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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82화 (182/184)

환생의 정석 182화

사미온을 단신으로 무너뜨리고 창왕 폰시아노의 충성을 받아냈으며, 현 세계의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는 빈첸의 방에 침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불가능한 행위였다.

그 불가능한 행위를 하려면 무모하거나 멍청하거나, 혹은 둘 다여야 했다.

“티 났어?”

“……티 안 나기를 바랐던 거냐?”

“기습 한번 해보고 싶었지. 으하하!”

천장에서 누군가 폴짝 뛰어내렸다.

레이븐이었다.

레이븐의 기세가 많이 은밀해져 있었는데, 아마도 세르쿤 집사 밑에서 몇몇 기술들을 배운 모양이었다.

“왜 온 거냐?”

“개박살 나러!”

“또?”

레이븐은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으응으응, 이번엔 아주 달라.”

“뭐가 다르다는 거냐?”

“저번에는 박살 난 거고, 이번에는 개박살 나는 거고.”

레이븐의 눈빛은 진지했다.

“야, 빈첸아. 아니, 가주님아.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

“앞으로 내가 널 기습하게 해줘.”

“나를 기습하겠다?”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빈첸에게 있어서 레이븐의 기습은 어린애의 장난 정도에 불과했다.

“나를 개박살 내는 건 감수할게. 죽이거나 불구를 만들지 않아줬으면 해.”

“내가 왜 그걸 받아들여야 하지?”

“그야 너도 심심할 테니까?”

레이븐이 히히히! 웃었다.

“너처럼 강한 놈에게 누가 또 덤벼들어주겠냐?”

“…….”

빈첸은 반박하지 못했다.

레이븐의 말이 맞았다.

무학은 홀로 연마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함께 갈고닦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빈첸에게는 발맞추어 걸어갈 동료가 없었다.

칸의 시대에는 발키아와 폰시아노가 있었다.

빈첸의 시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정당당하게 하면 싸움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기습하게 해달라는 거지.”

“뻔뻔하게 말하는군.”

“칭찬 고맙다. 하하하!”

싫지 않군.

빈첸은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어쩌면 레이븐 덕분에 조금은 덜 외로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간단하게 대련을 진행해 볼까?”

빈첸이 탁자 위에 있는 양초를 집어 들었다.

“야. 양초로 나를 개박살 내게?”

“그럴 셈이다.”

“양초로 개박살 나는 건 자존심이 좀 상할 거 같은데.”

엄살을 피우면서 레이븐은 곧바로 창을 거머쥐었다.

자세를 낮추고 빈첸의 공격에 대비했다.

빈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레이븐이 창을 크게 휘저었다.

“야, 잠깐만.”

“뭐지?”

“나는 정정당당한 대련은 안 해.”

“…….”

이대로 있다가는 빈첸이 양초를 휘두를 것 같았다.

그래서 레이븐은 반사적으로 들어 올렸던 창을 내렸다.

적어도 빈첸은 기습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내가 기습할게. 오늘 말고.”

“그래. 그럼 오늘은 쉬도록 할까?”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쥐고 있던 양초를 내렸다.

“라고 할 줄 알았냐?”

빈첸의 몸이 사라졌다.

빈첸이 레이븐의 뒤를 점했다.

손날로 레이븐의 목덜미를 탁! 내리쳤다.

“으어억!”

레이븐은 눈 앞이 아찔해지며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러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초인적인 반사신경과 정신력으로 중심을 잡았다.

“야! 비겁하게 기습이라니!”

“무기는 안 들었잖아.”

“그래도! 역사적으로 가장 강한 무인이 기습을 하면 어떡하냐!”

레이븐의 목덜미가 퉁퉁 부어올랐다.

가볍게 내리쳤는데도 그랬다.

“내가 기습을 안 하겠다고는 안 했던 것 같은데.”

빈첸이 목을 우드득 돌렸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였다. 새로운 깨달음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

“야, 야, 잠깐만.”

레이븐이 뒷걸음질 쳤다.

그의 등이 벽에 닿았다.

