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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75화 (175/184)
  • 환생의 정석 175화

    처음 인류 멸망론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저기, 저 먹구름을 봐.”

    세상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뇌전이 몰아쳐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났다.

    갑작스레 전염병이 일고, 그로 인해 또다시 수천 명이 죽었다.

    “이, 일곱 개의 무지개가 떴어.”

    “갑자기 이게 무슨 소나…… 으아아악! 피, 피다! 피, 피라고!”

    까마귀 떼가 하늘을 날아 어딘가로 도망치고.

    해안가에 떼죽음 당한 돌고래들이 밀려왔다.

    멸망의 전조로 느껴질 법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신관들은 앞다투어 성명을 발표했다.

    악몽과 신전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 파편이 세계에 튀고 있다는 얘기였다.

    “시, 신성결계가 오염된 격을 상대하고 있다고?”

    “오염된 격의 일부가 세상으로 퍼져나가 재앙들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인데…….”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었으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딘가에서는 지진이.

    어딘가에서는 폭풍이.

    어딘가에서는 산사태가.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재앙들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재앙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겠다며 신전으로 달려간 아이들도 있는 반면, 혼란을 틈타 온갖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부류의 인간들도 존재했다.

    “남자는 죽이고 여자들은 끌고 가.”

    “이, 이놈들아! 내 딸을 어디로 데려가느냐! 이봐! 이봐 윌리엄! 자네가 우리한테 이러면 안 되지!”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던 일들이 자행되었다.

    “시끄러워 영감탱이. 나는 전부터 당신 딸이 마음에 들었……어?”

    윌리엄의 목이 땅에 굴러떨어졌다.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자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베르사였다.

    베르사는 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최근에는 아덴카 내부의 일만 담당했기에, 과거의 위명을 많이 잃기는 했으나 그녀는 과연 거인의 이명을 지닌 무인다웠다.

    “아덴카는 온갖 불온한 것들의 횡포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베르사와 호법당의 무인들도 숨 가쁘게 움직였다.

    그들뿐만 아니라 아덴카 소속 검대원들과 심지어는 붉은 요새의 생도들까지 동원되어 치안을 다스리는 데에 힘써야 했다.

    그나마 아덴카가 다스리는 영역은 비교적 평화로운 편이었다.

    “베르사 부인. 케르빌가에서도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케르빌가에서도?”

    케르빌가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금융가.

    평화로운 시기에는 아주 높은 위상과 명망을 지닌 명가였다.

    그러나 인류멸망론이 대두된 지금, 그들은 오히려 수많은 자들의 타겟이 될 뿐이었다.

    비적 떼들이 들끓고 전에는 용병이었던 자들이 합심하여 케르빌가를 공격했다.

    “예. 상황이 꽤 심각한 듯합니다.”

    “지원 가능 병력은?”

    “없습니다.”

    “내가 가도록 하지.”

    “부인께서 직접 말입니까?”

    베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도 많이 지치셨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진 지 벌써 2개월 가까이 흘렀다.

    바람소리로부터 인류 멸망론이 대두된 이후, 세계는 급속도로 어지러워졌다.

    마치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가야 한다.”

    빈첸에게 아덴카를 부탁받았다.

    몸으로 낳지는 않았으나 마음으로 낳은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는 악몽과 직접 대적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

    현재는 폰시아노 바르티칸이 악몽과 대립하고 있다 들었다.

    숨죽이고 수많은 영웅들이 악몽과 싸우기 위하여 깃발을 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악들이 창궐했다.

    베르사는 이 모든 상황들이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어떤 시대는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하지만, 악을 드러나게 하기도 한다.’

    이미 예측했던 바였다.

    그리고 영웅이 탄생하는 것보다, 악인이 나타나는 것이 훨씬 쉬웠다.

    올곧은 정의는 멀고, 부덕한 탐욕은 가까우니까.

    또한 수많은 곳에서 사이비 교주들이 득세했다.

    “나를 믿어라, 내가 오직 너희들의 구원자가 될 것이다.”

    식료품과 물 등을 비축하기 위한 전쟁 아닌 전쟁이 비일비재했다.

