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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84화 (완결) (184/184)

환생의 정석 184화

며칠 전.

율리안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

인류가 한 번도 정복하지 못했던, 북쪽 바다 너머 끝.

세계의 끝에 위치한 깊은 균열.

얼마나 깊은지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고,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배를 타고 북해를 넘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는데, ‘빛이 닿지 않는 곳’ 근방에 도착하자 율리안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아.”

저 안으로 어떻게 들어간담.

시꺼먼 우주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새로운 세계.

어쩌면 저곳은 지옥으로 향하는 문일지도 몰랐다.

“혀어어어엉니이이이임!”

저 깊은 심연을 향해 크게 외쳐봤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빈첸의 존재는 어렴풋이 느껴졌다.

“젠장!”

율리안을 수행하기 위해 함께 파견된 제론은 크흠, 헛기침을 했다.

“죄송한 말이지만 여기서 부르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알아요. 안다고요.”

율리안은 한참 동안이나 뱃머리에서 서성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야.”

아무리 신력을 겹겹이 둘러싸 몸을 보호해도, 저 무시무시한 공간은 빛조차도 빨아들여 버리는 공간이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으으, 젠장!”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아덴카를 찾아온 여자는 지나치게 강했고, 그 여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율리안은 베르사를 떠올렸다.

‘어머니……!’

그래.

아덴카에는 어머니가 있어.

나를 아들로 인정해 준 어머니가.

그는 마음을 다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해 뛰었다.

으으으,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율리안 공자님? 한 2㎝ 정도 뛰었는데요.”

“…….”

율리안은 눈을 떴다.

실제로 2㎝ 움직였다.

“하아.”

율리안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갔다올게요. 제발 살아 있길 빌어줘요.”

진짜로 뛰어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악!”

어마어마한 중력이 느껴졌다.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

그곳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왜 이딴 곳에서 수련하냐고오오오!”

온몸이 박살 나는 것만 같았다.

공간 전체가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지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중력이 몸을 짓눌러서, 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런 곳에서 형님을 어떻게 찾냐고!’

무한히 떨어지는 공간이었다.

바닥이 존재하는가.

그것마저도 확실하지 않았다.

떨어지고, 또 떨어져도, 바닥에 닿지 않았다.

불현듯 두려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 미아 된 거 아니지……?”

어마어마한 무력감과 탈력감이 율리안의 몸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가 시끄러운 것 같아서 와봤더니.”

“형님!!!”

빈첸이었다.

놀랍게도 빈첸은 이곳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으아아악!”

율리안은 계속해서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는 계속해서 낙하하는 기분이었다.

빈첸은 한참 동안이나 그 옆에서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율리안은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형님은 왜 안 떨어져요?”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떨어지고 있는데, 빈첸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과 빈첸이 멀어져야 정상인데, 한 자리에 있었다.

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도 안 떨어지고 있다. 정신 차려.”

그러나 그 말만으로 평정심을 되찾기는 어려웠다.

이 공간은 특수한 공간이었고, 율리안의 힘으로 극복하기에는 지나치게 생경한 곳이었다.

“어쩔 수 없나.”

빈첸이 그의 영역을 전개했다.

빛조차 닿지 않는 곳이건만, 이곳은 빈첸의 세계가 되었다.

“허억, 허억!”

그제야 율리안은 바닥에 엎드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서? 왜 찾아온 거냐? 아직 깨달음이 완전하지 않은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덴카가 위험해요.”

“아덴카가 위험하다고?”

빈첸은 고개를 갸웃했다.

현시대에 아덴카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거의 없었다.

신전과의 관계.

바르티칸가와의 관계.

케르빌가와의 관계 등을 생각해 보면 그 누구도 아덴카를 위협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데이아 누님도 당해낼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났어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상이 바뀌었다.

“이런, 미, 미친.”

빈첸의 영역이 사라졌다.

율리안의 발이 닿은 곳은 아덴카의 본가였다.

* * *

아덴카의 본가.

빈첸은 붉은 머리카락의 한 여인을 발견했다.

잠시 동안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죽어. 이제는 검으로 안 싸워.”

“거기까지.”

빈첸은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어째서 네디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500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네디아는 그에게 있어서 스승이었고, 친구였고, 동반자였다.

빈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너야말로, 내 옛 이름을 어떻게 알아?”

“옛 이름?”

빈첸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육체 너머의 본질, 존재의 본질을 느껴보았다.

“너는 용인가?”

“그래, 한눈에 잘 알아보네.”

그녀의 눈이 빈첸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내 친구와 함께할 자격은 꽤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순간,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이것은 네디아의 영역이었다.

용이 펼쳐낸 작은 우주 안에서 빈첸은 반가운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나는…….’

여지껏 제대로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네디아가 많이 그리웠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네디아와의 시간들은 늘 즐거웠다.

