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63화
빈첸이 어깨를 으쓱하고서 대답했다.
“네가 펼친 이 이능의 공간 말이야.”
“…….”
“뭔가를 위한 초입단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헬리오스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에야 눈을 뜨고 말했다.
“그런 건가. 내 안에 무언가를 심어놓았겠군.”
“별로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인데.”
“그래.”
헬리오스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허상?’
가짜였다.
너무나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빈첸조차도 진짜로 믿을 정도였다.
-형님. 위요!
‘알아.’
빈첸이 홍련을 들어 올렸다.
헬리오스의 주먹을 막아냈다.
홍련으로 파괴력을 흘리면서, 오른손으로 헬리오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허상과 블링크를 사용한 공격이 제법 매섭기는 하다만.”
헬리오스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콜록, 콜록!”
빈첸은 캑캑대는 헬리오스의 목젖에 홍련을 겨누었다.
“근본이 없는 무학은 한낱 잡기술에 불과하다.”
“아까까지는 날 봐준 것이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완전히 봐줬다고 보기에는 애매했다.
여러 정보들을 빼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기는 했지만 무투계열 마법사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것도 맞았다.
헬리오스는 자신의 손으로 홍련의 검날을 살짝 밀쳐냈다.
“악몽이 내게 무슨 짓을 해놓았는지는 사실 궁금하지 않아. 어차피 나는 죽을 테니까. 내가 정말 궁금한 건, 어떻게 나를 이렇게 압도할 수 있는 거냐?”
그의 모든 마법은 빈첸의 신체능력을 뛰어넘었다.
정교하게 계산했다.
그의 계산은 완벽했고, 계산대로라면 빈첸을 압도해야만 했다.
“요즘 시대의 무인들은 본질을 잊었거든.”
“본질?”
“기본기가 없는 기술은 밑천이 금방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물며, 그 무인들의 움직임을 흉내 낸 마법으로 무인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헬리오스는 허허- 웃고 말았다.
“내 계산에 죽음은 있었지만 패배는 없었거늘.”
헬리오스는 눈을 감았다.
더 저항할 수도 있었지만 더 이상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빈첸과 자신 사이에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부터, 그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죽여라.”
“유언은 그게 다인가?”
“나는 6마탑의 마탑주였다.”
그러니 나를 존중하여 명예롭게 죽여 달라는 의미였고,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빈첸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4대 장로가 죽으면서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
가능하다면 정보를 넘겨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헬리오스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는 홍련의 검날을 똑바로 쳐다보기만 했다.
-그냥 죽이게요? 4대 장로 때처럼 악몽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불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마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거다.’
4대 장로와는 상황이 달랐다.
헬리오스가 목숨을 기꺼이 내던진 이유는 그의 자식들 때문이다.
‘괜히 허튼짓을 하다가 자식들에게도 피에 새겨진 저주가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야.’
자식들을 위해서.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거다.
‘율리안. 마지막으로 확인 한 번만 하자.’
-뭘요?
‘악몽은 오늘 실체를 드러낼까, 아니면 더 깊숙이 숨을까?’
-그걸 전부 다 알면 제가 진작에 상급신이 됐죠.
‘정답이 아니어도 돼. 네 생각을 말해봐라.’
-으음.
‘몇 대 몇?’
-6 대 4요. 6이 실체를 드러내는 거고, 4가 숨는 거요.
‘그래.’
빈첸은 홍련을 들어 올렸다.
마탑주의 마지막 길은 최대한 편하게 보내주기로 했다.
“네 자식들은 저주에서 벗어나길 빌겠다.”
* * *
헬리오스.
그를 베자 피가 나지 않았다.
그의 시신이 저절로 불타 사라지기 시작했다.
-역시 헬리오스의 목숨이 매개체였네요.
외부와 단절되어 있던 이 공간이 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헬리오스가 펼친 공간을 잡아먹으면서, 새로운 공간이 태어났다.’
분명 6마탑을 향해 걸어왔는데.
이제는 6마탑이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공간이동 술식까지도 적용된 것 같았다.
‘일단 마나의 흐름 자체는 이상 없는 것 같고.’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기감을 퍼뜨려 주변을 살폈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
빈첸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쪽이다.”
