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73화
아슬란이 물었다.
“그 세계의 빈첸은 잘 살아내고 있어요? 아니, 빈첸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겠군요.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율리안.”
“그 세계의 율리안은 잘 살아내고 있나요?”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이 없었다면 빈첸도 이 자리에 없을 것이었다.
빈첸에게는 없는 것들이 율리안에게 있었으니까.
“무척이나 잘 지내고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율리안이 바라고 이루는 것들은 이루어가고 있는지요?”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사실 이 세계의 율리안에게는 그렇게 거창한 꿈 같은 건 없었다.
아덴카의 사명은 그가 승격하기 위한 조건이었을 뿐.
율리안이 꿈꾸던 것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인정과 관심 정도였다.
“아들로 인정받았을 때 펑펑 울더군.”
그렇다는 건.
어린 날의 아슬란 또한 그랬다는 뜻이다.
그때의 아슬란은 결국 스스로 가문을 집어삼켰다.
그 수많은 과정 속에서도 칸과 베르사의 인정은 받지 못했다.
“그것이 어린 날, 녀석의 꿈이었다. 너는 어땠지?”
“너무 오랜 옛날이라 기억이 나지 않아요.”
기억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어린 날의 아슬란도 칸과 베르사의 사랑을 갈구했다.
그것은 어린 날의 결핍이었고, 그의 가슴에 가장 깊이 남은 기억이었다.
빈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인정받았고 사랑받았다. 아버지는 내게 아덴카를 맡기며 편안히 눈을 감으셨고, 어머니는 내 앞에서 우셨다.”
“…….”
“네가 해낸 것이다.”
“…….”
빈첸의 말은 아슬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결핍을 자극했다.
결국.
자신이 가문의 인정을 받아낸 것 같았다.
“어차피 의미 없는 일이군요.”
“그러나 네게는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군.”
아슬란은 또 침묵하고 말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충분히 위로받은 느낌이었다.
화제를 돌렸다.
“율리안이 형을 잘 받아들였어요? 정령신을 소환하지 못해 무척 실망해서 난리를 쳤을 텐데요.”
“처음에는 좀 그랬지.”
아슬란은 한동안 빈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빈첸을 향한 그리움인지, 아니면 또 다른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율리안을 향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자신은 만들어가지 못했던 아름다운 결말인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형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는 잘 몰라요. 어마어마하게 강해졌으니 이 자리에 있을 거라는 것만 짐작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아슬란은 그저 파편에 불과했다.
신에 근접했던 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의 아슬란은 진실을 전해주는 것,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악몽은 그보다 더 강할 겁니다.”
“……그렇겠지. 500년 동안 원념을 집어삼켰을 테니까.”
빈첸이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지금 당장 악몽을 벨 수는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다른 세계의 빈첸이 악몽을 없앴을 것이다.
그 세계의 빈첸은 적어도 지금 기준으로 수십 년이 흘렀을 테고, 정령신과 함께 하고 있었을 테니까.
“제 안배는 여기까지예요.”
아슬란이 보아온 ‘동네 형’ 데이븐은 늘 예상을 뛰어넘었었다.
여기까지가 끝이겠지.
더 이상은 못 가겠지.
여기서는 포기하겠지.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데이븐은 한계를 뛰어넘었었다.
“형은 제 생각을 늘 뛰어넘었거든요.”
“…….”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어요.”
“내게 너무 큰 짐을 떠넘기는구나.”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만든 가문을 안배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악몽을 없애기 위한 준비였다니.
“내가 정말로 악몽을 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잘 모르겠어요. 형이 여기까지 오는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저는 형이 적어도 50살은 되었을 줄 알았거든요.”
50년을 보고 안배했는데.
겨우 16년 만에 여기까지 주파했다.
이 또한 예상을 지나치게 뛰어넘었다.
“그만큼 형이 대단하다는 얘기겠지만, 또 반대로 말하면 수련의 기간이 지나치게 짧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빈첸에게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었다.
