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180화 (180/184)
  • 환생의 정석 180화

    율리안이 재빨리 말했다.

    “500년을 살아온 놈이에요.”

    그만큼 끈질기고 집요한 놈이었다.

    율리안은 마지막 순간, 기묘한 한 가닥의 끈을 느꼈다.

    “놈에게도 선택지가 별로 없어요.”

    빈첸은 그야말로 압도 그 자체였다.

    오염된 격은 빈첸 앞에서 감히 격을 논할 수준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오염된 격은 무너져 내렸고 오염된 격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놈이 악령 계약을 맺었던 흔적을 찾아 도망쳤어요.”

    마지막 한 줌의 의지로 살기 위해 도망쳤다.

    아마 그걸로도 많은 것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빈첸이 일궜던 것은 검의 세계 그 자체였고, 그 세계에 난도질당한 격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마지막 발악이 남았잖아요.”

    빈첸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덴카의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그의 형.

    말론 아덴카.

    그는 악령계약을 진행했었고, 악령의 흔적이 남은 자였다.

    “악령의 흔적이 남았지. 정신이 온전치 못해서 잠식하기도 쉽지. 그리고…… 형님에게 최소한의 복수라도 할 수 있지. 놈의 마지막 남은 의지가 아덴카 본가로 갔어요.”

    현재 아덴카의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무인들은 모두 외부에 나와있다.

    아덴카 본가에 남은 무인들은 예비전력들.

    그리고 무인이 아닌 자들뿐이다.

    “서둘러야 해요. 미리 연락해서 아덴카 본가까지 이어지는 이동관문들을…….”

    율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

    빈첸이 사라져 있었다.

    율리안은 저도 모르게 벙찌고 말았다.

    “어머니,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베르사는 오늘도 율리안의 ‘어머니’라는 말이 싫지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율리안을 오래전부터 알아 왔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8성 무인 베르사의 눈으로 보아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중요한 것은, 빈첸이 우리 앞에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려 멀린을 바라보았다.

    직접 빈첸을 가르친 멀린이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베르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풉.”

    “왜 그러세요, 어머니?”

    “멀린 경의 표정은 내 생전 처음 보는 것이구나. 안 그런가, 시종장?”

    레일사 시종장도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레일사는 멀린의 오랜 친구로서, 어린 시절부터 여태까지 함께해 왔다.

    그렇기에 멀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저 또한 처음 보는 표정입니다. 멀린은 본래 자기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편인데…….”

    멀린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멀린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레일사가 멀린 가까이 다가가서 어깨를 톡 쳤다.

    “멀린. 정신 차려.”

    “아, 아, 레일사.”

    그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멀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딜 그렇게 한눈팔고 있는 거지?”

    “방금, 가주의 세계가 밀려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멀린은 레일사보다는 더 많은 것을 느꼈다.

    빈첸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빈첸의 세계가 뒤로 밀려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기이한 힘이다.’

    단순히 ‘무학’의 깊이 차이가 아니었다.

    뭐랄까.

    멀린의 귀에 빈첸의 명령에 아른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빈첸이 사라지던 그 순간, 멀린은 환청을 들었다.

    -내가 그곳에 있어야겠다.

    그와 동시에 빈첸의 몸이 사라졌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빈첸이 ‘그곳에 있어야겠다’라고 명령하자, 세상이 그 명령을 받든 것 같았다.

    멀린은 한동안 침묵하며 빈첸이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하하하하! 하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레일사는 조금 걱정스러웠다.

    “멀린. 괜찮은 것이냐?”

    “물론.”

    “네가 10초 이상 웃는 모습을 처음 본다.”

    “이상한가?”

    레일사가 보는 멀린은 늘 감정을 억눌렀다.

    극도로 예민한 기운인 뇌력을 다루는 검술가였으니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아주 약간의 동요가 뇌력의 폭주를 가져올 테니까.

    그런 멀린이 이토록 크게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상하고 낯간지러워서 온몸이 간질간질한 것 같다.”

    “…….”

    “그렇지만 나쁘지는 않네.”

    레일사도 빙그레 웃었다.

    오랜 세월 멀린과 함께해 온 레일사는 멀린의 심경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제는, 그토록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겠지.’

    오랜 세월 아덴카의 무인으로 살아왔다.

    아덴카의 정의를 위하여 싸워왔다.

    그 때문에 장로원과도 싸웠고, 아덴카의 12검 중 한 명에서 백색검대의 부검대장으로 좌천되기도 했었다.

    레일사가 말했다.

    “이제는 조금 쉬어도 되겠네.”

    “……그런가.”

    “그래. 네가 그토록 발버둥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주께서 강건하시니.”

    역사상 유일무이한 10성.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배자가 탄생했다.

    그러니 이제 멀린도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레일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너와의 약속을 잊지 않았어, 멀린.”

    “나와의 약속?”

    멀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보다는 훨씬 감정표현이 풍부해졌다.

    “내가 네게 묵월을 선물했을 때의 그 약속.”

    -20년 전, 네가 그토록 탐내던 검이야.

    -보다시피 나는 시종장이니까. 시종장에게 명검은 필요 없지. 묵월은 네게 더 어울릴 거야.

    당시,

    멀린은 레일사의 검 ‘묵월’을 받아들었다.

    멀린이 빈첸의 스승이 되기로 작정했을 때.

    멀린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작은 약속이었다.

    -다음에 만날 땐 술 한 잔 하지.

    멀린도 그 때의 약속을 떠올렸다.

    “……아.”

    “약속, 지켜.”

    멀린과 마찬가지로 좀처럼 감정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레일사의 귓볼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 * *

    폰시아노는 허- 하고 웃고 말았다.

    그는 율리안의 힘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었다.

    율리안에게 다가가 물었다.

