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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76화 (176/184)
  • 환생의 정석 176화

    대악마 데이븐은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다가오는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가 히죽 웃었다.

    “헤에.”

    그는 본능적으로 빈첸의 성장을 감지했다.

    9성을 달성했을 때에 이미 성장의 한계치를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한계를 뛰어넘어버렸다.

    “훨씬 더 먹음직스러워졌네.”

    빈첸이 폰시아노를 지나치며 걸었다.

    “폰시아노 경께서는 바깥을 맡아주십시오.”

    “…….”

    빈첸은 바깥 상황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혼란의 도가니일 것이다.

    그렇기에 오염된 격이 더욱 강해졌을 것이고.

    “새로운 시대에도 어른들이 필요한 법입니다.”

    폰시아노라면 혼란한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지배했던 세 명의 절대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폰시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득한 후배에게 자리를 넘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구나.”

    그렇지만 그 대상이 빈첸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 옆을 지나치고 있는 빈첸은, 여지껏 경험했던 그 어떤 무인들보다 뛰어난 무인이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우주 같았다.

    너무 거대해서 인지할 수 없는 수준.

    현재의 빈첸은 폰시아노에게도 그런 경지였다.

    폰시아노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급속도로 세계가 어두워졌다.

    검붉은 기운이 세계를 좀먹었다.

    율리안이 빠르게 말했다.

    “형님! 영역이에요!”

    율리안은 이 영역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여태까지도 전력을 펼치지 않았던 거야!’

    조금이나마 데이븐을 밀어붙였다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사실 데이븐에게는 여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자. 우리 둘의 잔치…… 아니, 셋의 잔치를 시작해 보지.”

    데이븐은 율리안 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율리안은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황급히 몇 걸음을 옮겨 빈첸 뒤에 숨었다.

    실제로 겁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일부러 더 겁먹은 척 연기했다.

    ‘나는 하찮아 보여야 돼. 완전히 애송이로 보이는 거야.’

    나 같은 건 언제라도 처리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보이면 데이븐이 이쪽을 더 만만하게 생각할 거고, 그건 곧 방심을 의미했다.

    아주 작은 방심이 큰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젠장. 내가 여기 있으면 형님한테 방해밖에 안 될 텐데.’

    율리안은 현재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했다.

    이곳에 있으면 빈첸의 약점이 될 것이다.

    ‘나 때문에 발목을 잡히면 안 돼.’

    생각하자.

    생각하자.

    ‘최악의 경우에는 자살이라도 생각해야지.’

    율리안은 폰시아노와 수십 일을 함께 했고, 신격을 통해 폰시아노의 몸에 새겨진 술식을 이미 확인한 상태.

    그것을 흉내내기로 했다.

    데이븐이 말했다.

    “예상은 했다만, 신격을 지닌 존재인가.”

    이 공간에는 본래 빈첸만을 담으려고 했다.

    그런데 저런 곁다리가 함께 들어왔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리 위협적인 놈은 아닌 것 같기는 했지만 조금은 신경 쓰였다.

    순간,

    빈첸의 칸이 백광을 흩뿌렸다.

    “이크.”

    데이븐이 몸을 뒤로 젖혔다.

    흰 빛이 그의 몸이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갔다.

    막강한 검압이 느껴졌다.

    “이 정도란 말이지.”

    데이븐이 다시 한번 씨익 웃었다.

    입술을 핥았다.

    “이렇게나 훌륭한 육체가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

    피한다고 피했으나 데이븐의 가슴팍에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피 대신 검붉은 기운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금방 회복되었다.

    “나를 토벌하겠다고?”

    “그래.”

    데이븐과 빈첸이 마주 보고 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했다.

    서로 아무 공격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둘 사이의 공간은 이미 전쟁터였다.

    서로를 향한 살의(殺意)가 서로의 육체를 파고들기 위해 수천, 수만 가닥으로 갈라져 전쟁을 벌였다.

