를 내리치고, 엘프 여왕한테까지 화를 내고 있다. 다행인 점이라면, 루시안에게 팔찌와 반지를 내놓으라고 하질 않는다는 점이다.
“이보게! 테렌페 진정하래도!”
“진정하게 생겼나! 자네도 하렌츠를 알지 않는가!”
“아니까,진정하라는 걸세. 벨가님이 말을안 한 걸 보면 하렌츠가 알리길 원치 않았다는 거 아니겠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친구가 그 당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자네와도 연락을 끊었던 것 아니었겠나?”
“그래도 그게 아니잖은가!”
목에 핏대를 내세우며 화를 내는 테렌페를 나드비온이 진정시키려 애쓴다. 나드비온이 화제를 돌리려고, 루시안을 끌어들인다.
“어이, 거기! 하렌츠는 어땠나?”
“…하렌츠님은 제가 그분의 공방에 들어섰을 때, 백골 상태였습니다. 그분을 묻어드리려고 유골에 손을 댄 순간 그분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영혼?”
“영혼을 잠시 얽매어 두는 유품 덕에 저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무정한 친구라고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이야기를 듣던, 테렌페가 힘이 쭉 빠진 듯 자리에 주저앉는다.
“하아! 무간테···. 무간테 이 친구가! 그건 무간테의 유품일 거다! 그는 순수한네크로 학파의 학자였었지. 나와 무간테그리고 하렌츠 셋이 죽이 참, 잘 맞았어! 하렌츠는 당시의 뛰어난 연금술사였고 말이야···.”
뜨거워 보이는 차를 단숨에 들이켠 그는,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콸콸 부은 다음 한 번 더 들이켰다.
“하렌츠의 가족이 인간들의 추악한 욕심에 희생되지 않았다면, 나와 무간테, 하렌츠는 행복하게 우정을 쌓으며 지냈을 거다! 내가 그래서 인간을 싫어해! 고대의 전쟁 이후로 인간은 바뀐 게 없어!”
성질이 난 그가 찻잔 손에 쥔 채로 박살 내버린다.
“무간테가 겨우 목숨을 건진 하렌츠에게 목걸이를 내밀고는 웃으며 아무 말 없이 보냈다는 걸, 나도 나중에서야 겨우 살아남은하인을 통해 들었다. 그 당시에 나는 셋이서 구해낸나드비온의 치료를 위해, 그를 데리고 대수림에 가 있었으니까.”
테렌페가 울분을 쏟아내듯이 말을 쏘아댔다. 그리고는 슬픔에 잠긴 채 말을 이었다.
“그 뒤로 그 친구는사라졌다네. 나에게 연락도 없이 말이야! 나한테 뭐라고 한마디는 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냔 말이야!”
나드비온도 다른 일행도 다들 잠시 말을 잊고 침묵을 지켰다. 문득, 무엇인가가 생각난 루시안이 아공간에서 하렌츠의 연금서를 꺼냈다.
“그게 무엇이냐?”
루시안은 대꾸 없이, 연금서에 끼워둔 정체불명의 종이를 빼내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마지막으로 그분과 이야기했던 말이 있습니다. ‘연금술의 길에서 빛을 만나리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종이에 빛이 스며들어 글자가 떠올랐다.
“저는 단순히 연금술사 간의 대화로 생각했습니다만, 그때는 몰랐는데, 이상하게도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분이 남긴 책에 끼어있던,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 종이가 끼어있던 이유를….”
테렌페가 떨리는 손으로 정체불명의 종이 아니, 하렌츠가 남긴 편지를 읽어내린다.
나드비온이 루시안의 일행에게 눈짓한다. 테렌페만의 시간을 위해 모두, 자리를 피해줬다.
멀리, 테렌페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한을 푼 모양이군, 난 테렌페 덕에 목숨을 구하고, 그 덕분에 수인족이 큰 은혜를 입었다네. 또, 그 때문에 그는 친구를 잃어야 했다네. 그때부터, 나는 죄인의 심정으로 미안함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네.”
나드비온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돈다.
“그런데, 자네들은 왜 대수림에 온 것인가? 테렌페 때문에 온 것 같진 않고.”
“아기아스의 부활을 꿈꾸는 자들에 대해, 엘프의 협조를 구하고자 왔습니다.”
“아기아스라고 했나 지금!”
나드비온이 깜짝 놀라서 되묻는다.
“그렇습니다만?”