    “소년, 지금 이 분위기가 맞는 건가?”

    율리안이 급하게 말했고 무언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가 싶었다.

    빈첸이 사라진 것 외에는 너무나 평온한 것이 조금 이상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급히 말했던 율리안의 표정도 무척이나 평범했다.

    베르사에게 자꾸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중이었다.

    “네? 뭐가요?”

    “아니, 방금 아주 급하게 아덴카에 무슨 일이 있다고…….”

    “아덴카에 가야 한다고 했지, 아덴카에 일이 있다고는 안 했는데요.”

    “가주가 급히 갈 정도면 위험하고 급한 일 아닌가?”

    “가주가 급히 갔으니까 이제 안 위험하죠.”

    폰시아노는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오염된 격’과 싸우던 그 상황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이해가 안 됐다.

    “베르사 부인, 나는 도통 이해가 안 됩니다만.”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가주께서 직접 가셨으니 모든 것이 괜찮을 겁니다. 혹여, 괜찮지 않다면 그건 우리로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 말이 정확해서 폰시아노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베르사가 되물었다.

    “폰시아노 경은 가주의 힘을 바로 옆에서 견식했겠지요. 어떻습니까? 아덴카의 가주가 다스릴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다스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폰시아노도 멀린처럼 한동안 멀뚱멀뚱있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핫!”

    아주 잠깐이지만 빈첸이 부러워졌다.

    지금 이 순간, 빈첸은 그 누구보다 신뢰받는 가주였다.

    “나는 돌아가 내 할 일을 하겠소. 세상이 영 흉흉한 것이, 바르티칸도 한 팔 거들어야지. 으, 기자들이 몰려오는 것 같군. 나는 이만.”

    “자, 잠깐만요 폰시아노 경! 폰시아노 경! 저는 바람소리의 마리아 최고 수석 기자입니다!”

    인터뷰를 싫어하는 폰시아노는 기자의 등장에 도망치려다가 마리아라는 말에 멈춰 섰다.

    지금의 빈첸이 있기까지 마리아의 도움이 꽤 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아의 인터뷰에만 응했다.

    “우와, 정말인가요? 그게 모두 사실이란 말이지요?”

    “무인이 아닌 자에게 최대한 쉽게 설명한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전 세계의 모든 무인이 합심하여 아덴카의 가주와 대적한다면, 패배하는 쪽은 무인들 쪽이 될 것입니다. 그는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기록된 이래로 가장 뛰어난 검술가입니다. 인간의 영역을 아득히 초월한 검술가. 검신의 이명이 부끄럽지 않을 최초이자 어쩌면 마지막 검술가이겠지요.”

    “그 무인들 속에는 바르티칸의 가주이신 폰시아노 경도 포함되는 건가요?”

    “……나는 아덴카의 가주를 상대로 단 일합도 버텨낼 자신이 없소.”

    폰시아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렇지만 씁쓸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나, 지금의 세상에는 절대적인 힘을 지닌 왕이 필요하다.’

    인류멸망의 위기 앞에서 인간들은 크게 흔들렸다.

    100일이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면 안 될 일들이 수도없이 벌어졌다.

    이웃간의 신뢰가 깨졌고 인간에 대한 불신이 크게 자라났다.

    겨우 100일 만에 말이다.

    무너지는 데에는 100일이 걸렸지만, 다시 일으키는 데에는 10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세계에는 강력한 왕이 필요했다.

    “나, 바르티칸의 가주 폰시아노 바르티칸은, 구명의 은혜를 내린 아덴카의 가주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 * *

    빈첸 스스로도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그의 의지가 움직였고 세상이 변했다.

    이것은 워프와도 개념이 달랐다.

    그의 의지가 아덴카의 본가로 향하자, 그는 그곳에 있었다.

    “마지막까지 추하구나.”

    눈이 깜하게 물든 말론 아덴카가 보였다.

    물론 지금은 말론이 아니었다.

    “오염된 격도 아니고, 그 격 끄트머리에 남은 조각 정도인가.”

    “여, 여긴 어떻게……!”

    빈첸이 피식 웃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느냐?”

    마지막 발악도 여기서 끝이었다.

    ‘오염된 격’은 빈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두려움에 벌벌 떠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 나를 죽이면 네 형도 같이 죽는다. 그러면 네 어미가 슬퍼하겠지.”

    “…….”

    빈첸이 대답하지 않자 말론은 자신감을 얻은 듯했다.

    “너도 보다시피, 이제 내게 남은 힘은 보잘것없다. 그러니 그냥 나를 내버려 둬라. 적어도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이 무슨 짓이든 저지르기도 한다.”

    흑마법의 개념이 그렇다.

    다른 자들의 생명을 착취하여 본인의 성장과 목표를 이루는 것.

    그리고 대체로 악령들이 그렇다.

    계약자의 목숨을 먹어치우며 본연의 파괴욕과 갈망을 채우는 것.

    “무엇을 하려 했느냐?”

    “…….”

    “솔직하게 말하면 정상참작 정도는 해주지.”

    “소, 솔직하게 말이냐?”

    지금의 말론은 데이븐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그저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했고, 그 격은 빈첸은 물론이거니와 데이븐에 비해서도 현격히 떨어졌다.

    “이곳에 남은 네 식솔들을 모조리 도륙해서 씹어 먹으려고 했다.”

    “…….”

    “나, 나는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다.”

    “그렇군.”

    지금 저 ‘조각’에게 남은 것은 그저 추악한 파괴욕뿐이었다.

    “아덴카에 네가 설 땅은 없을 것이다.”

    아덴카의 가주, 빈첸 아덴카가 말한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빈첸은 검을 뽑지 않았다.

    그저 의지를 일으킨 것만으로도, 데이븐이 남긴 조각은 세상에서 소거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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