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64화
율리안이 버럭 소리 질렀다.
-뭐요? 친구? 지금 친구라 했어요?
그는 인정할 수 없는 듯했다.
-친구 아니고 선생님이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친구요?
율리안은 화가 난 것 같았다.
빈첸은 그러한 율리안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차피 네 진심이 다 느껴지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
율리안은 ‘친구’라는 말에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
그 풍만한 마음이 절절히 전해지고 있었다.
-저 정도면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죠!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신력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고 율리안과 한가로이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도 고맙기는 했다.
율리안이 이렇게 소리 지르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유는, 빈첸 자신이 기절하지 않도록 돕기 위함이었으니까.
의식의 끈을 놓지 않도록 고함을 쳐대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요! 선생님! 알았어요?
그 사이,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네 예측이 맞구나.”
누구보다 단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아보다 더욱 묵직한 무게감이었다.
희미한 빛줄기 사이로 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애검 ‘백익’이 스스로 발광하고 있었다.
“호오.”
여지껏 맨손을 고수하던 카곤이 시꺼먼 묵검(墨劍)을 꺼내 들었다.
빈첸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아덴카의 가주께서 직접 행차하실 줄이야.”
칸은 카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처박힌 아들을 바라보았다.
카곤에게 등 뒤를 내주었으나, 칸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빈첸은 그러한 칸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제왕.’
제왕이라는 말보다, 지금의 칸을 잘 서술해 주는 말은 없었다.
하이에나에게 등을 보인 숫사자처럼, 칸의 시야에 카곤은 없었다.
“많이 늦으셨군요.”
“네가 부탁하지 않았더냐.”
칸은 아공간을 열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꺼내 빈첸 옆에 내려두었다.
“일어나서 쥐어라.”
빈첸 옆에 내려놓은 것은 ‘검’이었다.
칸이 가진 ‘백익’과 비슷한 형태의 백검이었다.
다만,
백익보다 조금 더 날렵했고 푸르스름한 기운을 지닌 것이 조금 독특했다.
“한센이 전해 달라더군.”
“……아.”
빈첸은 힘겹게 눈동자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백색 기운을 내뿜고 있는 새로운 검이 보였다.
“생각보다 빨리 완성되었군요.”
“네 덕분이라며 고마워하던데. 용골을 통째로 구해주었다지.”
“……예.”
그사이, 묵검을 꺼내 든 카곤이 실실 웃었다.
“언제까지 날 기다리게 할 거야?”
“내가 널 기다리게 했던가?”
칸은 카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첫 등장부터 지금까지, 카곤 같은 건 염두에도 두지 않는 듯한 모양새였다.
챙!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빈첸은 허- 하고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안 보였다.’
소리는 들렸으되, 서로의 검격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칸과 카곤의 공방은 빨랐다.
뒤이어 검풍이 일었다.
그 순간 빈첸은 볼 수 있었다.
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이것이 네 영역인가?”
“영역까지 개척했단 말이야?”
어두웠던 공간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먹물에 하얀색 잉크를 떨어뜨린 것 같았다.
백색 그림자가 흑색 공간을 조금씩 잠식하기 시작했다.
빈첸은 눈을 찡그렸다.
‘눈이 부시다.’
강대한 빛.
빛이 어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펼치는 새로운 공간.’
마법이 아니었다.
빈첸은 직감할 수 있었다.
‘기백으로 펼치는 자신의 세계.’
지금 아버지는 자신의 소우주(小宇宙)를 이 공간에 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서야 모든 것들이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카곤 또한 아버지와 같은 영역을 전개하고 있던 것이다.’
칸이 말했다.
“진실을 좇는 자가 빈첸 너 혼자는 아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아덴카’의 사명이다.
“그러나 가장 근접한 자가 네가 될 것 같구나.”
“…….”
“보아라. 이것이 이능영역이다.”
빈첸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카곤이 일부러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쉴 새 없이 아버지의 빈틈을 찾고 있었다.