네디아와 함께 사미온을 넘어설 검을 연구했고, 그리하여 탄생한 검이 이능검격과 파사검이었다.

“검을 들어.”

“…….”

네디아에게서 호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 그랬었지.’

네디아는 늘 호전적이었다.

그 성격 때문에 네디아는 종종 사고를 치기도 했다.

이를테면 어느 가문 귀공자의 코뼈를 부러뜨린다던가.

“그녀는 뛰어난 스승이었으나,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네디아가 빈첸을 겨누었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었다.

“네가 내 친구를 가질 자격이 있는지, 직접 확인해야겠어.”

빈첸은 칸을 뽑아 들고서 네디아와 검을 마주쳤다.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단순한 맞부딪침이 아니었다.

‘이능검격의 검로다.’

빈첸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잊고 있던 과거의 추억들이 하나, 둘씩 생각났다.

이능검격과 이능검격.

둘의 검로는 서로를 잡아먹을 듯 검로를 생성시켰다.

일반적인 눈으로는 읽어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순식간에 수백, 수천 번의 합이 오갔다.

‘즐겁다.’

네디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빈첸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이쯤 되면 너, 꽤 한다? 라며 투덜거릴 때가 되었는데.’

그때,

네디아가 말했다.

“너, 꽤 한다?”

네디아의 얼굴을 하고 있는 용은 네디아의 습관을 똑같이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오른팔을 뻗겠지.”

빈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페인팅이다.”

피하지 않았다.

네디아의 검 끝이 빈첸의 얼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다음 이어지는 검격은 이능을 배제한 단순한 찌르기.”

빈첸이 오른 손날로 검의 면을 쳐냈다.

그러자 네디아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빈첸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네디아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녀는 화가 난 나머지 이후, 큰 기술들을 사용하기 위해 틈을 보이곤 했다. 결과는 늘 내 승리였지.”

네디아는 데이븐(빈첸)에게 이능검격의 검로를 가르쳐준 스승이기는 했으나, 그 본신의 검술 실력 자체가 빈첸보다 뛰어났던 건 아니었다.

“젠장!”

네디아는 분한 듯 빈첸을 노려보았다.

빈첸은 빙그레 웃었다.

네디아가 이대로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면 결국 말도 안 되는 공격들을 하곤 했는데.”

한 번은 마법폭탄을 던진 적이 있었고.

또 한 번은 품에 숨겨두고 있던 암기로 공격한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열심히 막아야겠군.”

네디아가 말했다.

“영면.”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용의 권능을 담은 목소리.

용언이었다.

용언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언령이었고, 이곳은 용의 세계였다.

용의 세계에서 펼쳐진 언령은 빈첸의 영면을 강요했다.

“응?”

네디아는 자신의 용언이 통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붉은빛 세계가 어느덧 백색 세계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 세계가, 먹히고 있어? 인간한테?”

빈첸이 영역을 전개했다.

빈첸의 영역이 네디아의 영역을 집어삼켰다.

빈첸은 빙그레 웃었다.

“나는 이쯤 되면 패배를 인정하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다, 네디아.”

네디아의 검이 땅에 떨어졌다.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처음 빈첸을 보았을 때부터 무엇인가를 느끼기는 했다.

그런데 영역이 펼쳐지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설마…….”

“그래.”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지.”

500년의 시간을 넘어, 재회할 수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아넬린은 네디아가 죽었다고 말했다.

“말이 안 되기에, 기적 아닌가. 마치 외팔이가 폭풍검을 꺾었던 것처럼.”

“…….”

“안 그래, 스승님?”

네디아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유지했다.

“네가 진짜로 데이븐이라고? 이게 어떻게 가능해?”

“어떻게 하다 보니.”

사실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스승과 내가 다시 만났다는 거겠지.”

데이븐의 기억 중,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기억.

그 추억에는 늘 네디아가 있었다.

네디아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한참 동안 현실을 부정하던 네디아는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나쁜 자식아! 내가 너 때문에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아!”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외침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빈첸의 영역에도 쩌적- 균열이 생길 정도였다.

훌쩍거리던 네디아는 이내 서러운 듯 펑펑 울었다.

“나는! 너를 영영 못 보는 줄 알았다고!”

네디아는 울면서 많은 말을 쏟아냈다.

워낙 우다다 쏟아내는지라 기승전결 같은 건 없었다.

네디아가 또 용의 포효를 토해냈다.

“네가 내 첫사랑이었단 말이다!!!”

당시 네디아는 태어난 지 겨우 100년밖에 안 된 용아(龍兒)였다.

어린 용들은 인간세계를 경험하며 많은 경험과 감정을 배운다.

그 과정에서 데이븐을 만났다.