    “지난 500년간, 나를 토벌하겠다던 미친놈들은 아주 많았다.”

    그가 보는 인간들은 바퀴벌레 같았다.

    더럽고, 또 징그러운데, 이상한 부분에서 끈질겼다.

    “주제파악도 못하고 말이야.”

    “그런 이들의 바람이 모여 지금이 있는 거겠지.”

    “그놈들은 모조리 죽었지. 그도 아니면 내 피를 마시고 내 노예가 되거나. 너도 같을 것이다.”

    데이븐의 눈에는 기이한 욕망이 일렁거렸다.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 살의. 파괴욕. 멸망만이 가득한 욕망이었다.

    그것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빈첸이 피식 웃었다.

    ‘저것이, 내가 남긴 격이란 말인가.’

    그 격이 오염되어 저렇게 되었단 말인가.

    “뭐가 웃긴 거냐?”

    “내가 벌인 일은 내가 마무리 지어야겠지.”

    빈첸이 잠시 눈을 감았다.

    데이븐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드디어 정신을 놓은 거냐?”

    데이븐의 몸이 사라졌다.

    그는 애초에 ‘육체’의 형상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의 의지 자체가 하나의 공간이 되었고, 그 공간이 곧 검(劍)이었다.

    빈첸을 둘러싼 공간 전체가 검이 되어 빈첸의 몸을 관통했다.

    율리안이 그것을 느꼈다.

    ‘혀, 형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검.

    의지로 발현되는 검술의 끝.

    심검(心劍)이 틀림없었다.

    수만 자루, 혹은 그 이상의 예리한 검날이 빈첸의 몸을 꿰뚫는 환상이 보였다.

    ‘미친!’

    생각보다 데이븐은 훨씬 더 강했다.

    과연 인류를 멸망시킬 격이었다.

    ‘응?’

    그런데 빈첸의 몸을 관통했던 심검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공간이 제자리를 찾았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만 같았다.

    ‘뭐야……?’

    율리안조차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빈첸이 눈을 떴다.

    “외팔이 데이븐은 검신 케샤크의 가호를 진심으로 부러워했었다.”

    아무리 부러워해도 가질 수 없었던 것.

    갖고자 했으나 꿈꾸지 못했던 것.

    그것이 이제는 빈첸에게 있었다.

    “그때에 머무른 과거의 악령은 가지지 못한 것이다.”

    “뭐라는 거냐?”

    데이븐이 다시 형체를 이루었다.

    그의 왼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바람처럼 움직여 빈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은 수십 가닥의 채찍처럼 변해 빈첸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후대인들은, 검신 케샤크의 가호를 연구하여, 검신 특성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500년 간,

    오염된 격은 인간에게 발전이 없다 생각하였다.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되었다.

    사미온은 그에게 굴종했고, 수많은 자들이 처형당했으며, 역사는 데이븐의 입맛에 맞게 조리되었다.

    “네가 과거에 머물러 있던 그 순간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던 것이다.”

    빈첸의 손등에 검신 케샤크의 가호가 빛났다.

    70일 동안, 그는 발키아로부터 물려받은 케샤크의 가호를 갈고닦았다.

    그리고 그 가호의 최종 특성, ‘검신’ 특성을 발현시키는 데 성공했다.

    말을 하는 모든 순간에 데이븐은 끊임없이 빈첸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하나하나가 도시 하나를 파괴하고도 남을 정도의 권능을 품고 있었다.

    마치 멸망의 권능을 담은 유성우가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러한 공격들을 맞이하는 빈첸의 표정은 담담했다.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아밀룬 제3검식.

    중검첩방(重劍疊防).

    친구가 남긴 검.

    팔콘의 검이 세계를 덮었다.

    이 또한 심검의 영역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의 세계가 펼쳐졌다.

    세계를 가득 메우고 떨어져 내리던 유성우가 소멸했다.

    율리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다 사라졌잖아?’

