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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77화 (177/184)

환생의 정석 177화

빈첸은 이전에도 이와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카진에게서 승리를 쟁취했을 때.

그때에도 이와 같았었다.

“형님!”

율리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등 뒤에서 꿰뚫은 검날이 빈첸의 가슴 앞까지 튀어나와 있었다.

‘거, 거, 검이 아냐!’

검이 아니라 창이었다.

창날 끝에 백색 수실이 달려 있는 창.

백색 수실은 피에 물들어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율리안은 저 창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폰시아노 경이 왜!’

빈첸의 등 뒤로, 폰시아노의 얼굴이 보였다.

데이븐의 영역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눈에 초점이 없어.’

데이븐이 폰시아노의 육체를 조종한 것 같았다.

폰시아노가 ‘안…… 돼…….’라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 나름대로 데이븐의 잠식에 저항 중이었다.

쿨럭.

빈첸이 피를 토했다.

“괘, 괜찮아요?”

율리안이 황급히 빈첸을 향해 달려갔다.

신력은 인간들 기준으로는 신성력이었다.

지금이라도 치료를 해야 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나.”

율리안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데이븐이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데이븐은 율리안의 몸을 살짝 잡아당기는가 싶더니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꽈당.

율리안은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넘어져 버렸다.

“나는 신격을 가진 놈들이 싫어.”

“비, 비켜!”

“하나같이 기이한 힘들을 가지고 있거든.”

율리안이 일어서려 했지만 일어서지 못했다.

데이븐이 가슴팍을 한 발로 꾸욱- 눌렀다.

“으아아악!”

갈비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율리안은 신격을 지니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데이븐은 그 신격마저 파괴할 정도의 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그래, 비명 소리가 꽤 경쾌하구나.”

벌레를 밟아 죽이듯, 데이븐은 율리안의 가슴을 꾹꾹 지르밟았다.

율리안은 순간 소멸의 공포를 느꼈다.

‘이게…… 죽는 거야?’

빈첸이 돌아오기 전까지 분명 죽음을 각오했었다.

실제로 죽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눈 앞까지 다가오자,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이제야 인정받았는데.

이제야 어머니도 나를 아들로 봐주는데.

나를 안아주었는데.

‘죽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데이븐의 힘은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율리안은 데이븐 앞에서 항거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이게 끝이냐?”

빈첸이었다.

빈첸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가슴에 박혀 있던 창날에서 빠져나왔다.

어느새,

폰시아노는 기절해서 누워 있었다.

“혀, 형님?”

율리안이 간신히 눈을 돌려 빈첸 쪽을 바라보았다.

빈첸의 가슴 부근을 살펴보았으나 피가 멈춰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지혈이 됐다고?’

어중이떠중이한테 찔린 것도 아니고.

무려 창왕 폰시아노에게 찔렸는데 어떻게 저렇게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율리안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상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

회복한 것이 아니었다.

빈첸의 모습은 마치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조차 없었던 것 같았다.

‘처음부터 상처를 입지 않았던 거야.’

자세히 보니,

빈첸의 옷도 멀쩡했다.

폰시아노의 창이 빈첸의 몸을 관통했다면, 적어도 옷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빈첸의 앞섶은 깨끗했다.

상황이 그쯤 되자 데이븐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어떻게…… 된 거냐?”

율리안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졌다.

데이븐이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 * *

빈첸이 씨익 웃었다.

“한 번 당한 것에는 두 번 당하지 않는 타입이라서.”

500년 전.

빈첸은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누구보다 의연한 태도를 보였으나, 억울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지하감옥에서 죽어가던 그 모든 순간에도 검투장의 그 날을 곱씹었다.

비겁하게 등 뒤에서 검을 꽂던 카진의 모습을 수없이 그리며, 머릿속으로 그 날을 다시 그렸다.

다시는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제, 젠장.”

데이븐의 육체가 사라졌다.

육체의 형상에 구애받지 않는 ‘격’이다.