    * * *

    폰시아노 바르티칸이 무력을 담당했고, 율리안이 지원을 맡았다.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사람들처럼 ‘오염된 격’을 밀어붙였다.

    ‘오염된 격’의 힘이 일부 줄어드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율리안은 희망을 읽어냈다.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겠어!’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폰시아노는 지쳐갔으나 ‘오염된 격’은 더 이상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회복하고 있잖아?’

    율리안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악’들이 자행되고 있다.

    그러한 악들은 오염된 격을 더욱 오염시켰다.

    인간들의 추악한 마음과 행동들이 모여 오염된 격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500년간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이거였어. 오염된 격은 인간들의 추악함을 먹고 자라는 거야.’

    60일째가 되었을 때.

    그림자와 같았던 ‘오염된 격’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폰시아노는 숨을 고르며 오염된 격을 바라보았다.

    “너는…….”

    초상화나 역사서를 통해 본 적이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한 ‘오염된 격’은 외팔이 검사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대악마, 데이븐?”

    “나를 알아보는구나, 아이야.”

    오염된 격은 데이븐이었다.

    데이븐은 자신의 몸을 만져보았다.

    “진짜 육체는 오랜만이네.”

    크하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500년의 세월이 지나도 인간들의 추악함은 늘 같단 말이지. 발전이 없어, 발전이.”

    그는 두 팔을 벌렸다.

    마침 검은색 비가 내리고 있었다.

    데이브은 검은 비를 맞으며 즐거워했다.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더러울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멋져.”

    “…….”

    데이븐이 말을 할 때마다, 검은 호흡이 새어 나왔다.

    호흡에 불길함이 가득했다.

    “그래서 참 좋아. 도무지 힘을 잃을 겨를을 주지 않거든.”

    데이븐이 왼팔로 검을 들어 올렸다.

    오염된 격이 형상화된 데이븐은 폰시아노 같은 자가 혐오스러웠다.

    “나는 너처럼 올곧은 신념을 가진 아이들을 싫어한다. 그러니 여기서 죽어줘야겠구나.”

    데이븐의 몸이 사라졌다.

    그의 검이 달라졌다.

    그의 스승 네디아와 함께 창안한 파사검이 펼쳐졌다.

    그 일격으로 폰시아노의 창이 부러졌다.

    ‘이런.’

    그는 황급히 거리를 벌려 데이븐의 검을 피해냈다.

    데이븐의 검이 맞닿은 허공이 잘려나갔다.

    그곳에 ‘이능검격’의 권능이 담겼다.

    검로를 따라서, 허공이 검게 물들었다.

    데이븐이 씨익 웃었다.

    “자. 그 공간에는 닿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데이븐이 균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순식간에 손이 시꺼멓게 물들었다.

    “봤지?”

    그것은 대악마의 힘.

    멸망의 권능이 담긴 공간이었다.

    데이븐의 손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 영역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내가 유일하거든.”

    폰시아노는 눈을 부릅뜨고 데이븐을 노려보았다.

    데이븐이 이토록 친절한 이유는 알고 있었다.

    데이븐은 지금, 가장 잔인하고 처참하게 자신을 죽이려 들고 있었다.

    무인으로서 가장 굴욕적인 죽음.

    공포에 젖은 죽음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는 못하지.’

    저 격을 넘을 수는 없더라도.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바르티칸의 가주, 폰시아노였다.

    그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또한 데이븐과 싸우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생과 사의 기로 속에서 한 단계 벽을 깨부쉈다.

    그의 심장에도 9개의 심상이 빛나고 있었다.

    마력회로를 따라 마력이 세차게 흘러가, 그의 손에 빛나는 창 하나를 생성시켰다.

    “호오? 마력창?”

    “어떤 인간들은 한결같이 더러우나, 또 어떤 인간들은 한없이 숭고하다.”

    “후자는 현저히 적지.”

    폰시아노는 두 발을 땅에 디뎠다.

    빈첸의 시간을 벌어주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기에 위대한 것이다.”