세르쿤이 가르쳐준 은신술도 소용 없었다.

“야, 잠깐만!”

으아아악!

레이븐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 날, 그는 악마를 보았다.

아침 해가 밝아왔다.

레이븐은 바닥에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악마 자식…….”

손날을 한껏 휘두른 빈첸은 평온한 자세를 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다.

찌를 테면 얼마든지 찔러봐라 라고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레이븐은 기습하지 못했다.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레이븐은 눈동자만 간신히 돌려 빈첸을 바라보았다.

‘짜식.’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볍게 웃었다.

‘내가 네 녀석의 친구님이 되어주시마.’

뭐랄까.

오늘의 개박살은 기분이 꽤 괜찮았다.

손날을 휘두르던 빈첸도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였고.

‘아무튼 괴물이라니까.’

밤 내내 시달렸던 레이븐은 드르렁 쿨-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 * *

빈첸의 통치하에 장로원은 해체되었다.

그 누구도 그것에 토를 달지 못했다.

장로원 대신 베르사를 주축으로 한 내각회의가 만들어졌다.

베르사와 율리안, 바르곤이 핵심인사였다.

빈첸이 셋을 불러 말했다.

“저는 중심을 잡겠습니다.”

그 말의 뜻을 가장 정확히 이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바르곤이었다.

“중심을 잡겠다라. 행정일과 내부의 사소한 일들에는 완전히 손을 떼겠다는 말을 아주 멋들어지게 표현하시는군요, 가주.”

“뜻이 그렇게 되나요?”

빈첸은 하하 웃고 말았다.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어서 반박은 하지 않았다.

바르곤의 말이 맞았다.

대부분의 일은 저 셋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이미 그렇게 해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예정이었다.

빈첸이 머쓱한 듯 말을 이었다.

“약혼하셨다지요? 축하드립니다, 바르곤 경.”

“약혼 당한 겁니다.”

바르곤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헤르카를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약혼도…… 당할 수 있는 거군요.”

“항거할 수 없었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빈첸은 다시 본론을 꺼냈다.

“가주의 권한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어머니와 율리안. 그리고 바르곤 경께서는 제 권한을 가져가서 일을 처리하십시오. 구체적인 사항은 어머니께서 정해주실 겁니다.”

율리안도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가주의 권한을 나누어 준다는 것은 가주의 힘이 약화된다는 뜻이다.

율리안이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니까.’

빈첸이 워낙에 절대적인 무력을 지니고 있어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큰 권한을 나누어준다고 해도, 빈첸의 무력은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의 파괴력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데이아 누님을 가주 대행으로 삼으려 합니다.”

“데이아를 말이냐?”

“예. 누님이라면 저 없이도 아덴카를 충분히 다스릴 수 있을 겁니다.”

빈첸은 데이아와 이 사람들을 믿었다.

아슬란이 말했던, 인류의 태평성대를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이 충분한 사람들이었다.

베르사가 물었다.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말을 하는구나.”

“예, 급한 것들이 정리가 되면 당분간 가문을 떠나 있을 예정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인간의 힘으로 다룰 수 없는 힘을 다뤄보려고요.”

데이븐과 싸우면서 10성의 힘을 다루었다.

그 힘은 인간에게는 지나치게 위험하고 무모한 힘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 힘을 한 번 경험해 보았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10성의 경지는 미지의 영역이 아니었다.

“완전한 10성을 이룩하려 합니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최초니까요.”

베르사는 입을 다물었다.

‘저 경지에 올라서도, 열망이 가득하구나.’

무학에 관한 순수한 열정.

대다수의 무인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성취가 높아짐에 따라 잃어가는 저것을, 빈첸은 여전히 잃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기에 네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겠지.”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디로 떠나려는 것이냐?”

“인류의 힘으로 정복하지 못했던 곳이 한 군데 있지 않습니까?”

“설마…… 빛이 닿지 않는 곳을 말하는 것이냐?”

율리안의 일기장에도 등장하는 그 곳.

