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74화
100일 전.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내가 도울 것이다, 인간.”
율리안은 너스레를 떨면서 확신했다.
‘100일이 지나면 형님을 못 보겠네요.’
율리안도 아슬란에 대해서 안다.
아슬란은 곧 ‘정령신과 계약한 자신’이었으며, 그는 지금의 자신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한 존재는 아니었다.
‘내 신력을 모조리 소모해도 오염된 격을 막지 못할지도 몰라.’
뛰어난 머리로 수만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그 모든 계획에서 자신이 살아남는 방법은 없었다.
‘에휴.’
결국 나는 이런 사람인가 보다.
율리안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절대로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사명을 이루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는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슬란과 자신은 본질적으로 결국 같았다.
‘결국은 인간의 멸망을 막고 싶어졌어.’
그게 율리안 내면 깊숙이 내재되어 있던 본성이었다.
멸망을 앞둔 인간들을 그저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 또한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었다.
‘100일 후의 세상을 기대할게요.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못 막으면 가만 안 둘 테다.’
율리안은 막강한 신력을 뿜어내며 말했다.
“둘란 신관. 지금부터 내 신언을 잘 듣도록.”
“…….”
둘란은 결국 율리안에게 절을 올렸다.
율리안에게서 새어 나오는 신력은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 너머의 존재.
분명히 신이었다.
“명령하시면 받들겠습니다.”
“우리는 역사 이래로 가장 강력한 악령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율리안은 100일의 시간을 벌기로 했다.
율리안의 명령에 따라 대륙 각지에서 상급신관들이 소집되었다.
둘란이 일선에 서서 율리안의 명령을 따랐다.
둘란이 말했다.
“곧 오염된 격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신력만이 격을 저지할 수 있다. 신성결계의 중추는 신께서 맡아주실 것이다.”
신관들은 긴가민가했다.
신이 직접 강림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성결계를 마주한 신관들은 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둘란 또한 크게 놀랐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강력한 신성결계.’
병자들이 이 안에 들어간다면 모든 병이 낫게 될 것이다.
불치병을 낫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먼 자를 눈 뜨게 하고.
모든 기적이 벌어지는 신의 영역이 펼쳐졌다.
“신관들은 들으라.”
신성결계는 신이 펼친다.
그러나 신이라 하여 인간들의 세상에 무한정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이 결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신께서는 막대한 신력을 소모하셔야 한다.”
모두가 그 말에 동의했다.
눈앞에 증거가 있어서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오염된 격.’
무엇인가가 결계를 뚫고 진입하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은 간접적으로 영역과 영역의 전쟁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신관들로 하여금 공포를 일으켰고, 그 공포는 신관들을 움직이게 했다.
“우리는 무얼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도 해야 할 일을 주십시오.”
둘란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검은색 옷을 입은 여인 두 명이 서 있었다.
바로 아덴카의 베르사와 레일사였다.
그들은 흑색금고에서 성배를 꺼내 신전을 찾았다.
둘란이 말했다.
“이것은 성왕 라엔므고가 이 날을 대비하여 남긴 유산입니다.”
“5, 500년 전 말입니까?”
“이 날의 재앙은 500년 전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으니까요.”
힘주어 말했다.
“재앙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아덴카의 주인, 빈첸 경뿐입니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빈첸 경이 부탁한 100일의 시간을 버는 것뿐입니다. 어쨌든 이 성배는 신성력을 담는 그릇입니다.”
신관 한 명, 한 명의 힘이 나약했다.
그러나 작은 힘이 모여 태산을 이룬다.
“우리들의 신성력은 성배를 통하여 보다 정순하고 격이 높은 신력으로 정제될 것입니다.”
둘란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성배에서 희뿌연 광채가 새어 나왔다.
성배 안에 신력이 깃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전달한 신력은 이 신성결계를 유지하는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이 모든 소식은 바람소리의 최고 수석기자 마리아에 의하여 대륙에 생생히 전해졌다.
언론인들 사이에서 마리아는 ‘언어의 마술사’라고 불리는 중이었다.
언어의 마술사는 대륙인들에게 경각심을 일으켰고, 모두가 재앙을 알게 했다.
그녀의 기사를 접한, 신성력을 갖춘 사람들이 가이아 신전으로 몰려들었다.
[상급 신관, 200여 명 집결.]
[중급 신관, 800여 명 집결.]
[하급 신관, 3,200여 명 집결.]
그리고 신관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까지.
“저희 아이가 신성력을 지닌 것 같아요.”
“저희 아이도요!”
신관은 아니지만 신성력을 타고난 어린아이들이 존재했다.
신관으로서 수행하지 않으면 그 신력은 점차 사라지겠지만, 어쨌든 신력이 존재하는 아이들이었다.
한편, 폰시아노 바르티칸은 허허- 웃었다.
“난데없이 인류 최악의 재앙이라니.”
“그러게나 말이에요.”
레이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각만 해도 막 가슴이 벌렁거리지 않아요?”
“그래. 우리가 창술을 익힌 것은 이 날을 위해서지.”
레이븐이 창을 쥐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가요. 저희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예요.”
“그렇게나 가고 싶으냐?”
“물론이죠!”
“이 무대의 주인공은 네가 아닐 텐데.”