‘악몽’은 아슬란의 파편을 금세 알아차릴 것이 분명했다.
이 신력으로 이루어진 ‘영역’도 눈치챌 것이다.
“악몽이 기다려 온 이유는…….”
“나를 잡아먹기 위해서겠지.”
최고의 격을 지닌 육체를 삼키기 위하여.
육체가 완성되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이제는 빈첸의 육체가 완성되었으니, 악몽도 빠르게 움직여 이 육체를 탐할 것이다.
“나도 안다. 악몽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것도. 내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도.”
빈첸은 아슬란의 존재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알아차렸다.
이 세계의 ‘이물질’인 그의 존재는 이 세계에 간신히 붙어 있는 중이었다.
영역의 농도도 옅어졌다.
아슬란은 곧 이 세계에서 소멸한다.
마지막을 앞둔 아슬란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나 혼자였다면 악몽을 극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전의 내가 나의 가문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무리 격이 뛰어나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뛰어난 격을 지녔던 데이븐조차 지하 감옥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악몽에게 몸을 빼앗길 거라는 상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다.
“지금은 너무나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500년의 사명을 달성하여 승격한, 내가 아는 한 가장 비상한 녀석도 나와 함께하고 있고.”
아슬란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알던 데이븐(빈첸)은 이런 사람이었다.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초라하지 않던 사람.
그 사람이 지금은 새로운 육체를 얻어 더욱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편히 쉬어라. 네 의지는 내가 잇겠다.”
아슬란이 허리를 굽혔다.
무릎을 접었다.
빈첸을 향해 절을 올렸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서.
“부디, 미래를 부탁합니다.”
* * *
아슬란은 사라졌다.
그러나 ‘신의 영역’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슬란이 사라지자 오히려 더욱 짙어졌다.
“마치 성수가 가득 찬 성배에 빠진 것만 같구나.”
“헤헤.”
노란 머리카락의 소년이 촐랑거리며 뛰어왔다.
율리안이었다.
“육체는 성장하지 않는가 보군.”
“어쩐지 초대 가주님이 지나치게 대단하시더라.”
율리안은 검지 손가락으로 코를 비볐다.
“무예만 익힌 것치고는 너무 똑똑하고 많은 것들을 안배하셨다 했어요.”
“그러니까, 네가 잘났다고 자랑하러 온 것이냐?”
“좀 잘나지 않았어요? 하아, 나란 남자.”
빈첸은 율리안의 자아도취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율리안. 내게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요?”
“지금 악몽과 싸우면 필패야.”
“……형님 입에서 필패라는 말 나오는 거 처음 들어요.”
“시간을 끌 수 있는 방법을 내놔.”
“……예?”
율리안은 팔짱을 꼈다.
“나는 사명을 완수해서 이미 신이 됐고, 이제 인간이 멸망하든 말든 알 바 아닌데요.”
“혹시 신도 죽냐?”
빈첸이 ‘칸’을 들어 올렸다.
율리안이 뒷걸음질 쳤다.
“노, 농담이에요. 헤헤.”
정말로 농담이기는 했다.
그도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을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요?”
“최소 100일.”
“아, 쉽지 않겠는데…….”
율리안은 턱을 매만졌다.
“진짜 100일이면 돼요?”
“그게 최소다.”
구체적으로 뭘 준비하려는지 까지는 묻지 않았다.
혹여 악몽이 엿들을지도 모르니까.
“일단 가이아의 신전으로 가죠. 신관들을 끌어모아서 신성결계를 펼치면 어느 정도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신성결계?”
“네. 악령에 그나마 상성이 제일 좋은 게 신관들의 신성력이니까요. 마침 둘란 신관이 대신관에 등극하기도 했고.”
빈첸이 홀로 6마탑을 무너뜨리고 아덴카의 가주가 되면서 둘란은 더욱 승승장구했다.
“아참, 이 영역 바깥으로는 벌써 한 달이나 흘렀거든요.”