“네가 가문에 억울하게 갇혔을 때, 나는 다 죽여 버리려고 했어!”

그렇지만 겨우 100살짜리 용아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힘은 겨우 6성 내지 7성 무인 정도였으니까.

용언도 다룰 수 없는 어린 용이었다.

“네가 죽었을 때 나는 엄청엄청 슬펐다고. 나는 빨리 성장해야 했어. 그렇지 않으면 너무 슬퍼서 정신이 무너질 것 같았단 말이야.”

매일매일 명상하며 온몸으로 마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성장을 촉진시켰다.

“네가 죽고 10년쯤 지나서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그 이후가 가장 끔찍했다.

그녀는 데이븐의 격으로부터 ‘오염된 격’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용은 몰라도, 그녀만큼은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 데이븐을 죽여야 했어. 그건 진짜 데이븐의 죽음을 모욕하는 거니까. 근데…… 근데……!”

그렇지만 네디아는 그 ‘오염된 격’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그마저도 데이븐의 유산 같아서.

자꾸만 데이븐의 형체가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서.

용아 시절의 지나치게 강력한 기억이 그녀에게 트라우마가 되어버렸다.

“나는 너무 비겁했어. 그래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 네가 남긴 것을 없애지 못했어. 그놈이 카진에게 가짜 이능검격을 가르쳐줄 때도, 나는 그냥 침묵했어. 그냥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아슬란이라는 꼬맹이를 도와주는 것밖에 없었어.”

그 아슬란마저도 100년이 안 되어 죽었다.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오염된 격’을 지켜보는 것조차 힘들다 판단했을 때.

그녀는 스스로 동면을 선택했다.

“한 300년쯤 자고 나면 괜찮아질까 싶어서. 그래서 나는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서 숨었어. 그리고 무턱대고 잠을 잤어.”

그래서 그녀의 친구였던 아넬린 또한 네디아가 죽었다 판단한 것 같았다.

빈첸과 타이밍이 어긋났다.

네디아가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빠져나올 때, 빈첸이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들어갔다.

“근데 이게 뭐야? 왜 그 이상한 건 사라지고, 네가 내 앞에 있는 거야? 나는 이해가 안 돼.”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상관없어. 이해 안 되면 뭐 어때.”

그녀는 계속 울었다.

몸을 일으켜 신경질적으로 빈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빈첸을 와락 끌어안았다.

“네가 책임져.”

“……뭘?”

“내 첫사랑 말이야! 내 순결을 빼앗았으니 책임져야지.”

“…….”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

빈첸은 무언가 이상하다 느꼈으나 굳이 반박까지는 하지 않았다.

이 공간은 빈첸의 세계이고, 이 안의 모든 것들이 빈첸에게 전해졌다.

지금 네디아는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기쁨.

반가움.

환희.

그러한 감정들이 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린 용이었다라…….’

이제야 조금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시 네디아가 왜 그렇게 어린애처럼 굴었는지.

어린애 같았던 것이 아니라 어린애였다.

“다행히 나는 여성체고, 이제 성체잖아.”

네디아의 눈이 번들거렸다.

기쁨.

반가움.

환희.

그 감정들이 일순간 다른 것으로 변했다.

빈첸의 세계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강한 어떤 욕구였다.

그러나 빈첸도, 네디아 스스로도, 그 욕구가 어떤 욕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 없었다.

“너와 함께 파사검을 연구하던 때가 내 용생에 가장 행복한 시기였어. 그 시기에 늘 네가 함께 있었고. 나는 500년 넘게 그때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어.”

“…….”

“그러니까 책임져.”

빈첸은 네디아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려움?’

네디아에게서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네디아는 무엇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빈첸은 피식 웃었다.

“책임지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또한 네디아가 반가웠다.

그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네디아가 있었다.

“나 또한 너와 그리 다르지 않은 마음일 것 같군.”

“나를 500년이나 기다리게 한 벌은.”

네디아가 빈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걸로 갚아.”

그리고 빈첸을 끌어당겨 빈첸과 입을 맞추었다.

멱살을 쥐었던 손에 힘을 풀고, 빈첸의 허리춤에 손을 감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아닌, 우아한 손길로.

“안아줘.”

빈첸을 끌어안았다.

빈첸도 네디아를 안았다.

빈첸의 백색 세계에 붉은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붉은 잉크가 떨어진 것 같았다.

새빨간 잉크가 점차 퍼져나가, 백색 세계를 가득 물들였다.

백색 세계의 온도가 달아올라 세상 전체가 뜨거워졌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네디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이제 진짜 나 책임져야 돼.”

그런데 그때,

그녀의 얼굴이 새까맣게 질렸다.

“네 누이들과 어머니께는 뭐라 말씀을 드려야 해? 나 실컷 망나니짓하고 왔단 말이야.”