“이런! 이거 수인족도 엘프와 같이 행동해야 할 상황이군! 테렌페는 일단 저리 두세나! 다들, 나를 따라오게! 엘프족 여왕을 만나야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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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페!
자네의 아이가 아주 예쁘게 컸더군!
벨가님도 자네의 아이도, 내가 말하지 말라 당부했다네.
몇 번을 쓰고, 지우고 버린 이 글이 자네에게 전해질진 모르겠네. 연이 닿는다면 모르겠네만.
자네가 아직, 나를 그리워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네.
너무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잘못은 내가 한 것이 아닌가?
나 하나 때문에 무간테가 목숨을 잃었고, 내 가족이 죽임을 당해야 했네.
나의 오만함이, 나의 자만심이, 나의 믿음이 원인이었네.
그대들의 말을 들어야 했네, 그들을 믿지 말았어야 했네.
먼저 떠나간 무간테를 내가 가서 똑바로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네.
내 소중한 벗들에게 내가 저지른 과오가 너무나도 크다네.
그때 자네들의 말을 들었다면, 무간테도 자네도 행복했을 텐데 말일세.
못난 나를 잊어주게나.
나로 인해 떠나간 이들을 위해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갈 것이니.]
“못난 친구 같으니라고! 장난기 많던 친구가 이런 진지한 글을 남기다니. 큭! 어이, 무간테, 거기서는 하렌츠를 많이 혼내주게나. 평소처럼 웃고만 있지 말고. 내가 갔을 때 반가이 반겨줄 수 있도록.”
그는 소중히 편지를 어루만진다.
“오늘따라 비가 많이 오는군, 그칠지 모르는 장맛비가 말이야!”
#
“타니엘! 오랜만에 보는구나!”
“나드비온 아저씨!”
타니엘이 나드비온을 반갑게 맞는다. 뒤에 있던 루시안 일행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아버지는 잘 만나셨습니까?”
“뭐, 그런 것 같네요. 이거, 벨가님의 깜짝 선물이었나요?”
“벨가님의 감이실 겁니다. 그분은 굉장히 감이 좋으시답니다.”
다 알면서도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테렌페 때문에 진이 다 빠져버렸다. 루시안이 타니엘에게 나드비온의 합류를 알렸다.
“나드비온님이 이번 일에 참여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엘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엘프 회의에서는 이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여기에 수인족이 합류하겠지만요. 주신 나침반의 힘으로 구슬을 수색하는 수색팀을 꾸릴 겁니다.”
“내가 네로니아에게 전해둘 테니, 강인한 아이들 몇을 이곳으로 보내라 하지. 그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 타니엘!”
”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나드비온이 몸을 놀려 잽싸게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엘프 여왕이 존대하는 저 수인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일행 모두 의아한 얼굴이다.
“다들 의아하신 표정이시군요. 저분은 선대 수인족 왕이십니다.”
“어쩐지 겁나 세 보이더라!”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위그드라실님의 초대입니다.”
타니엘이 뒤에 서 있던 엘프에게 손짓하니, 그가 무언가를 들고나온다. 나무함이었는데, 열어보니 일행 수에 맞게 구리와 피닉스의 몫까지 준비된 반지가 있었다.
“마나의 수발을돕고, 몸의 피로도를 줄여주며, 마나의 회복을 도와주며, 정신 마법에 강력한 저항을 하는 반지입니다. 위그드라실의 축복이 깃든 반지이니 소중히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대륙의 평화를 위해 나서주신 점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녀가 내민 반지는 잎사귀와 나무 덩굴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반지였다. 각자 끼워보고는 맘에 들었는지 표정들이 밝다. 구리도 반지를 끼고 좋아했다.
“그럼,안내를 받으시면 됩니다. 다음에 다시 뵙기를”
그녀가 품에서 민들레 솜털 같은 식물을 꺼내더니 공중에 띄운다. 빛이 새어 나오면서 작은 홀씨 같은 빛을 뿌린다. 일행의 앞에서 떠서는 따라오라는 듯이 움직인다.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것을 따라갔다.
한참을 그렇게 따라간, 그들의 눈앞에 하늘로 높게 치솟은 거대한 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의 둘레와 높이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로 컸다.
<어서들오세요. 금을 먹는 자와 인간분들>
머릿속에 울리듯 목소리가 퍼진다.
“형아! 목소리가 들려!”
“위그드라실?”
<제가 당신들을 부른 위그드라실입니다.>
<거기, 뒤에 당신! 정말 위험한 걸 들고 다니시는군요? 배짱인가요?>
“저요?”
