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68화
율리안은 찔끔 놀랐다.
“저는…….”
저도 어머니 아들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피도 섞이지 않았고, 사실 모정(母情)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율리안은 베르사를 존경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존경하며 두려워하면 그것은 곧 경외였다.
경외의 대상에게 자신 또한 당신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싶었다.
“빈첸 형님과 무척 친한 동생이에요.”
“이름은?”
“율리안이에요.”
베르사는 율리안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우리 전에도 만난 적이 있지 않느냐?”
“아뇨. 처음 봤어요.”
그렇게 말을 하는 율리안의 눈이 붉어졌다.
아들이라고 밝히지 못하는 것이, 왠지 서러웠다.
“너는 왜 우느냐?”
“그냥, 마음이 아파서요.”
“그러니까, 왜?”
“어머니가 우는 것을 처음 봤어요.”
어떤 의미로,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베르사는 ‘어머니’라는 말에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혈의 여인답게 제자리에 굳건히 섰다.
“고맙구나, 빈첸.”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율리안. 너희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빈첸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빈첸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이 검에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칸이라 부르라 하셨습니다.”
“그분다운 선택이구나.”
베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이 되어서라도, 진실을 좇겠다는 칸의 의지가 담긴 작명이었다.
“내 남편을 죽인 자가 누구냐?”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더 확실히 물었다.
빈첸의 입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다.
“카곤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카곤은 아닙니다. 아마도 몸을 빌린 것 같습니다.”
“카곤의 몸에 빙의라도 했다는 것이냐?”
“그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놈은 때가 다가왔다고 했습니다.”
빈첸이 율리안 쪽을 바라보았다.
다음 말은 율리안에게 넘겼다.
율리안은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 온 악령인 것 같아요.”
“오랫동안 존재해 온 악령?”
“네. 어쩌면…… 현존하는 악령들 중 가장 오래된 악령일지도 몰라요. 그도 아니면 악령들의 왕쯤 된다거나.”
베르사는 순간 대악마 데이븐을 떠올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
대악마 데이븐은 영웅왕 카진과 초대가주 아슬란을 비롯한 영웅들에 의하여 죽었다.
‘아니. 죽지 않았어.’
너무나 당연히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죽지 않았다.
이것은 공식적인 기록이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봉인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대악마 데이븐이 실존하고 있단 말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최근에는 카곤의 몸에 기생하여 살아왔고, 이제는 더 먹음직스러운 육체를 찾았겠지요.”
“더 먹음직스러운 육체?”
“카곤과 비슷한 신체. 지금은 역사에서 잊혀진 [천골]이요.”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천골’이 세상에서 지워져야만 했는지.
왜 세상 사람들이 ‘천골’에 대해 알지 못하는지.
“그 악령에게는 천골이 필요해요. 그래서 정보를 독점했을 거예요. 그 놈에게는 인간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율리안은 마리아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돕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그 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아요. 누군가 기억하기 시작하면, 누군가 기록하기 시작하면, 그 힘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 같아요.”
처음 ‘악몽’을 언급했을 때 그러했다.
-악몽(惡夢)의 1급 책사, 에드몬드다.
빈틈은 별 것 아닌 인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햇볕 부랑자 수용소의 소장인 에드몬드부터였다.
지금 기준에서 생각해 보자면, 에드몬드는 그야말로 애송이에 불과했다.
악몽 입장에서는 조연이나 다름없는 인물.
그렇기에 ‘악몽’을 언급할 수 있었다.
“에드몬드로부터 미세한 균열이 시작되었고, 카곤과의 전투에서 큰 힘을 소모했기에 그 균열이 커졌어요. 이후 마리아가 남다른 격으로 그 날을 기억하는 데 성공했고, 세상을 지배하는 인위적인 힘이 어느 정도 소멸된 것 같아요.”
“…….”
“우리는 악몽을 기억하는 데 성공했고, 악몽은 더욱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놈은 수백 년간 암약했을 정도로 은밀하고 조심스런 놈이에요. 그렇다면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겠죠.”
“…….”
“이제는 만천하에 악몽이 까발려졌으니 무언가 큰 불이익이 가해졌을 거예요. 그러한 상황에서 놈이 선택할 수 있는 거라곤…….”
베르사와 율리안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빈첸의 몸을 가지는 것.”
“형님의 몸을 가지는 것.”
빈첸도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새삼스럽게도, 율리안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 뛰어난 견식을 가졌구나, 아들아.”
“……네?”
율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베르사는 율리안에게서 시선을 뗐다.
“빈첸. 하나만 부탁을 해도 되겠느냐?”
“말씀하십시오.”
“꼭 들어주겠다 약속해야 한다.”
그 모습은 약간 애처롭기까지 했다.
“아덴카의 두 번째 왕 같은 모습은 아니군요.”
“…….”
“그러나 지극히 어머니다운 모습입니다.”
“내가 무엇을 부탁할지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첫째 형님에 관한 것 아니겠습니까?”
“…….”
빈첸이 한 가지를 약속했다.
“제게 아무리 악한 짓을 하더라도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습니다.”
* * *
2공녀 데이아는 압도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해 왔다.
차기 가주로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다.
그녀가 차기 가주로 일찍이 선정되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1공자 카르멘 때문이었다.
“카르멘 공자님께서 가만히 있을까?”
“당연히 아니겠지. 소문에 의하면 ‘해적 군도’에서 빠져나와 가문으로 복귀 중이래.”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2공녀에 비하면 검술 재능은 부족하지만 그 외에 많은 것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데이아와 달리 권모술수를 부릴 줄 알았고, 가문들 사이의 정치에도 능했다.