몸을 숨겨 어딘가로 사라지려는 것 같았다.

빈첸이 말했다.

“너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율리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빈첸의 말대로였다.

육체는 보이지 않았으나, ‘오염된 격’은 이 자리를 뜨지 못했다.

빈첸의 말에는 권능이 있었다.

‘너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 자체가 선포였다.

이 영역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명령.

영역에 완전히 굴복당한 데이븐은 빈첸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들어라.”

칸에서 은은한 백광이 새어 나왔다.

율리안은 한 공간이 들썩들썩 움직인다고 느꼈다.

저 공간이 바로 ‘오염된 격’이 갇힌 곳이 틀림없었다.

그곳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미친.’

결박당한 ‘오염된 격’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릿했다.

그런데 저 오염된 격을 결박하는 공간이 있을 줄이야.

말하자면, 저 안에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마법 폭탄들이 연달아 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용할 수 없는 폭발들이, 바깥세상으로는 조금도 새어 나오지 못했다.

‘형님이 남겼던 격. 그리고 지금의 격이 또 차원이 달라.’

오염된 격과 현 빈첸의 격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감히 뛰어넘을 수 없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벽.

율리안은 몸을 털고 일어서서 데이븐이 갇힌 공간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다, 이 자식아!’

혹시 말을 하면 빈첸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율리안의 귀가 깔짝깔짝 움직였다.

빈첸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먼저, 나를 지킨 검은 네디아의 비급을 통해 창안되었고, 아넬린에 의하여 빈첸 아덴카에게 계승되었다.”

빈첸은 네디아의 비급을 획득하여 검을 익혔다.

아넬린이 그 검에 ‘초월검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초월검격의 대인 결전기의 이름은 무해(無害)이며.”

무해.

말 그대로 해침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나의 스승이었던 네디아가 나를 기리며 창안한 검식이었다.”

네디아와 빈첸이 함께 만들어갔던 검의 이름은 본래 ‘파사검’이었다.

사미온을 부수는 검.

그리고 그 파사검의 마지막은, 아이러니하게도 방어검식이었다.

“내가 비겁한 자의 공격으로 나락을 맞이하였으니, 그 지옥을 피하도록 고안된 검식이었다.”

7성의 심상으로 ‘무해’를 펼치면, 뒤에서 향하는 상대 공격을 순식간에 인지하여 시간을 번다.

8성의 심상으로 ‘무해’를 펼치면, 뒤에서 향하는 상대 공격을 막아낸다.

9성의 심상으로 ‘무해’를 펼치면, 뒤에서 향하는 상대 공격을 튕겨낸다.

10성의 심상으로 ‘무해’를 펼치면, 뒤에서 향하는 상대 공격의 시간을 역행시킨다.

“하여, 내게는 네 공격이 닿지 않았다.”

비록 닿았다 할지라도 완연한 무위로 돌려버렸다.

공격한 사실 자체를 뒤돌려 버렸으니까.

결국, 도망치기를 포기한 데이븐이 다시금 형체를 만들어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허공을 쾅쾅 두드렸다.

데이븐은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좋게 다시 한번 얘기를 해보자. 너는 나이기도 하잖아. 내가 너로 인해 태어났잖아. 제발, 내게 한 번의 기회를 줘.”

그러나 빈첸은 동요하지 않았다.

과거의 잔재는 과거에 머물러야 한다.

또 다른 기회를 주기에 저 데이븐은 너무 많은 생명을 해쳤다.

데이븐이 마구 소리쳤으나 이내, 그 소리는 공간에 잡아먹혔다.

빈첸이 데이븐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널 아직까지 살려두는 이유는, 내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다.”

들으라고 말했다.

오염된 격은 들어야 했다.

현재 빈첸의 검이 어떤 검인지.

어떻게 창안되어 계승되었고, 어떤 힘을 지녔으며, 이 검이 무엇을 보여줄지.

데이븐에게 똑똑히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네디아의 검은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 선물을 네디아 홀로 남긴 것이 아니었다.

