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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79화 (179/184)

환생의 정석 179화

불현듯, 세리의 머릿속에 아넬린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와 베사툴이 잊혀졌다면, 네 특별한 신체도 잊혀졌겠지. 그렇지?”]

세리는 무의식에 빠져들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저도 모르게 홀로 중얼거렸다.

“마…… 력…… 체.”

당시 보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제3자가 되어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는 것만 같았다.

환상이 펼쳐졌다.

환상 속, 세리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리고 아넬린이 말하고 있었다.

[“마력체라는 건 사실 간단해. 저절로 마나를 받아들이는 신체야. 그런 특성이 사실은 어디서부터 왔겠어?”]

[“용. 마법의 종주.”]

[“그래. 용의 특성을 히슬리의 인간들이 배워간 거야. 그러니까 베사툴의 아이는 잘 들어. 이게 바로 마력체를 활성화시키는 술식이야.”]

아넬린의 눈이 황금색으로 빛났다.

그 빛이 세계로 뻗어 나갔다.

화악!

빛이 밝아왔다.

환상 속의 세리도, 현실의 세리도, 둘 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인간들에게 잊혀져도 그만이지만 베사툴과 히슬리가 잊혀지면 안 되지.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준 거 절대 잊지 말고. 나중에 잘 자라서 저 녀석과 함께 히슬리의 명예를 드높여. 사람들이 베사툴을 기억하게 만들어. 알겠니?”]

모든 것이 밝아진 세계.

그곳에서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빈첸의 검이었다.

빈첸의 검.

아넬린의 뼈로 제련한 ‘칸’이 웅웅- 울리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기억해내.

내가 네게 남긴 것을.

그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기억할게요.’

세리가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넬린이 각인시켰던 지식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세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마력체. 그건 본디 용의 특성들 중 하나였어요. 잠시 실례할게요, 가주님.”

세리는 빈첸의 오른손에서 ‘칸’을 빼내었다.

빈첸은 무척이나 가볍게 다루었으나, 세리에게는 꽤 무거웠다.

‘이제야 알겠어.’

왜 이제야 당시의 기억들이 떠오르게 되었는지.

왜 이제야 마력체의 술식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는지.

왜 아넬린이 ‘나중에’ 잘 자라서 저 녀석과 함께 히슬리의 명예를 드높이라고 말했는지.

‘아넬린의 유산이 있어야만, 내가 마력체 술식을 다룰 수 있을 테니까.’

그때에는 알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아넬린의 뼈로 만든 검이 있어야 했다.

본래, 500년 전에는 용침(龍針)이라 하여, 용의 뼈를 갈아 만든 침이 존재했으나 지금 세상에 그런 물건은 없었다.

아넬린은 자신의 뼈가 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리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지식을 전달했다.

그녀의 눈에 마력체로 각성시키는 길이 보였다.

빈첸은 눈동자를 힐끗 돌려 세리 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형태의 이능검로?’

세리는 어떠한 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길을 따라 ‘칸’을 휘둘렀다.

몸동작은 어색했으나, 분명히 검로를 만들고 있었다.

푹!

칸이 율리안의 팔뚝 근처를 찔렀다.

목덜미와 가슴팍.

그리고 허벅지와 발목까지.

여러곳을 가볍게 찔렀다.

세리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러내렸다.

“가주님께서 예전에 마력체를 알려주셨어요. 마력체는 스스로 마나를 흡수하는 체질이라고 하셨죠.”

지금 율리안의 존재에는 잔뜩 균열이 생겼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깨져 버릴 것이다.

“스스로 마력을 흡수해서, 존재를 붙들어두어야 해요.”

최소한 깨지지는 않도록.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마력체가 흡수하는 마나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세계는 가주님께서 만드신 세계니까요.”

이곳은 격이 다른 세계다.

빈첸의 격을 통해 창조된 소우주.

그리고 이 세계는 율리안에게 매우 호의적인 세상이었다.

애초에 ‘마나’라는 힘은 인간에게 이능을 부여하는 힘이었고, 특히나 이곳의 마나는 율리안에게 기적을 일으켰다.

시간이 좀 더 흘렀다.

어느덧 폰시아노는 정신을 차렸고, 빈첸의 몸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폰시아노 경. 괜찮습니까?”

“어찌어찌…… 산 것 같군.”

폰시아노가 몸을 일으켰다.

땅에 떨어진 창을 바라보았다.

“면목이 없군.”

몸을 잠식당해 빈첸을 공격했던 것이 떠올랐다.

“괜찮습니다.”

“…….”

“이 은혜는 차차 갚도록 하지.”

그는 문득 생각난듯 다시 말했다.

“차차 갚도록 하겠습니다.”

전에는 빈첸 공자였으나 이제는 아덴카의 가주였다.

바르티칸의 가주인 자신과 사회적 지위가 같았을뿐더러, 빈첸은 그의 은인이기도 했다.

이것이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빈첸은 말없이 한쪽 팔로 율리안을 안아 들었다.

‘위태롭구나.’

마력체 시술을 통하여 소멸은 겨우 막아놓았다.

지금도 가까스로 존재를 붙들고 있을 뿐, 당장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세리. 고마워.”

풀썩.

세리도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력체의 술식을 새겨넣느라 많이 무리한 모양이었다.

빈첸은 반대편 팔로 세리를 안아들었다.

기력을 많이 써서 기절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영역을 거둘 것입니다.”

빈첸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이곳을 벗어나겠습니다.”

그가 몇 걸음 옮기자 세상이 바뀌었다.

* * *

폰시아노는 엄청난 압박감을 견뎌냈다.

‘그저, 영역이 걷히는 것만으로도 이정도의 압박감이다.’

앞서 걸어가는 빈첸의 뒷모습이 경이롭기까지했다.