    그의 신격으로도 빈첸의 검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데이븐의 모든 공격들이 완전한 무(無)로 돌아갔다.

    ‘이런 게…… 가능하다고?’

    율리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나는 약점이 되지 않아.’

    처음에는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걱정했다.

    빈첸의 약점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걱정은 의미 없는 걱정이었다.

    ‘형님이 데이븐을 압도하고 있어.’

    압도.

    그 말이 정확했다.

    불현듯, 한 가지가 생각났다.

    ‘검신 특성을 완벽하게 발현시키면 본인의 성취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가상의 심상을 하나 더 만들어주는 효능이 있는데.’

    그렇다면,

    ‘현재 형님의 경지가 10성이라는 거야?’

    심상이론이 창안되어 발전해 온 이래로, 10성은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경지였다.

    인간이 달성할 수 없는 경지라고들 얘기했다.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율리안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 상식적이지 않지. 그렇기에 너무 말이 되지.’

    여태까지 빈첸이 해온 모든 것들이 상식적이지 않았다.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말도 안 돼’였다.

    그 말이 안 되는 것들을 계속해서 해낸 사람이 빈첸이었다.

    살아 있는 비상식의 결정체.

    그렇기에 지금의 상황이 납득되었다.

    어느새,

    데이븐의 온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철철 흘러내렸다.

    “설마 10성인가?”

    “대답해 줄 의무는 없는 것 같군.”

    데이븐의 말이 맞았다.

    빈첸의 심장에는 10개의 심상이 빛나고 있었다.

    하나는 ‘검신’ 특성으로 인하여 생성된 임시 심상이었다.

    “10개의 심상은 인간의 힘과 격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크큭,

    하고 웃었다.

    “그 힘을 다루면 오래 지나지 않아 너도 죽는다.”

    “…….”

    “어떠냐? 나와 힘을 합쳐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네게 영생을 주겠다.”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데이븐이 크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얼마 후.

    데이븐은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러나 빈첸은 그에 응답하지 않았다.

    데이븐을 둘러싼 공간이 데이븐을 관통하는 검날이 되었다.

    또다시 얼마 후.

    데이븐이 악을 썼다.

    “너도 죽는다고! 이 덜떨어진 새끼야!”

    데이븐은 또다시 크게 비명을 질렀다.

    격 자체에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그는 직감했다.

    이대로면 여기서 토막 나서 사라진다.

    500년을 뭉쳐온 원념이, 한순간에 소거될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이냐? 그 힘을 사용하면 너도 곧 죽는다는 것을, 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빈첸에게는 오늘이 중요했다.

    한 번의 죽음을 경험하고, 이 몸을 차지하게 되면서, ‘오늘’의 의미를 깨달았다.

    오늘이 모여 미래가 된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서 확실히 자신의 잔재를 완벽하게 없애버려야 했다.

    그것이 ‘오늘’ 빈첸이 해야 할 일이었다.

    데이븐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공포에 질린 듯한 모양새였다.

    빈첸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500년 전, 외팔이 데이븐은 심장에 검이 관통당했고, 적황미력이 온몸을 헤집어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었다. 그때에도 데이븐은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비명 한 번을 지르지 않았다.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적이었던 카진 앞에서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자들 앞에서 그 날의 떳떳한 승리를 기억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날의 승리는 데이븐의 것이었다.

    “그런데 너는 어떠한가?”

    분명히 같은 격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5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변한 것 같았다.

    “500년 간 너는 오히려 퇴보하였구나.”

    약간의 고통에도 비명을 지르고.

    삶에 대해 미련이 남아 생명을 구걸하고.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회유하고.

    “사, 사, 살려다오. 제발. 살려만주면 무엇이든 다하겠다.”

    데이븐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가 쥔 검도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공포에 질려 아무것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라고 할 줄 알았냐?”

    푸욱!

    등 뒤에서 누군가 빈첸을 찔렀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빈첸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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