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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83화 (183/184)
  • 환생의 정석 183화

    한센은 자타공인 세계 최고의 명장이었다.

    그의 올곧은 장인정신을 배우기 위하여 수많은 난쟁이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정신을 따라 값싸고 질 좋은 무기들이 대량 양산되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였다.]

    [한센 명인이 불러온 변혁의 바람.]

    한때 한센을 배척했던 대장장이들은 이제 한센을 우러러보며 경외했다.

    [빈첸의 검에 양각으로 새겨진 한센의 이름.]

    그 이름은 이 시대의 가장 빛나는 이름 중 하나였다.

    아덴카 가주의 검을 제련했다는 것.

    그것은 대장장이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다.

    가주의 검 ‘칸’에는 ‘HS’라는 한센의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는 아덴카의 가주가 한센을 지극히 공경하고 경외한다는 의미였다.

    그 누구도 감히 한센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어딜 가도 그는 최고의 명인으로 대우받았다.

    그런 그의 공방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여기가 한센의 공방이냐?”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365일 불이 꺼지지 않는 한센 대장간의 불길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한센은 기겁했다.

    “미친!”

    어떤 정신 나간 화염계열 마법사가 손을 쓴 것 같았다.

    그는 헐레벌떡 공방의 입구로 뛰어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은발 머리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키가 꽤 컸는데, 로브를 입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네가 아넬린의 뼈로 검을 만들었다는 걔니?”

    그녀와 눈이 마주친 한센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은?’

    빈첸을 제외하고, 이런 느낌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칸에게서도 말이다.

    “아아,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손을 허공에 한 번 휘저었다.

    존재감을 옅게 만들어 압박감을 줄여주었다.

    “자. 이제 말을 좀 할 수 있겠지?”

    “…….”

    “아넬린의 뼈로 검을 만든 게 사실이냐?”

    “…….”

    “빨리 대답해. 대답 안 하면 죽일 거야.”

    그 말에 한센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넬린 말입니까?”

    “그래. 아넬린. 알지?”

    “아넬린이라면…….”

    기억이 났다.

    빈첸이 분명 이 뼈의 주인이 아넬린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 복원작업 속에서 이름을 드러내는 과거의 영웅이기도 했다.

    “맞습니다. 빈첸 경이 아넬린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뉘신지?”

    “그건 알 거 없고.”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거센 토네이도가 불어 닥쳤다.

    그녀는 화염계 마법사가 아니었다.

    손가락 한 번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자연재해를 일으켰다.

    한센은 그녀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으어어억! 지, 지붕이!”

    그의 공방 지붕이 통째로 뜯겨져 나갔다.

    “그 빈첸이라는 놈이 널 많이 아끼고 있겠지?”

    “…….”

    “나한테 납치를 좀 당해줘야겠어.”

    “저, 저 같은 놈을 납치해서 뭐하시려고요?”

    그녀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랬더니 공간이 바뀌었다.

    황금으로 번쩍번쩍한 공간이었다.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공간이었으나, 한센은 금붙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못했다.

    ‘망했다.’

    엄청나게 거대한 공간.

    이 공간에 가득 차 있는 금은보화.

    그리고 각종 무구들.

    ‘이런 컬렉션을 가지고 있는 자이고, 모든 마법에 능통한 괴물이라면…….’

    역사서에서나 가끔 모습을 드러내는, 거의 전능에 가까운 존재.

    ‘용?’

    용이 틀림없었다.

    용은 인간들의 세상에 거의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설마 용입니까?”

    “용을 알아?”

    “조,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한센은 순간 직감했다.

    ‘진짜 용이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용은 천외천의 존재.

    비위를 거슬러서 나쁠 것이 없었다.

    “자, 일단 배고프지? 뭐 좋아하니?”

    한센은 납치당한 것 치고는 꽤 큰 호사를 누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면 모든 꿈이 이루어졌다.

    온갖 산해진미가 식탁 위에 생성되었다.

    “자. 네가 아는 용에 대해 말해봐.”

    음식 맛이 좋았고, 침대는 안락했다.

    온도와 습기가 완벽하게 조절되는 이 공간은 포근하기까지 했다.

    며칠이 지나자 한센은 긴장이 조금 풀렸다.

    용이 가진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으나, 그렇다고 흉폭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최근 알려지기 시작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뭔데?”

    “아덴카 방계에 찢어져서 전달된 정보들인데요.”

    한센은 아는 대로 말했다.

    최대한 공손히.

    “500년 전 인간을 아주 사랑한 백룡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 그런 기록이 아직도 남아 있어?”

    그녀가 처음으로 빙그레 웃었다.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마음을 조금 놓은 한센이 말을 이었다.

    “예.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덴카 방계에 은밀히 전승되었다더군요. 물론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은근슬쩍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환심을 사려는 듯 말했다.

    “하하, 어떻게 용이 인간 따위를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죠. 하하하!”

    “말이 안 되긴 뭘 안 돼?”

    동굴이 부르르- 떨렸다.

    작은 진동이었으나 한센에게는 거대한 지진 같았다.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 아니. 물론 그럴 수도 있죠. 제가 뭘 몰라서 말입니다, 하, 하하!”

    한센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인간을 사랑했던 백룡은 인간에게 선물을 주었다.”

    “음, 그랬지.”

    용은 옛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센의 말을 계속 들었다.

    한센은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인간에게 과한 힘을 선물한 대가로 백룡은 멸종했다…… 라는 내용이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입니다.”