빈첸이 사미온 가에 들어간 이후로 천둥이 치고 폭풍이 일었다.
한참 후, 결국 빈첸이 혼자서 사미온을 멸망시켰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형님과의 관계를 의식한 신전들은 둘란 신관님을 대신관으로 임명하기로 했다고 해요. 8성기사인 멀린 경의 도움도 컸고요.”
“가자.”
빈첸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키아 사미온의 시신을 가리켰다.
“시신은 네가 들고.”
“예……? 나 신인데요? 안 느껴져요? 이 풍만한 신성력이라든가,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을 담긴 언령의 힘이라든가…….”
“빨리 업고 따라와.”
“젠장!”
신으로 승격했지만 율리안의 신세는 예전과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율리안에게도 특별한 힘이 많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발키아의 몸이 사라졌다.
이공간에 보관했다.
‘이것마저 뭐라고 하진 않겠지?’
은근슬쩍 빈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빈첸도 그것까지는 뭐라 하지 않았다.
“혀, 형님 같이 좀 가요!”
뭔 놈의 인간이 저렇게 빨라.
신력을 사용해서 순간이동을 해도 못 쫓아가겠네.
율리안은 투덜거리며 뒤를 쫓았다.
* * *
세계가 뒤로 쭉쭉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가이아 신전에 도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빈첸에게 있어 ‘물리적인 거리’는 그다지 큰 장애물이 아니었다.
깊은 밤.
둘란의 성기사단장인 멀린이 검을 꺼내 들었다.
천장을 향해 검기를 방출했다.
“누구냐?”
순식간에 검압을 쏘아냈으나 타격감이 전혀 없었다.
‘빗나갔다?’
누군가가 침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멀린은 직감했다.
저자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즉사했겠구나.
“설마…….”
“스승님. 접니다.”
빈첸이었다.
멀린은 허- 하고 빈첸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빈첸 사이에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빈첸 경의 기척을 제대로 읽을 수조차 없군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저도 그게 편합니다.”
“…….”
“하나 지금은 말투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단 스승님 편한 대로 하십시오.”
다음 날.
빈첸은 비밀리에 둘란과 만났다.
그간 있었던 일을 요약하여 털어놓았다.
“……하여 시간이 필요합니다.”
율리안이 끼어들었다.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내가 도울 것이다, 인간.”
별로 위엄있는 목소리와 태도는 아니었으나 둘란은 율리안에게서 어마어마한 신력을 느꼈다.
성왕의 힘을 계승한 그는 율리안에게서 일종의 반가움마저 느낄 수 있었다.
성왕은 아슬란의 동료였고, 둘란은 율리안에게서 아슬란과 비슷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친밀감이 피어올랐다.
율리안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제힘이 닿는 데까지 악몽을 막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빈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전의 중심부.
상급 신관들만이 출입 가능한 대회의장에 자리를 잡았다.
“부탁합니다.”
1초가 귀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는 모든 짐을 치운 ‘대회의장’의 정중앙에 앉아 눈을 감았다.
마력회로를 형상화하고 새로운 세계를 펼쳤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꿈꿔왔던 힘이다.’
초월검격으로 발키아를 베었다.
그리고 발키아를 베어낸 칸은 발키아의 것들을 가져왔다.
마치.
예전에 뇌력거인의 힘을 말론으로부터 가져왔던 때처럼.
‘그때는 율리안의 도움이 절실했었지.’
뇌력거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 누구보다 이 가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카진의 가호.
검신 케샤크의 가호였으니까.
‘원래대로라면 100일 만에 검신의 힘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원래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얘기가 조금 달라졌다.
정형화된 이 시대의 무학은, 옛 무학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빨랐으니까.
케샤크의 가호로부터 ‘검신’ 특성을 발현시키는 방법은 이미 공식처럼 정해져 있었다.
그의 심장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9개의 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검신의 힘을 개방시킨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