전달되기까지 아넬린의 도움이 있었고.

창안되는 과정에서 아슬란의 도움도 있었다.

빈첸이 율리안 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율리안에게 물었다.

“네가 초월검격에서 특별한 것들을 찾아냈었지.”

“맞아요.”

당시 율리안은 이렇게 말했었다.

[간결해진 이능검격은 다른 검식과의 융합이 무척 쉬워지네요. 그리고 특히 아덴카의 연환검과 호환이 대단히 뛰어나고요.]

네디아의 비급은 단순히 빈첸의 마지막을 보호하기 위한 기술만을 창안한 것이 아니었다.

“네디아의 의지는 곧 아슬란의 의지이기도 했으며, 당대 영웅들의 의지이기도 했다.”

이미 네디아의 비급을 읽으며 깨닫지 않았던가.

이 비급은 네디아 혼자서 남긴 것이 아니었다.

아슬란.

라엔므고.

베사툴.

네디아는 이미 그들과 함께했었다.

그리고 아넬린이 이를 전해주었고, 그녀의 뼈가 명검 ‘칸’으로 재탄생했다.

“내 스승이 내게 남긴 검은, 애초에 아슬란의 검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검식이었다.”

빈첸은 데이븐 앞에 섰다.

데이븐은 알아야 했다.

지금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너지는 것인지.

“다시 한번 고한다. 이 검의 이름은 초월 검격이며.”

아까는 네디아로부터 창안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히 말해야 했다.

“네디아와 아슬란, 라엔믄고와 베사툴, 아넬린의 의지가 담긴 검이다.”

이미 오랜 시간 ‘연환검’을 연습해 왔다.

그 까다로운 뇌력을 연환하여 사용했고, 신력도 연환해서 아덴카의 검을 다루었었다.

“네가 마지막으로 보게 될 검은 아덴카의 정검 8식이며.”

아덴카 정검 8식.

비상검화(飛上劍花).

제론과 상대할 때 사용했었던 그 검.

아슬란이 최후의 의지를 담아 완성한 검.

그 검의 끝이 향하는 곳은 바로 저 ‘오염된 격’이었다.

“이름은 비상검화이다.”

그리고 이번 비상검화에는 초월검격의 이능을 담았다.

500년 전 영웅들이 남긴 모든 유산들이 ‘칸’에 머물렀다.

아덴카 정검 8식.

이능 연환.

이능(異能) 비상검화(飛上劍花).

빈첸의 몸이 하나의 검이 되었다.

그의 몸에서 백광이 뿜어져 나왔다.

일전, 제론과의 검투에서는 서로의 몸이 일직선이 되어 쏘아졌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빈첸의 영역이 펼쳐진 모든 공간이 곧 비상검화의 공간이었다.

이 공간 전체에 비상검화의 권능이 깃들었다.

율리안은 결국 손으로 눈을 가리고 눈을 감고 말았다.

‘누, 눈부셔!’

그의 신격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검압이 느껴졌다.

이 영역이 곧 검(劍)이었다.

검으로 이루어진 세계.

이 세계는 곧 빈첸의 세계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율리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세계는 고요했다.

보기만 해도 섬뜩했던 ‘격’은 사라져 있었다.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소멸했다.

“끝인…… 거죠?”

율리안은 말을 더듬거렸다.

내가 어떤 공간에 있는 거지.

아니,

애초에 나를 신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신은 저 인간인데?

‘진짜 어이없게도 오염된 격을 압도해 버렸네.’

정말로 힘든 싸움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너무 싱거울 정도였다.

오염된 격이 너무 약해서가 아니었다.

빈첸이 지나치게 강해서였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율리안은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율리안은 눈을 끔뻑거리며 빈첸을 바라보았다.

빈첸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왜 그래요?”

율리안이 빈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혀, 형님!”

율리안은 그제야 아까 데이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10개의 심상은 인간의 힘과 격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을 다루면 오래 지나지 않아 너도 죽는다.

빈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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