그 경이를 느낀 시간은 불과 1, 2초에 불과했으나, 그 시간의 깊이는 측량할 수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신했다.

‘내 대에서는 빈첸을 넘어설 수 없겠구나.’

안타깝게도,

아들의 대에서도 빈첸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 어느 시대에서도.’

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그리고 앞으로 기록될 미래에도.

빈첸을 넘어설 수 있는 무인이 나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이미 빈첸은 칸을 뛰어넘었으니.’

칸만 하더라도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무인이었다.

더 무시무시한 건, 빈첸은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첸!”

그는 이내 말을 바꾸었다.

“가주!”

그는 멀린이었다.

세리에게 길을 열어준 이후로 멀린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멀린뿐만 아니라 베르사와 레일사역시 마찬가지였다.

베르사는 다가오는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빈첸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결국, 미래가 열렸구나.”

멈출 뻔했던 시간이.

무너질 뻔했던 세계가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빈첸의 등 뒤에 닿았다.

‘이 느낌은 무엇인가.’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여전히 저 금발머리 소년의 정확한 정체는 잘 알 수 없었다.

뒤를 캐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그저,

저 아이가 말하는 ‘어머니’라는 표현이 그리 싫지 않을 뿐.

베르사가 말했다.

“레일사. 가주의 귀환을 널리 알려라.”

레일사는 허리를 숙였다.

레일사는 빈첸에게도 허리를 숙인 뒤, 멀어졌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믿고 있었습니다, 가주.’

레일사는 빈첸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왔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언젠가는 사르비나의 아들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을 기대하면서, 참고 또 참아왔었다.

‘사르비나. 당신은 보고 계십니까?’

영역이 사라지고,

가주가 걸어 나왔다.

그가 돌아옴으로 인하여 인류는 미래를 맞이했다.

‘당신의 아들이.’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덴카의 주인입니다.’

한편,

베르사가 물었다.

“그 아이는 어찌 된 것입니까, 가주?”

“임시로 부서지지 않도록 붙여만 놓았습니다.”

빈첸이 멀린 쪽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둘란 경을 불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가주.”

멀린이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8성 기사다운 몸놀림으로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란을 비롯한 수많은 신관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둘란의 손에는 성배가 들려 있었다.

“빈첸 공, 아니, 가주! 무사하셨군요!”

“돌아왔습니다.”

빈첸이 세리와 율리안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세리는 괜찮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 것입니다. 다만, 율리안이 문제입니다.”

많은 것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사실 빈첸도 지금 정상 상태는 아니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황.

평범한 이였다면 이미 온몸의 근육이 찢어져 죽었을지도 모를 만큼, 몸을 혹사한 상태였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당장에라도 명상식을 통하여 몸을 회복시켜야 했다.

짧게 부탁했다.

“뒤를 부탁합니다.”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마력자전을 시작했다.

현대무인들의 상식으로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폰시아노도 그 옆에 앉았다.

그 또한 빈첸과 상태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빈첸의 영역을 벗어나면서 또 무리를 해버렸다.

“부탁합니다, 베르사 부인.”

“…….”

폰시아노 또한 마력자전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체력과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였으니까.

베르사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빈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폰시아노 경까지.’

만약 자신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사미온이 없어진 지금, 바르티칸은 아덴카의 최대 경쟁자다.

그리고 그 바르티칸의 수장이 바로 폰시아노.

실수를 가장하여 폰시아노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하나.’

빈첸과 폰시아노를 번갈아 가면서 눈에 담은 베르사는 가볍게 웃고 말았다.

‘이제는 경쟁자가 아니구나.’

폰시아노조차도 빈첸의 경쟁자는 아니었다.

빈첸이 마음만 먹는다면, 바르티칸쯤은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었다.

이제 세계의 세력구도는 빈첸을 중심으로 개편될 것이다.

3대 무가가 나눠 가졌던 패권이 아덴카에 몰릴 것이다.

빈첸이라는 절대자에 의해서 말이다.

‘경쟁자가 아닌 자를 견제할 필요는 없겠지.’

칸이 살아 있을 때에도 바르티칸은 경쟁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빈첸은 지난 500년간 아덴카를 지배해 온 가주들과는 격이 달랐다.

‘칸. 당신의 사명을 이루었습니다. 보고 있습니까? 아마 보고 있겠지요. 당신의 이름을 빈첸의 검에 담았으니.’

베르사는 잠자코 빈첸 옆에 서서 그들의 곁을 지켰다.

한편,

둘란은 이를 악물고 성력을 방출시켰다.

‘내 성력으로는 어렵다.’

다른 신관들의 성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율리안의 신격을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방법은 있었다.

‘성배를 사용해야 해.’

이 성배에는 특별한 힘들이 담겨 있다.

자원한 어린아이들의 성력.

둘란이 깜짝 놀랐었던 순수한 힘이 이 안에 정제되어 있다.

‘이 힘을 이끌어내어…….’

대악마 데이븐조차 주춤하게 만들었던 그 성력이 빛을 발했다.

쩌적-

성배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신성결계를 유지하느라 이미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였다.

그러나 둘란은 멈추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들의 소망들이 모여 기적을 이루어낸다.’

그들은 무인도 아니고 신관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가 살기를 바라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아이들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기적이 존재하는 것이다.’

쩌저적-

성배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여.’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성배 안에 담긴 힘을 이끌어냈다.

그것으로 율리안의 신격을 회복시키려 애썼다.

‘반드시 살려낸다!’

그리고 오늘도 기적이 임했다.

율리안이 눈을 번쩍 떴다.

마침 빈첸도 마력자전을 끝낸 뒤 눈을 떴다.

“형님!”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반가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급박함이 담겨 있었다.

“어서 아덴카로 돌아가야 해요!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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