검술실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다방면에서 뛰어난 그가 아덴카를 이어야 한다는 장로들도 꽤 많았다.
카르멘은 인류가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지역 중 하나인 ‘해적 군도’에서 수련을 하다가 가문으로 복귀했다.
“장로님들은 그간 뭘 하고 있었습니까?”
그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바로 장로원이었다.
4대 장로들은 모두 죽었지만, 여전히 아덴카는 수십 명의 장로가 건재했다.
그중 카르멘을 지지하던 장로들의 숫자는 무려 18명에 달했다.
“너무 많은 일이 폭풍처럼 지나간 지라…….”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대신하여 내 지지기반이 되어줄 여러분들에게 실망한 것도 사실입니다.”
겉으로는 정중히 말했으나 속으로는 달리 말했다.
‘쓸모없고 무능한 늙은이들 같으니라고.’
데이아 같은 경쟁자가 없었더라면, 이런 늙은이들과 손을 잡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는 빈첸을 가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
장로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은 빈첸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빈첸에게서는 칸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왜 아무 말도 없습니까? 장로님들은 벌써 포기라도 한 것입니까?”
그가 본 장로들은 이미 패배자였다.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손만 놓고 있는 패배자들.
그는 감추고 있던 속마음을 대놓고 드러냈다.
“내가 가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당신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신입 장로 피다넬입니다. 어릴 때 뵌 이후로 처음 인사드리는군요.”
카르멘은 피다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까?”
“이미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 가주께서는 가주에 걸맞은 무위를 직접 증명하셨습니다.”
“무슨 무위요?”
“가주께서는 홀로 6마탑을 굴복시켰습니다.”
“피다넬 장로는 빈첸이 정말로 홀로 6마탑을 굴복시켰다 생각합니까?”
상식적으로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걸 모르는 겁니까, 외면하는 겁니까?”
“…….”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하시고, 숨어있던 빈첸이 마무리만 했다고 설명하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빈첸은 멀쩡히 돌아올 수 있단 말입니까?”
카르멘은 직감했다.
장로들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 날을 기록한 자는 애초부터 빈첸과 깊은 친분을 지닌 수석기자라 들었습니다. 그 기록을 우리가 어떻게 신뢰할 수 있습니까?”
카르멘은 피다넬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나댈 때를 알고 나대란 말이다, 신입 장로.”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살기마저 깔려 있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활짝 웃었다.
“신입 장로. 당신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피다넬입니다.”
“그 이름, 기억하죠.”
다음 날.
카르멘은 빈첸이 가주가 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6마탑의 굴종과 칸의 죽음 이후로 정세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소리에게 일인자의 자리를 내어준 센트럴 소식지는 이에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제1공자 카르멘, 현 아덴카의 가주에게 도전장을 내밀다.]
마리아에게 최고의 기자라는 직함을 빼앗긴 센트럴의 론도가 단독으로 인터뷰를 잡았다.
“아덴카는 대대로 가장 강력한 무인이 다스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카르멘 공자는 빈첸 공자와 검투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일부러 ‘빈첸 경’이 아니라 ‘빈첸 공자’라고 언급했다.
카르멘은 빈첸과 일대일 결투를 벌일 것이라 공표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소식에 열광했다.
“1공자와 7공자가 격돌한다고?”
“사실 7공자는 너무 신격화 된 경향이 없잖아 있었지.”
많은 사람들이 빈첸 혼자서 6마탑을 무너뜨렸다는 말을 믿지는 못했다.
눈으로 직접 보아도 믿기 힘든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빈첸에게 공식적으로 항복했던, 6마탑의 마법 사단장 알베르토에게도 많은 소식지 기자들이 찾았다.
알베르토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다.
깊은 밤.
그는 창밖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카르멘 공자. 부디 치졸한 짓만 벌이지 마시오.’
알베르토는 카르멘과도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카르멘이 더러운 짓을 하지 않기를 바랐다.
‘세상 사람들은 빈첸 경의 무위를 믿지 못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건 알베르토 본인도 이해하는 바였다.
‘그러나 빈첸 경의 무위는…….’
그 날을 떠올렸다.
거대한 해일에 잡아먹히는 것만 같았던, 위대한 자연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던 그때의 무력감.
그때를 떠올리니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오히려 과소평가되어 있다.’
소문이 너무 말도 안 돼서.
그래서 오히려 축소되었다.
소문은 빈첸의 무위를 조금도 담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군.’
그는 카르멘에게 서신을 보냈다.
정정당당한 검투를 응원한다는 서신이었다.
서신을 받아든 카르멘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정정당당한 검투를 응원한다라.”
그 말을 달리하자면, 비겁한 술수를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카르멘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그는 서신을 북북 찢어버렸다.
“한 번 겁먹은 사자는 더 이상 사자가 아니다.”
알베르토와의 관계는 여기서 끝내도 좋다고 판단했다.
“빈첸 그 어리석은 놈이 정말로 검투를 받아들일 줄이야.”
빈첸 입장에서는 받아들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이겨봐야 본전이고, 지면 망신이기 때문이다.
“근데 말이야.”
카르멘이 씨익 웃었다.
그 앞에는 손발이 꽁꽁 묶인 여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봤자 시녀 주제에.
저 당돌한 눈빛이 거슬렸다.
카르멘은 세리 앞에 앉았다.
세리의 얼굴이 온전치 않았다.
세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짓을 한다고 해서 가주님의 심기가 흐트러질 것 같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