폰시아노는 아들이 늘 주인공이기를 바랐다.
비단 특별한 마음이 아니라, 부모의 평범한 마음이었다.
이 날의 유일한 주인공은 빈첸일 테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조연이었다.
레이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저는 제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겠지.”
혹시나 아들이 우울할까 싶어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레이븐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비록 조연으로 소모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짤막하게 기록하게 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즐거웠다.
그 역사에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그는 행운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레이븐의 시야가 뿌옇게 변해왔다.
“아…… 버지?”
“무인으로서의 폰시아노는 너와 함께 가야겠으나, 아버지로서의 폰시아노는 너를 데려갈 수가 없구나.”
레이븐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비되어 버렸다.
“세르쿤. 레이븐을 부탁하네.”
“…….”
세르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언어의 마술사가 세상에 알린 것이 진실이라면, 나는 돌아올 수 없겠지.”
“레이븐 공자가 슬퍼할 겁니다.”
“이겨낼 수 있을 게야.”
폰시아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왠지 모르게 후련해 보이시는군요.”
“그래.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가 않군.”
그가 창을 쥐었다.
“칸 아덴카와 발키아 사미온, 그들에게 뒤처져 기록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와 함께 한 시대를 살아온 영웅들은 별이 되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영웅들이 필요한 법이야.”
사실,
이 시대의 영웅들이 너무 오래 집권하기는 했다.
30년 전에도, 지금도, 대륙에서 가장 강한 무인들은 칸과 발키아와 폰시아노였으니까.
폰시아노는 쓰러진 아들을 바라보았다.
정신력이 제법이어서, 여전히 정신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아들아.”
마지막으로 말해주었다.
“모든 시대에는 영웅들이 존재한다. 다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옛 시대의 잔재가 사라지면, 새 시대가 피어날 것이다.
그가 보는 레이븐은 충분히 새 시대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네게 맡기마.”
폰시아노는 홀로 가이아의 신전으로 향했다.
* * *
“용아인 전사들은 뿔나팔을 불어라.”
뿌우우우-!
용아인 전사들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칼백이었다.
용아인들의 위대한 전사 칼백은 빈첸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았다.
“용아인들은 은혜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오염된 격’에게는 따로 형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어둠의 형태였고, 신성결계를 파괴하려 드는 기이한 힘이었다.
용아인 전사들은 마나를 일으켜 그 힘에 모든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오염된 격’에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노력이 비록 미약한 바람에 불과할지라도, 어떤 작은 바람은 태풍을 일으키는 법이다.”
용아인 전사들.
그리고 용아인 정령술사들은 합심하여 오염된 격과 맞서 싸웠다.
자신들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으므로.
실제로 율리안은 용아인 전사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신경을 조금이라도 분산시켜줘.’
오염된 격은 오로지 빈첸의 육체를 찾고 있었다.
모든 ‘그릇’이 사라져 버린 지금, 오염된 격도 꽤 급한 모양이었다.
신성결계를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용아인 전사들의 공격은 큰 도움이 되었다.
‘부족해.’
겨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율리안은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신성결계를 유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다.
만약 ‘빈첸으로서의 경험’들이 없었다면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겨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지.’
훗날,
혹시라도 빈첸을 만나게 된다면 엄청난 잔소리가 쏟아질 것이 뻔했다.
잘난 체하는 얼굴로, ‘나 때는 그것보다 더한 것도 참았어’라며 괴상한 소리를 해댈 것이 뻔했다.
그게 싫어서라도, 그는 버텨내야 했다.
‘포기 못 해.’
100일을 벌어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100일을 버틸 것이다.
지치고 곤하여 넘어지기 직전.
그때마다 새로운 도움이 있었다.
‘폰시아노 경?’
그의 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8성 기사 멀린이 이끄는 신성기사단들이 내뿜는 파괴력을 모두 합쳐도, 폰시아노의 화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창 한 자루는 땅을 가르고 지진을 일으켰다.
‘오염된 격도 이제 반응을 하네?’
다른 자들의 도움이 ‘신경을 분산하는 정도’에 그쳤다면, 폰시아노의 무력은 격의 신경을 아예 돌려 버렸다.
오염된 격이 신성결계가 아니라 폰시아노와 대적하기 시작했으니까.
“후우. 하아.”
율리안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사이,
성배에 담긴 성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신력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율리안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뭔가 달라.’
예전에도 성배를 통해 신력을 회복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알 것 같아.’
이 신력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인간들의 절실함에는, 율리안이 미처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잠재력이 있었다.
[“엄마랑 아빠랑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게 해주세요.”]
[“평화롭게 해주세요. 기도합니다.”]
특히나, 아이들의 때 묻지 않은 신성력은 율리안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강대한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란 말이야?’
승격하면서 지니게 된 신력은 우스울 정도였다.
인간들 한 명 한 명의 힘은 미약했으나, 그 힘들이 모여 강을 이루었다.
율리아는 신성결계를 강화하는 한편, 폰시아노를 도왔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막을 수 있겠는데?’
그렇게 40일이 흐르고, 50일이 흘렀다.
폰시아노 바르티칸은 오염된 격을 상대로 20일을 넘게 버텼다.
60일째가 되었을 때.
‘오염된 격’이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