푹!
빈첸의 옆구리에 날붙이가 날아들었다.
‘언제?’
옆구리 쪽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황급히 마나를 일으켜 상대의 마나에 저항했다.
-혀, 형님, 괜찮아요?
빈첸은 대답하지 못했다.
밀려드는 고통에 저항하기도 벅찼다.
만약 처음 당하는 고통이었다면 의식의 끈을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익숙한 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이걸 버텨?”
빈첸이 오른손으로 옆구리를 움켜쥐고 홍련을 휘둘렀다.
홍련은 속절없이 허공을 갈랐다.
“내부가 모조리 진탕됐을 텐데. 용케도 멀쩡히 서 있네.”
빈첸은 마나를 움직여 지혈했다.
지혈조차 쉽지 않았다.
이전에 당해본 경험이 없었다면 이대로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강력한 기운이 빈첸의 몸을 파괴하고 있었다.
‘적황미력.’
적황미력이 틀림없었다.
빈첸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너는…… 카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가까이 다가왔다.
카곤이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 앞에 의자 하나가 생성되었다.
카곤은 실실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글쎄. 내가 누굴까?”
“…….”
빈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 내 정신 좀 봐라. 자. 이거 먹어.”
카곤이 빈첸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작은 유리병이었다.
“최상급 포션이야.”
빈첸이 율리안에게 물었다.
‘마셔도 되는 거냐?’
포션은 기본적으로 신성력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지고, 가품이라면 신력을 지닌 율리안이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제가 보기엔 마셔도 되긴 하는데요. 쟤가 왜…….
빈첸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적황미력이 온몸을 파괴하고 있었다.
이걸 멈추지 못하면 어차피 죽는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고, 결국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포션을 마시는 것뿐이었다.
“진짜 마시네.”
카곤은 재미있다는 듯 킬킬대며 웃었다.
빈첸의 회복을 기다려주겠다는 듯, 턱을 괴고 앉아서 빈첸을 구경했다.
빈첸은 마력자전을 시키면서 회복에 집중했다.
다행히 카곤이 준 포션은 진품이었다.
“네가 악몽의 실체냐?”
“글쎄에.”
“왜 모습을 드러낸 거지?”
“준비가 거의 다 돼서?”
카곤의 눈이 가늘어졌다.
빈첸은 그러한 카곤에서 누군가를 보았다.
저 눈동자와 눈빛.
기세.
심지어 호흡 소리까지.
‘놈이 지나치게 익숙하다.’
단순히 카곤과 몇 번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예전부터 이상했었어.’
빈첸은 예전 셀비라가 전해주었던 영상석의 내용을 떠올려보았다.
[사미온에게 결투를 신청한 값이다.]
영상 속 카곤은, 500년 전 카진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작은 습관.
주로 쓰는 기술.
모든 것이 카진과 같았었다.
“영웅왕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흐음, 설마 설마 했는데, 영웅왕을 유추했단 말이야? 너야말로 도대체 정체가 뭐냐?”
“…….”
빈첸과 카곤은 잠시 침묵했다.
카곤에게서 계속 카진이 겹쳐 보였다.
카곤을 바라보는 빈첸의 눈에 분노가 깃들기 시작했다.
“뭐냐, 그 눈빛은? 난 네 생명의 은인이라고?”
“뻔뻔하군.”
“맞잖아. 지금 네가 살아 있는 것도 내가 허락했기 때문에 가능한 거잖아. 안 그래?”
기회를 엿보던 빈첸이 검을 휘둘렀다.
아덴카 정검 제1식.
뇌력 연환.
반월 베기.
한층 성숙해진 빈첸의 검이 뇌기를 머금었다.
좌에서 우로.
허공을 베었다.
그의 검에는 가공할 만한 파괴력이 담겨 있었으나 카곤은 피하지 않았다.
“성격 참 급하네.”
카곤은 그 자리에 앉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빈첸의 검은 카곤을 덮은 검막을 뚫지 못했다.
‘검을 손에 쥐지도 않은 채 검막을 펼쳤다.’
가공할 만한 경지였다.
빈첸의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검을 회수한 뒤, 검을 내질렀다.
아덴카 정검 제2식.