아주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면, 순식간에 틈을 파고들 것이다.
“좋은 배움이 될 것이다.”
“배우겠습니다.”
이윽고 백색의 공간이 흑색의 공간보다 더 넓어졌다.
칸의 영역이 카곤의 영역을 집어삼켰다.
이내,
칸의 모습이 사라졌다.
카곤의 모습 또한 사라졌다.
챙!
검과 검이 부딪쳐 요란한 검명이 일고.
사아아-!
뒤이어 막대한 검압을 지닌 검풍이 불어닥쳤다.
공간과 공간이 맞부딪쳐, 흑색과 백색이 뒤섞였다.
영역과 영역이 맞닿아 끊임없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현재의 내 수준으로는 읽어낼 수조차 없다.’
‘이능 영역’이 정확히 무엇인지.
영역과 영역이 부딪치며 오갈 때에, 적어도 수십 번 이상의 공방이 이어졌다.
‘단순히 물리의 영역이 아니야.’
검과 검이 부딪치는 것은 물리의 영역이다.
철과 철이 부딪친다.
그러나 영역과 영역이 부딪치는 것은 우주와 우주가 부딪치는 개념이었다.
어렴풋이,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다.
‘무인의 격과 기백. 무인이 지닌 모든 존재가 충돌하여 상대의 존재를 갉아먹는다.’
그리고 현 아덴카 가주 칸의 격이, 악몽의 실체에 근접했으리라 짐작되는 카곤의 격보다 높았다.
카곤의 공간은 어느새 거의 다 사라졌고 카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화되었다.
‘놈의 영역이 모두 파괴됐다.’
다시 말해,
이 공간은 칸이 만들어낸 소우주가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이능 영역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어.’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칸의 승리가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아니야.’
카곤에게서 자꾸만 카진이 보인다.
카진의 습관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정말로 당황했을 때에는 왼발의 각도가 틀어진다.’
그리고 왼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지금의 카곤에게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완전히 밀리고 있으나, 빈첸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왜요? 또 육감?
‘그래.’
율리안은 빈첸의 육감을 더 이상 비웃지 않았다.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걸 생각해 볼게요. 형님은 조금만 더 관찰해 줘요.
빈첸이 표현하기를 그저 감이라고 표현했을 뿐, 육감은 결코 단순한 ‘감’이 아니었다.
빈첸이 말하는 ‘육감’은 아주 오랜시간 쌓아온 직관과 경험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그 직관과 경험에는 절실한 관찰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빈첸의 ‘육감’은 오랜 관찰 끝에 얻어낸 예측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했다.
-저놈이 지금 여유를 부리고 있다고 보는 거죠?
‘잘 모르겠다. 왠지 그런 기분이 든다.’
그때.
빈첸을 억압하던 ‘이능 영역’이 모두 사라졌다.
빈첸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이게 끝이 아냐. 빨리 회복해야 한다.’
적어도 검을 들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
마력자전을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 영감님이, 미쳤어요?’라며 길길이 날뛰었을 율리안은 침묵했다.
칸이 펼친 소우주.
이 소우주는 율리안이 느끼기에도 안전했다.
아무리 예리한 칼날과 파괴적인 마법도, 이 공간을 뚫고 빈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이 공간을 지배하는 자가 칸이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냐?’
-세 시간 정도요.
여전히 결판은 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칸이 압도하고 있기는 했다.
카곤의 옷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가 들고 있는 묵검(墨劍) 또한 이가 다 나가 있었다.
그에 반해 칸의 백익은 여전히 백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백익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백광이 스며들었고, 공간 전체에가 그 빛을 머금고 있었다.
최소 수백만 번 이상의 검격이 오갔다는 뜻이었다.
-형님. 검 손잡이에 쪽지가 하나 달려 있는데요.
빈첸은 몸을 일으켰다.
신관의 도움 없이 완전 회복은 어렵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칸이 가져온 검을 손에 쥐었다.
두근!