<그래요, 본인도 잘 알지 않나요?>
“어, 그게, 그….”
발터가 당황해 말을 흐린다.
<에휴, 어쩔 수 없죠. 그것을 앞으로 내어주세요.>
발터가 단검을 풀어 앞으로 내밀자, 위그드라실에서 빛의 구체가 떨어져 나와 단검을 감싼다.
<정말, 무심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용감한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벨가를 믿고, 그러는 건지>
세계수가 투덜거린다. 발터가 고개를 푹 숙인다. 괜히, 죄지은 기분이 든다.
단검에서 빛무리가 사라지더니 스르르 발터의 손으로 돌아왔다.
♣ 축복받은 나무의 뿌리
- 인간에 대한 증오도 엘프에 대한 증오 잊은 단검
- 단검이 꽂힌 자리를 중심으로 적을 뿌리로 묶는다
- 테로키나움의 정수와 합쳐져 오러와 마나의 증폭률과 절삭력이 증대되었다.
- 주인을 기억하고 돌아온다.
“발터! 앞으론 미움은 안 받겠다.”
루시안이 발터에게 바뀐 점을 설명해주었다.
“정말? 와! 감사합니다. 위그드라실님!”
루시안은 위그드라실의 목적을 환기해줬다. 단검 때문에 불렀을 리는 없을 테니까.
“저희를 따로, 부르신 이유가 있으실 텐데요?”
<아참! 저 거슬리는 것 때문에 정신을 빼앗겼네요. 흠흠>
<차원문이 불안합니다. 봉인되기는 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버렸어요.>
<봉인된 아기아스 옆에 있어서인지, 다른 영향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드워프에게 가신다면, 차원문을 봉인한 그들에게 방법을 알아봐 주세요.>
“어차피, 그들에게 아기아스 교의 존재를 알리고, 나침반을 전달하러 가려는 길입니다. 간 김에 알아보겠습니다.”
<대륙이 불안해하고 있어요. 지키는 자 벨가의 인정을 받은 그들이라면,>
<기대를 걸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워낙에 잘나서 말입니다. 하하”
“우리 형, 누나들 어~엄청 강해요!”
위그드라실의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호호! 제 기대에 꼭 부응해주세요. 제가 할 말은 다 끝났습니다.>
<자, 그럼, 혹시? 물어보실 말 있으신가요?>
“혹시, 미래 같은 것도 보십니까?”
타몬트가 무언가 기대하는 듯이 물어본다..
<여자 친구를 물어보시는 거면, 대답해 드리지 않아요.>
“야! 타몬트! 이게 진짜!”
라펠라가, 타몬트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윽!”
<저한테 여자 친구를 물어본 분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형이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발터가 나서서 사과했다.
<미래라, 미래. 가끔, 단편적인 것을 보긴 합니다.>
<하지만, 한 분에게만 알려드릴수 있겠네요. 환수의 사랑을 받는 이여.>
위그드라실이 루시안에게만 무어라 말을 전한다.
위그드라실의 말을 들은 루시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일행들이 의아한 듯 쳐다보지만, 루시안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제, 헤어질 시간입니다. 엘프 여왕을 통해 선물을 받으셨겠지요?>
<추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세계수의 축복을 말입니다.>
<여러분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기를!>
세계수에서 환한 빛이 번지더니, 일행을 포근히 감싼다.
<아! 내 정신 좀 봐! 환수의 사랑을 받는 이에게 개인적으로 부탁을 드리고 싶군요.>
<요즘 들어, 줄기가 시들시들하고, 뿌리가 축축 처지는 게,>
<아무래도, 특제 영약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대라면, 저를 위한 특제 영약을 준비해줄 수 있겠죠?>
<다음에, 다시 만날 때, 저에게 영약을 가져다주세요.>
<그리고, 이건 의뢰를 잘 봐달라는 선물입니다>
위그드라실에서 빛무리가 루시안의 손으로 옮겨진다. 빛이 가신 손바닥위에는 나뭇가지 2개와 잎사귀 5개, 맑고 투명한 구슬 5개가 놓여 있었다.
<그럼, 여러분들을 밖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마나 친화도에 따라 어지럼증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일행의 시야를 밝은 빛무리가 덮친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에 그대로 삼켜져, 세계수 앞에서 그들의 형체가 사라졌다.
<고난에도 굴하지 않기를, 굳건히 믿어주기를>
세계수의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 듯 흔들렸다. 마치 인사를 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