네디아의 눈에 또 눈물이 고였다.

이건 용생 최대의 위기였다.

“어떡해? 나 진짜 어떡해? 내가 용이라서 싫어하시면 어떡하지?”

한편,

율리안을 수행하며 북해 끝에서 대기하던 제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한시가 급한데 말이야.”

* * *

아덴카를 주축으로 하여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었다.

기존 사미온의 영역을 완전히 흡수했고, 아덴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문으로 우뚝 올라섰다.

셀비라를 필두로 한 역사 재건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대악마 데이븐에 관한 사실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한 가운데, 셀비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뭐라고요?”

빈첸이 열일곱이 되는 해에,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셀비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덴카의 가주가 뭐가 아쉬워서 결혼을 이렇게 빨리해요!”

세계에서 가장 잘난 남자였다.

보통 그 정도 영웅은 결혼을 늦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게 보편이었다.

나이메르도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저도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군요.”

“안 돼!”

나이메르는 호호 웃었다.

“마치 첫사랑에 실패한 소녀 같군요.”

“같은 게 아니고, 맞아요. 나중에 고백하려고 했단 말이에요.”

모든 소식지에서 빈첸의 약혼에 관련된 얘기를 다루었다.

네디아의 얼굴도 널리 알려졌다.

그 얼굴을 확인한 셀비라는 골방에서 엉엉 울었다.

“이건 사기야. 어떻게 사람이 이런 얼굴을 가지고 있냔 말이에요. 위로하지 말아주세요 나이메르 경. 어떤 위로를 받아도 이 짙은 패배감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아요.”

첫사랑에 실패한 셀비라는 일에 더 몰두하기로 했다.

나이메르가 셀비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셀비라 같은 사람이 대륙에 수만 명은 될 거예요. 그러니까 힘내요.”

당장 용아인 중에서도 빈첸의 약혼 소식에 목놓아 우는 여인들이 있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과거, 시민혁명대원이자 아룡검대원. 현 자유연합의 간부인 유리나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유리나. 너도 빈첸 경의 결혼 소식 때문에 속상한가?”

“네. 엄청요.”

“어차피 그를 배필로 맞이하겠다는 욕심은 없었잖아.”

“그래도요.”

감히 빈첸을 갖고 싶다는 욕심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첸의 약혼 소식이 그리 기쁘지 않았다.

“그냥 빈첸 경은 만인의 연인으로 남아주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래도…… 축하해요, 빈첸 경.”

유리나가 혼자만의 첫사랑을 멀리 떠나보내고 있을 무렵.

마리엘 또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지, 내가 누구를 잊지 못할 줄은 몰랐는데.”

과거 3급 생도였던 시절.

그녀는 빈첸을 유혹하여 함정에 빠뜨리려 했었다.

그녀는 붉은 요새 수많은 생도들의 첫사랑이었다.

마리엘은 홀로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축복하고 축하해요, 빈첸 경.”

이제 감히 대화를 섞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위치에 올라버렸다.

말하자면 빈첸은 저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 같은 존재였다.

“그래도, 청첩장은 보내주면 좋겠는데…….”

그마저도 너무 과한 욕심이려나.

괜스레 씁쓸해졌다.

그와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한테 연애 사실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감추실 줄은 몰랐어요.”

세리였다.

약혼 얘기를 듣고 세리는 서운해했다.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여러모로 도움을 더 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여자가 좋아하는 선물이라든가, 복잡미묘한 마음이라든가.”

세리는 빈첸에게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빈첸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500년 전부터 이어진 연인이라고 설명하기는 좀 그래서 그냥 사과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세리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약혼식 준비는 꼭 제게 맡겨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가주님과 네디아 경이 빛날 수 있도록 준비할게요.”

윌슨은 시종들 사이에서 빈첸의 영웅담을 늘어놓기에 하루가 바빴다.

헤르카는 약간의 불만을 토로했다.

“빈첸. 네 약혼 때문에 내 결혼 소식이 묻히잖아.”

결국 헤르카는 바르곤과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혼 소식은 빈첸의 약혼 소식에 묻혀버렸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빈첸에게 쏠렸다.

세계가 빈첸의 약혼으로 인해 떠들썩해졌다.

북해 끝.

그곳에는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제론은 초조한 마음을 다스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율리안 경에게 큰일이 벌어진 거 아냐? 가주님은 무사하신가? 나라도 들어가야 하나?”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덴카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여인(네디아) 때문에 아덴카가 멸망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한시가 급한데…….”

오늘따라 유독 별이 밝았다.

The end

<맺음말>

안녕하세요?

‘환생의 정석’을 연재한 김평범입니다.

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힘들기도 했지만 또한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부족한 글솜씨이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독자 여러분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조금 더 발전된 모습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함께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음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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