    “엥? 백룡이 멸종해?”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한센은 또 침을 꿀꺽 삼켰다.

    용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상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눈치를 살폈다.

    “아,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예?”

    “아니, 아무것도 아냐. 알고 있는 건 그게 끝?”

    “죄, 죄송합니다. 이게 끝입니다.”

    “흠, 그래.”

    며칠이 더 흘렀다.

    한센은 이곳에 조금 더 익숙해졌다.

    “저…… 저를 언제까지 납치하실 건가요?”

    “그거야 빈첸인가 뭔가 하는 놈이 나타날 때까지지.”

    그러던 어느 날.

    용은 의아함을 표했다.

    “아무래도 너를 납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봐.”

    “……예?”

    “아덴카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놈이 튀어나오려나?”

    “그, 그, 그건……!”

    용이 씨익 웃었다.

    “그래. 그게 좋겠어.”

    한센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용은 사라져 버렸다.

    * * *

    아덴카에 재앙이 불어닥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술가가 아덴카에 전쟁을 선포했다.

    아덴카 소속의 검대원들은 물론이거니와 검대장들도 패했다.

    아덴카의 직계들도 하나하나 무너졌다.

    놀라운 건, 죽은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용은 쓰러진 헤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너는 검을 놓은 지 꽤 오래된 거 같은데.”

    “당신의 진의가 무엇입니까?”

    “나? 나는 그냥 너희 가주라는 놈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야. 아넬린이 스스로 뼈를 내주었다니. 나는 그게 믿기지 않거든.”

    용은 스스로 치유마법을 발현시켜 헤나를 치료해 주었다.

    헤나의 모든 부상이 말끔히 나았다.

    “어떻게 하면 그놈이 나타날까? 지금은 내가 아무도 안 죽였는데.”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파충류처럼 가늘어진 그녀의 눈에서는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꾸 이런 식이면, 그냥 모조리 죽여 버릴 수도 있어.”

    “…….”

    그 사이, 데이아가 검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대검을 든 그녀는 12일을 용과 겨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배한 자는 데이아였다.

    “와, 너는 진짜 제법이다. 인정.”

    용 또한 자잘한 부상을 꽤 입었다.

    데이아의 대검은 부러졌고, 그녀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데이아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물었다.

    “어째서 당신이 가주와 비슷한 검을 사용하는 거지?”

    “가주의 검이 내 검과 비슷하다고?”

    순간,

    데이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여태까지의 살기는 장난이었던 것 같았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진한 살기가 아덴카 전체를 덮었다.

    “그 가주가 검 이름을 뭐라고 붙였디?”

    “초월검격.”

    “초월검격?”

    “그의 스승 중 한 명이었던 아넬린이라는 용이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다.”

    “아, 응, 어쩐지 이름이 촌스럽더라니.”

    용도 체력소모가 꽤 컸는지 바위에 걸터앉았다.

    “아가야. 잘 들어. 이 검의 진짜 이름은 초월검격이 아냐. 뭐, 예전에도 아넬린이 비슷한 이름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정확히는 ‘종말과 파괴의 초월검격’이었다.

    옛 추억을 떠올린 용은 피식 웃었다.

    “이 검의 진짜 이름은 말이야.”

    그때,

    또 다른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베르사였다.

    “이야, 인간들도 제법 강하구나. 아가야, 잠깐만 기다려. 얘 치료 좀 해주고.”

    용은 데이아의 부상을 절반쯤 치료해 주었다.

    “나머지는 신전 가서 치료받아. 나는 저 애와 싸워야겠으니.”

    용은 베르사와 전투를 시작했다.

    순수 무력은 용이 더 뛰어났으나, 용도 꽤 지친 상태.

    또다시 12일을 싸웠다.

    베르사 또한 용을 상대로 12일을 버텼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기다려주는 것도 슬슬 한계야.”

    용은 베르사 또한 치료해 주었다.

    “이 다음부터는 진짜로 죽일 거야.”

    “…….”

    용은 다시 한번 바위에 걸터앉았다.

    “일주일의 시간을 줄게. 그 이상은 나도 못 기다려.”

    그녀의 목표는 하나였다.

    아덴카의 가주 빈첸을 내 앞으로 데려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이제는 정말로 살육을 시작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루 지났다.”

    또다시 하루가 지났다.

    해가 뜨고 지고를 반복했다.

    “5일 지났다.”

    여전히 그녀는 그자리를 지켰다.

    시간이 더 흘렀다.

    “6일 지났어.”

    이제 마지막 하루 남았다.

    “7일.”

    용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아덴카의 가주는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타입이거든.”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후드득-

    비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한 죄로. 그리고 나를 이렇게 기대하게 만든 죄로.”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가락에 강한 뇌전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사이 몸을 회복한 데이아와 베르사가 검을 쥐고 그녀 앞에 섰다.

    용은 데이아와 베르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모두 죽인다고 했는데. 왜 도망 안 갔어? 시간 충분히 줬잖아.”

    데이아가 대답했다.

    “가주가 내게 아덴카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멍청하네.”

    “나는 죽음 앞에 도망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

    용이 씨익 웃었다.

    “그럼 죽어. 이제는 검으로 안 싸워.”

    유희는 끝났다.

    이제는 살육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빈첸이었다.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으나, 단 한 방울도 빈첸의 몸에 닿지 않았다.

    칸을 든 채 걸어오는 빈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빈첸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빈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째서 네디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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