[힘줄을 자르고 마나를 봉인하여 ‘빛이 닿지 않는 곳’에 처넣고 말겠어.]

인류가 정복하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인 ‘빛이 닿지 않는 곳’이 바로 수련의 장이었다.

율리안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로 거길 가겠다고요?”

“그래.”

“거기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요.”

거기까지 말했던 율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형님은 돌아올 거 같긴 하네요.”

“너도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어야 한다.”

“저보고 같이 가야한다는 건 아니죠?”

율리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행정일이 적성에 맞았다.

요즘 아덴카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것이 즐거웠다.

빈첸과 함께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여전히 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느냐?”

“당연하죠. 나는 신인데.”

“혹여 아덴카에, 내각회의와 데이아 누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위기가 닥친다면, 나를 부를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

율리안은 침묵했다.

한참 후,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게 설마 나예요?”

“너 말고 누가 있느냐?”

“무슨 일이 생기면 빛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가라고요?”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가면 신력이 뭉텅뭉텅 빠져나갈 텐데요? 나 죽으면 어떡해요?”

“그런 위기가 아덴카에 찾아오지 않도록 평소에 관리를 잘 하면 되지.”

“말은 참 쉽게 하시네요.”

“왜? 못할 것 같으냐? 못할 것 같으면 얘기해라. 다른 적임자를 찾게.”

“누, 누가 못한대요! 신을 뭘로 보고!”

“그럼 잘 부탁한다.”

그날 밤.

빈첸은 5공녀 헤나의 방을 찾았다.

침대에 누워 있던 헤나가 몸을 일으켰다.

“가주, 오셨습니까?”

“사석에서는 편히 대해주십시오, 누님.”

빈첸은 빙그레 웃고서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검보다 그림이 좋으십니까?”

“…….”

헤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덴카의 가주가, 아덴카의 혈육에게 하는 질문치고는 너무 이상한 질문이었다.

“정정하겠습니다, 누님은 누님이 원하는 걸 하십시오.”

애써 검을 쥘 필요 없다.

그가 다스리는 아덴카에서, 헤나가 억지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힘을 쏟을 필요는 없었다.

“무력은 제가 맡을 것입니다. 저는 누님이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

헤나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아덴카에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최연소 가주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것이 아덴카의 가주이자 누님의 동생인 제가, 누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 아닌 선물입니다. 누님은 누님의 삶을 사십시오.”

“…….”

헤나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고맙구나, 빈첸.”

그 날.

헤나는 검을 손에서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아덴카 가주의 공식적인 허락하에 말이다.

그리고 하루 뒤.

2공녀 데이아가 빈첸에게 말했다.

“헤나에게 선물을 주어 고맙습니다. 제가 꿈꾸지 못했던 것을, 가주께서 이루어주셨군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석에서는 반말을 사용해달라 하였지만 데이아는 여전히 존대했다.

그것이 그녀가 빈첸을 예우하는 방식이었고, 빈첸도 그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가주,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는 언제 떠날 건가요?”

“일주일쯤 뒤에 떠나려 합니다. 누님. 아덴카를 잘 부탁드립니다.”

데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자신이 꿈꾸었던 아덴카를 만들어준 동생.

그 동생의 현재 모습을 기억하려 애썼다.

‘다시 돌아왔을 때, 지금의 빈첸은 없을 것이니.’

훗날의 빈첸은 분명 더 위대해질 것이었다.

그때에는 어쩌면 동생 같은 느낌이 완전히 사라질지도 몰랐다.

빈첸을 동생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말로 물었다.

“한 번, 안아보아도 될까?”

“물론입니다.”

어느새 빈첸이 데이아보다 더 컸다.

안는다고 안았으나, 데이아가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빈첸은 데이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고, 데이아 또한 빈첸의 등을 토닥였다.

“부디 강건하여야 합니다, 가주. 가주가 곧 아덴카이니.”

“명심하겠습니다, 누님.”

표현 자체는 투박했다.

그렇지만 빈첸은 데이아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누님도 강건하십시오. 아덴카를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가주.”

며칠 뒤.

빈첸은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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