심장이 쿵쾅거렸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오래전부터 다뤄온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 손잡이에 이름을 안 새기셨군.’
힐트에 이름을 새겨달라 그렇게 말을 했건만.
한센은 빈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빈첸은 쪽지를 열어 보았다.
쪽지에는 별 내용 없었다.
[네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세상에서 제일가는 대장장이 한센 님께서.]
대신 뒤쪽에 추신이 달려 있었다.
[P.S 이 검의 이름을 알려줘라. 그 후에 내 이름을 새겨주마.]
다시 말해,
일단은 살아 돌아와서 이름을 말해주라는 소리였다.
두근!
또다시 검에서 심장박동 소리가 들렸다.
그때.
카곤이 깔깔대며 웃었다.
“정말이지, 엄청나군.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어떻게 한 명이 이렇게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칸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나는 슬슬 호흡이 가빠오는데.’
막기에 급급했던 카곤은 여전히 호흡이 정상이었다.
자신은 지쳐 가는데, 카곤은 지치지 않았다.
빈첸이 외쳤다.
“아버지. 이능 영역에 샛길이 있는 모양입니다.”
“샛길?”
이능영역을 완전히 내어준 것.
아니.
내어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이것은 카곤의 계략이었다.
“예. 눈에 보이지 않는 기묘한 마나흐름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
스승 네디아와 함께 완성한 ‘이능검격’을 익힌 자들에게만 보이는 특수한 길이 존재했다.
“그 흐름을 통해 외부로부터 계속해서 힘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너무 교묘하게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흑마법.”
“맞습니다.”
‘악몽’이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정황들은 많았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에 증명되었다.
카곤이 피식 웃었다.
“와, 이것까지 읽었어? 정말로 제대로 된 이능검격을 펼칠 수 있나 보군.”
“…….”
순간,
카곤의 등 뒤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대기 시작했다.
“아쉽게 됐어. 방심한 틈에 최후의 일격을 가해 칸의 몸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말이야.”
순식간에 검은 영역이 확장되었다.
칸이 펼쳐낸 백색 공간이 검은 영역에 반대로 잡아먹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칸은 당황하지 않았다.
카곤에게 접근하여 검을 휘둘렀다.
가볍게 보이는 그 동작들 하나하나가 아덴카 각 검식들의 대인 결전기였다.
빈첸도 저런 건 처음 봤다.
‘심상이론을 통해 극한에 이른 무인은 저런 것도 가능하구나.’
심상이 없는 자들은 저런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
심상 없이 저런 기술을 연달아 사용할 수 없을뿐더러, 사용한다고 해도 심장이 터지고 말것이다.
그러나 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인 결전기에 버금가는 강대한 기술을 쉴 새 없이 토해내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보았다.
‘심상이론은 극한의 깨달음을 방해하지만, 일단 벽을 넘어서고 나면 과거의 무인들이 닿지 못했던 영역까지 이를 수 있다.’
결국 ‘심상 없이’ 시작하는 것이 무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극의에 달한 이후 ‘심상을 활용’하는 것은 무예의 효용성을 극대화시켰다.
칸과 카곤의 결투 자체가 빈첸에게는 깨달음이었다.
‘아버지?’
아주 잠깐이지만 칸의 기세가 바뀌었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잘 보아라.”
칸이 검을 수평으로 들어 올렸다.
머리 위로 들어 올린 검은 지면과 수평을 이루었다.
“이것은 아덴카의 최후 결전기이며.”
아덴카에 최후결전기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처음 알았다.
백익뿐만 아니라, 칸의 몸 전체에서 백광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태양빛처럼 뿜어져 나왔다.
“초대 가주에서 2대 가주로, 2대 가주에서 3대 가주로, 그리고 가주에서 가주로 전승되어 내게 전해진 검이다. 다시 기억해라. 이 검이 아덴카의 최후 결전기이다.”
최후 결전기의 이름이 조금 이상했다.
“동귀어진(同歸於盡).”
백광이 쏘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