    폰시아노와 데이븐의 2차전이 시작되었다.

    폰시아노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도합 70일의 시간이 지났다.

    폰시아노는 직감했다.

    ‘한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상이 혼탁해질수록, 데이븐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율리안은 다른 세계의 자신이 왜 세계를 지키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제아무리 정령신과 계약하여 성장했어도 소용 없었다.

    ‘그 세계의 인간들도 이곳과 똑같았을 테니까.’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그래서 절망이 있는 한.

    대악마 데이븐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리라.

    ‘폰시아노 경이 죽고 나면 나 혼자 대악마를 상대해야 해.’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겁이 났다.

    빈첸의 얼굴을 떠올렸다.

    ‘형님이라면…….’

    결과와 상관없이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율리안은 빈첸으로서 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두려워하지 말자.’

    담대히 이겨내기로 했다.

    그래야 덜 창피할 것 같았다.

    데이븐이 씨익 웃었다.

    “자, 이제 끝이다.”

    이미 폰시아노가 움직일 공간은 없었다.

    데이븐과의 전장은 온통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온몸이 멸망의 권능에 잠식되어 파괴될 것이었다.

    폰시아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놈에게는 육체가 필요하다.’

    70일을 싸우다 보니 알 것 같았다.

    지금 일종의 육체를 형상화하기는 했으나 아마도 저것은 그리 효율적인 방법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기에 임시적으로라도 내 육체를 빼앗겠지.’

    그건 율리안에게 몹쓸 짓이었다.

    폰시아노는 아들을 떠올렸다.

    아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왔다.

    그러니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세르쿤. 네게 무척이나 고맙군.’

    세르쿤은 과거 ‘살왕’이라 불렸다.

    그는 금지된 술식들도 여럿 알고 있었고, 그중 하나를 폰시아노의 몸에 새겨넣었다.

    그것은 자폭의 술식이었다.

    폰시아노는 잠자코 기다리다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데이븐의 검을 잡았다.

    “역사는 나를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기록할 것이다.”

    그 말을 달리하면,

    역사가 기록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다시 말해 이 세계가 데이븐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외침이었다.

    마력회로가 들끓었다.

    ‘이제는 편히 쉴 수 있겠구나.’

    지난 70일이 그에게는 지옥 같은 행군이었다.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진즉에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곧,

    몸이 폭발할 것이었다.

    ‘어?’

    그런데 술식이 멈추었다.

    심상에 새겨넣은 저주의 술식이 사라져 버렸다.

    ‘뭐지?’

    이상한 일이었다.

    이미 발동된 저주술식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이것이 대악마 데이븐의 권능인가 싶었다.

    ‘진짜로 끝인가.’

    몸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재빨리 마력을 끌어올렸다

    손과 발의 힘줄을 자르고, 마력회로에 큰 충격을 주어 갈가리 찢어내기로 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마저 쉽지 않았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 주었던 마나가 정지했다.

    마나 동결이었다.

    ‘데이븐이 만들어낸 저 검은 영역 때문인가.’

    나는 최후의 순간마저, 영광되이 죽지 못하는 것인가.

    입술을 깨물었다.

    신성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율리안에게 미안해졌다.

    이제 남은 짐은 율리안에게 떠넘겨야할 테니까.

    그런데 그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때로는 작은 숭고함이 위대함을 낳는 법입니다.”

    71일째.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걸음을 따라서, 검은색으로 물들었던 데이븐의 영역들이 밀려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500년의 세월 동안 빚어온 인류의 무학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데이븐의 말에 따르자면 인간들에게 발전은 없었다.

    그러나 빈첸이 보는 인간들은 달랐다.

    “어떤 이들의 숭고한 정신과 노력들이 오늘날의 대악마를 막을 것입니다.”

    100일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빨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발전시켜온 현대무학은, 빈첸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효용을 지닌 무예였다.

    그가 ‘칸’을 들어 올렸다.

    폰시아노에게 경의를 표했다.

    “아덴카의 가주 빈첸 아덴카. 폰시아노 경의 의지를 이어, 대악마 데이븐의 토벌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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