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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78화 (178/184)

환생의 정석 178화

빈첸은 데이븐이 소멸된 공간을 바라보았다.

500년 전, 자신이 남겼던 격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온몸의 근육이 잘게 잘게 쪼개져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쉽지 않았다.’

데이븐의 말이 맞았다.

인간의 몸으로 10성의 힘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천과를 먹은 천골이 아니었더라면 버티지 못했겠지.’

인간의 몸으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한계는 9성이었다.

그 한계를 초과하는 힘을 끌어다 썼으니 몸이 성할 수 없었다.

“혀, 형님!”

율리안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빈첸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조금 어지러웠다.

“괘, 괜찮아요?”

“그다지, 안 괜찮은 것 같다.”

“예?”

율리안은 빈첸을 살펴보았다.

빈첸의 몸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뭐가 이렇게 태평해요?”

“안 태평하면, 뭐가 달라지냐?”

“몸이 개박살이 났잖아요!”

빈첸은 피식 웃었다.

“아주 품위가 넘치는 표현이구나.”

그러나 정확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 지경이 돼서도 농이 나와요?”

“나는 내가 꿈꾸었던 모든 것을 이루었다.”

비록 데이븐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는 카진을 넘어섰다.

사미온의 가주보다 강한 힘으로 사미온을 이겼다.

아슬란의 염원을 이루었으며, 자신이 남긴 잔재 또한 처리했다.

이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울컥.

다시금 피가 솟구쳤다.

빈첸은 거기서 죽음을 직감했다.

‘죽어도 후회는 없겠구나.’

이미 ‘인간’이라는 그릇이 깨졌다.

살려면 억지로 더 살 수는 있겠으나 빈첸은 ‘삶’이 그렇게까지 간절하지는 않았다.

그가 살아내야 했던 모든 것들을 이루었으니까.

“율리안. 네가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을 잊지 말아라.”

“닥쳐요. 유언 남기지 마요.”

율리안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유언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라지면, 이 영역도 절로 걷힐 것이다. 네가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을 지니고 돌아가 모든 것을 바로잡아라. 네 능력이라면 충분할 거야.”

많은 것들이 왜곡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바로잡아야 했다.

“특히, 아슬란과 라엔므고, 베사툴과 아넬린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이룬 모든 것들도 잊어서는 안 될 거고.”

악마로 기록되는 것은 한 번이면 족했다.

본래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라 했다.

이번에는 악마가 아니라, 아덴카의 가주로서 기록되고 싶었다.

“뭐 나름, 최연소 가주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들기도 한다.”

“…….”

율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빈첸의 말들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

‘살려야 해.’

그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강대한 신력을 지녔다.

그 신력을 모조리 쏟아부으면, 빈첸을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저건 부상의 영역이 아니야.’

말하자면 지금 빈첸은 천벌을 받은 상태였다.

인간이 탐할 수 없는 힘을 사용하여, 그 존재 자체에 균열이 생긴 상황.

그러므로 이것은 치료의 영역이 아니라 부활의 영역에 가까웠다.

‘저 존재를 회복시키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만약 빈첸을 살린다면, 율리안 자신의 존재가 깨져 버릴 것이다.

‘내가 희생해야 해.’

율리안은 많은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빈첸은 분명 자신이 꿈꾸었던 모든 것들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건 율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율리안이 바랐던 것들은 빈첸에 비해서는 소소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것.

아덴카의 당당한 일원으로 거듭나서, 아덴카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는 것.

거짓말 조금 보태면 그게 다였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숨기며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나도 결국 모든 꿈을 이루었으니.’

그렇다면 같았다.

율리안은 머릿속으로 누구의 생명값이 더 귀한가를 따졌다.

‘역시, 나보다는 형님이 살아야지.’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빈첸은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나았다.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신 같은 꼬맹이가 아니라, 빈첸 같은 어른이었다.

율리안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생각의 깊이는 깊었으나 그 시간은 무척 짧았다.

“형님이나 똑바로 전해요.”

빈첸 앞에 섰다.

빈첸은 이상함을 느꼈다.

“뭘 하려는 거냐?”

“형님도 알다시피 나는 논리적인 사람, 아니 논리왕인 신이라서요.”

빈첸은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동결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굳어버린 상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사는 것보다는 형님이 사는 게 이득인 것 같아요.”

“너…….”

율리안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괜히 말을 길게 했다가는, 또 저 괴물 같은 인간이 기적을 일으킬지도 몰라.’

언제나 그래왔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온 인간이다.

그래서 방심할 수 없었다.

‘그냥 잠자코, 형님이나 살아요. 나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이제 잃어버렸으니까.’

빈첸도 사정이 같다지만, 율리안이 보는 빈첸은 달랐다.

빈첸은 분명히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낼 것이다.

삶을 살아갈 이유.

존재의 이유.

빈첸이라면 새로운 것을 찾을 것이다.

율리안은 자신 없었다.

모든 것을 이룬 지금, 새로운 것을 찾을 여력도 남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죽음이 두렵지 않을 테니.

“나를 대악마로 기록하면 안 돼요.”

신력을 뿜어냈다.

존재를 치유하기 위하여, 그의 존재를 걸었다.

“이왕이면 아주 많이 멋있게 기록해 주면 좋겠어요. 저에 관한 서사는 마리아 기자님에게 맡기는 게 좋겠고요.”

“…….”

빈첸은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율리안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몸을 통해 흡수되는 신력에는, 율리안의 의지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서 빈첸은 율리안을 밀쳐내고 싶었다.