깊게 찌르기.
‘베는 것이 불가하면 찌르면 된다.’
찌른다.
한 점에 마나를 집중하여 깊게 찔러낸다.
무학의 본질을 이해한 무인의 찌르기는, 강철도 뚫어낸다.
‘컥.’
어마어마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어깨가 박살 나는 느낌이었다.
강철조차 뚫어내는 빈첸의 검이었건만, 카곤의 마나막을 뚫어내지 못했다.
순간,
율리안이 식겁했다.
-혀, 형님!
홍련.
칸과 빈첸의 시작을 알렸던 붉은 검의 검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카곤이 휘파람을 불었다.
“마음을 곱게 안 쓰니까 그렇게 되지.”
홍련이 수십 조각으로 부서졌다.
카곤은 조각 중 하나를 집어 들더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라? 그거 용골로 강화된 거였어? 어쩐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더라.”
“…….”
빈첸은 간만에 무력감을 느꼈다.
스스로 초라해지는 이 느낌.
잊고 있었던 이 느낌이 스멀스멀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사미온의 지하감옥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어가던 그때의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뭐, 이렇게 진행되는 것이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이지 않겠어?”
“……무슨 소리냐?”
“영웅들의 모험담을 보면 꼭 최종보스는 나중에 등장하잖아.”
그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킥킥댔다.
이 상황이 무척이나 즐거운 듯했다.
“최종보스들은 영웅들에게 성장할 시간을 충분히 주더라고.”
“…….”
“근데 그건 그냥 얼빠진 영웅담이고.”
카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실에서는 말이야. 영웅이 성장하기 전에 죽여 버리는 게 효율성 측면에서 훨씬 낫지. 안 그래?”
빈첸은 카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묘하게,
계속해서 거슬렸다.
‘카진과 너무나 닮았는데…… 그게 끝이 아니야.’
카진은 분명 익숙한 기운이다.
그토록 넘고 싶어 했었고, 카진 본인보다 카진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람이 데이븐이었으니까.
그런데 카진의 모습 너머에, 무언가 다른 것이 분명히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카진의 몸이 사라졌다.
빈첸은 그의 움직임을 읽지 못했다.
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빈첸의 몸이 붕 떴다.
“적을 앞에 두고 그렇게 방심하면 써?”
헬리오스의 블링크는 우스운 수준이었다.
카곤의 움직임은 블링크보다 더 빨랐고 은밀했다.
카곤의 몸이 허공에 떴다.
쾅!
카곤이 깍지를 끼고서, 허공에 뜬 빈첸의 몸을 내리쳤다.
빈첸의 몸이 땅을 향해 떨어졌다.
쿠구구궁!
빈첸의 몸이 땅에 부딪쳤다.
지축이 흔들렸다.
빈첸은 그 모든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젠장……!’
육체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전해지면서,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율리안과의 연결도 일시적으로 끊어진 것 같았다.
‘지금의 내게는 너무 압도적인 상대다.’
단 두 번의 공격에 의해,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빈첸의 몸이 땅속에 묻히다시피 했다.
어지러웠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면 너무 싱거운데. 굳이 살려준 보람이 없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빈첸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울컥!
피를 토해냈다.
“어차피 죽일 거였으면 나를 그냥 죽였을 텐데.”
일부러 포션을 주고 회복시켜주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었다.
율리안이 있다면 조금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쨌든 내게 볼일이 있다는 건 알겠다.”
“그냥, 흥밋거리였어. 근데 이제 재미없네.”
카곤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빈첸이 피식 웃었다.
몸은 망가졌지만,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심장에 검이 꽂혔을 때에도 버텨냈던 것처럼.
“내 친구가 그랬거든. 설령 악몽이 나타나더라도 나를 바로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죽이려고 했으면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이 많았다고 말이야.”
“그래서 이제 죽여주려고.”
카곤이 쪼그리고 앉았다.
그의 손에 마나가 깃들었다.
“그것이 내게는 기회가 될 거라고 가르쳐주더군.”
순간,
어두운 공간에 빛이 새어 들어왔다.
빈첸이 울컥! 피를 토해내고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이야.”
카곤은 미끼를 문 것이었다.
강대한 존재감이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