‘너는 지금, 누구보다 살고 싶다.’

한때 정신이 연결되어 있었고.

지금도 그 연결의 가닥이 남아 있는 상태.

그렇기에 율리안의 심리상태를 누구보다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너는 살고 싶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안은 이 길을 선택했다.

살고 싶다는 그 욕심보다, 더 많은 것이 율리안의 의지에 담겨 있었다.

‘젠장, 몸이 움직이지 않는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결국 율리안은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별다른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그저 눈을 감았다.

‘아직…… 숨은 쉬고 있구나.’

겨우 숨만 붙어서 헐떡이고 있었다.

신이 되었다더니, 일반적인 인간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율리안의 몸이 약간 흐려졌다.

‘저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인가.’

빈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영역은 걷히지 않았다.

* * *

백색검대원 제론이 인상을 팍 썼다.

“위험해. 돌아가라고 몇 번을 말했잖아.”

“안 돼요. 제발요, 제론 경. 나를 보내줘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정신 차려. 저 영역 안으로 어떻게 들어가겠다는 거야?”

제론은 세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지껏 잘 있다가 왜 이렇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건지.

“공자님, 아니 가주님에게 도움이 필요해요. 들어가야 해요.”

“그러니까, 저 영역 안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자체가 없다니까?”

“들어갈 수 있어요! 베르사 부인과 데이아 공녀님과 멀린 경이 함께 길을 열어주면, 저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들 수는 있잖아요! 칼백 경도 도와주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안 그래도 바쁜 그 세 분을 불러오라고? 나보고?”

제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난 못 해. 난 몰라. 자꾸 이러면 너 기절시킨다?”

“진짜 이렇게 나올 거예요? 진짜 엄청 후회할 줄 알아요!”

“협박해도 안 돼.”

세리는 분명히 느꼈다.

지금 빈첸이 누군가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영역으로 인하여 세계가 분리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레일사 시종장이 세리를 찾아왔다.

“정말로 가주님의 기척을 읽었단 말이지.”

시종장에게 말을 전한 사람은 윌슨이었다.

그는 비록 겁쟁이였으나 그래도 할 말은 했다.

그가 직접 레일사를 찾아가 세리의 말들을 그대로 전했고, 레일사가 세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맞아요. 저는 가주님의 기척을 읽을 수 있어요.”

“내가 부인께 말을 전하마.”

결국 베르사가 직접 움직였다.

베르사가 움직이니 데이아도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멀린과 칼백도 함께였다.

베르사가 말했다.

“우리의 힘으로도 이 영역을 뚫는 것은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다.”

“명심할게요.”

그들은 세리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멀린이 가장 앞에 섰다.

파괴력으로는 으뜸인 뇌력을 다룰 수 있으니, 그가 첫 발검을 하기로 했다.

“제가 다룰 검은 벽력종절입니다. 세리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것이나, 다른 분들은 알아서 호신하십시오.”

멀린의 검이 뇌력을 내뿜었다.

그 다음은 용아인 전사 칼백이었다.

“흐아아압!”

칼백 또한 전심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그 다음은 데이아의 비상검화.

그리고 베르사의 검이 그 뒤를 이었다.

아주 작은 틈이 보였다.

이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우주가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세리는 그 틈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데이아가 검을 거두었다.

“정말로 진입해 버렸군요, 어머니.”

“그러게나 말이다.”

사실 베르사와 데이아도 이게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가능성에 걸어보았을 뿐이었다.

칼백이 하하- 웃었다.

“저는 무조건 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진심은 닿는 법이니까요.”

멀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영역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열린 틈으로 느껴진 저 ‘영역’은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잠시 느껴진 세계의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세리의 몸으로 과연 버틸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그런데 멀린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몸이 가벼워.’

세리는 몸이 가볍다 느꼈다.

이 영역은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같았다.

발걸음이 가벼웠고 숨 쉬기가 편했다.

‘가주님을 찾아야 해.’

그녀는 발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주라고도 할 수 있는 미지의 공간이지만, 그녀는 빈첸을 향해 똑바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폰시아노와 율리안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빈첸이 똑바로 서있었다.

“가주님!”

빈첸의 눈동자가 또르르 움직여 세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직감했다.

빈첸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무사하시군요!”

시간만 있으면 회복될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크게 다친 사람은 폰시아노와 율리안이었다.

세리는 빈첸과 눈을 마주쳤다.

빈첸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세리는 빈첸의 생각을 이해했다.

“알았어요. 제가 이들을 어떻게든 구해볼게요.”

세리는 무릎을 꿇고 앉아 폰시아노의 맥박과 호흡을 체크했다.

그래도 폰시아노의 상태는 비교적 괜찮았다.

“워낙에 튼튼한 몸을 지니고 계셔서, 시간만 지나면 회복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 심각한 쪽은 율리안이었다.

율리안의 몸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꺼져 버릴 촛불 같았다.

세리로서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으나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살려야 해.’

그녀는 율리안이 어떤 존재인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저 율리안이 사실은 빈첸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를테면, 한 명의 빈첸이 이렇게 둘로 나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겉모습은 완전히 달랐지만, 율리안에게서는 예전 빈첸의 냄새가 느껴졌다.

지금과 달랐던 시절.

아덴카의 못난이였던 빈첸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하지?’

율리안의 몸이 계속해서 깜빡거렸다.

사라졌다가 나타났다를 반복했는데, 사라지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혹시?’

한 가지 생각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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