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62화
원래는 보이지 않던 것들도 어느 순간 인지하기 시작하면 보이는 순간이 온다.
빈첸에게 지금이 그랬다.
“피에 새겨진 운명…… 뭐 그런 거.”
“……뭐?”
“아니. 넌 아무것도 말하지 마.”
어떤 금제를 어떻게 걸어놓았을지 모를 일이다.
4대 장로가 모두 한 번에 죽도록 설계해놓았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반응을 보니까 비슷한 것 같고.”
악몽.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6마탑의 탑주마저도 저렇게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너도 날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겠지?”
“…….”
헬리오스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빈첸의 모습에서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겉모습도.
말투도.
행동양식도.
느껴지는 기세도.
모든 것이 다 다른데, 이상하게 ‘소년’이 겹쳐 보였다.
헬리오스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격이다.’
존재 자체가 가지는 격.
적어도 ‘격’의 개념에서 보자면, 빈첸과 ‘소년’의 격은 비등한 것 같았다.
그가 알기로 ‘소년’은 수백 년간 모습을 바꾸며 살아온 괴물이고, 빈첸은 이제 갓 열여섯이 된 애송이일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격이 동등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늦게 시작하지 그랬느냐?”
“무엇을?”
헬리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만약 빈첸에게 10년 정도의 시간이 더 있었다면, 상황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스물여섯의 빈첸이라.'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헬라임에서 만났던 빈첸과 지금의 빈첸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빈첸과 10년 후의 빈첸은 또 완전히 다른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나는 너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빈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별개의 공간.
“검술가를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해 낸 공간인가?”
“그래.”
이 어두운 공간.
이 공간은 ‘대검결계(對劍結界)’라 불리는 공간이었다.
“검술가의 마나를 제약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군.”
마력회로가 분절된 것 같은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 이질적인 감각은, 제대로 된 검식을 끌어내기 어렵게 만들었다.
“본래는 검술가의 심상을 동결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나는 심상이 없으니 이 정도의 불편함만 느끼는 거고?”
“그렇지.”
헬리오스는 딱히 숨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한 헬리오스의 태도에서 율리안은 한 가지를 파악했다.
-지금 당장 죽이려고 들지는 않는 걸 보면 형님한테 어떻게든 정보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한 것 같아요.
금제에 걸리지 않는 선에서.
헬리오스는 빈첸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빈첸이 물었다.
“헬리오스. 이 결계의 이름이 뭐지?”
“대검결계.”
“대검결계가 믿는 것의 전부라면 너는 여기서 죽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 둘 중 한 명은 죽는다.”
헬리오스는 말을 하다 말고 허허- 웃고 말았다.
그 또한 감정이 널뛰는 상태였다.
“고작 열여섯 살짜리 무인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이야.”
본래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를 말해야 하는데, ‘둘 중 한 명은 죽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 빈첸을 눈앞에 둔 헬리오스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한 가지만 더 묻지. 네게 명령을 내린 자가 너와 나의 상성에 대해서 과연 몰랐을까?”
빈첸이 홍련을 꺼내 들었다.
자신을 자꾸만 속박하려드는 대검결계의 마나 흐름을 끊어냈다.
이곳은 마법적인 힘이 가득한 공간.
다른 말로 하자면 ‘이능으로 꽉 찬 공간’이었다.
빈첸에게는 모든 공간이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아덴카의 4대 장로가 협공하여 나를 죽이게 만드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아덴카의 4대 장로를 그렇게 움직이고 제약을 걸었다.
그렇다면 다른 힘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왜 하필이면 헬리오스를 이곳에 배치했단 말인가.
“다시 한번 말한다. 여기서 죽는 사람은 너다.”
실력은 둘째 치고 상성이 너무 안 맞는다.
헬리오스가 펼친 ‘대검결계’ 또한 오히려 빈첸을 돕는 꼴이었다.
이 대검결계는 헬리오스의 영역이었고, 이 영역에 해를 가하면 헬리오스에게도 악영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헬리오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악몽]이 원하는 게 왠지 내 죽음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상관없다.”
헬리오스에게 있어서 어차피 상관은 없었다.
자신이 빈첸을 죽이든, 자신이 죽든, 어차피 그는 죽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내 죽음으로 아이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빈첸을 바라보는 헬리오스의 눈빛이 바뀌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래. 어쩌면 놈이 바라는 건, 나의 죽음일지도 모른다. 내 죽음을 통해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어.”
“…….”
헬리오스의 눈에 오히려 활기가 떠올랐다.
갑자기 즐거워진 것 같았다.
“여기서 내가 이기든 지든 내 죽음은 확정되었다.”
“…….”
“그렇다면 나는 최대한 즐겁게 싸워주겠다.”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담담해졌다.
어쩌면 지금이 삶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화려하게 불태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세가 마치 투견 같군.’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투지가 느껴졌다.
-젊은 시절 헬리오스의 이명이 미친개였대요.
‘미친개?’
-네. 전투 마법사를 지향했다나 뭐라나. 한때는 싸움에 미쳐 있었다나 봐요.
‘흥미로운 얘기구나.’
율리안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았다.
헬리오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수많은 실전을 경험한 자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기세였다.
‘대검결계의 힘이 약화되고 있다.’
-오히려 자기 약점이 된다는 걸 아는 모양이에요.
순간,
헬리오스가 거리를 좁혀왔다.
아주 짧은 거리를 순간적으로 이동했다.
‘블링크?’
빈첸이 설인걸음을 운용하여 거리를 벌렸다.
빈첸의 가슴팍 부근의 옷이 살짝 찢어졌다.
“과연 빠르구나. 회심의 기습이었는데.”
대검결계의 힘을 약화시켰다.
대신,
외부와의 차단 효과만 높였다.
“숙련된 검술가들과 제대로 싸워보고 싶었다.”
그가 ‘미친개’로 불렸던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마탑 출신의 마법사였고, 엘리트 마법사로서의 길을 걸어야만 했으니까.
엘리트 마법사는 성벽과 도시를 파괴하는 마법사다.
인간 개인을 상대하는 마법사는 제대로 된 마법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당연히, 마탑주가 될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엘리트 마법사의 길만 걸었다.
“손에 마나로 이루어진 칼날을 두른 건가?”
챙!
검과 손이 부딪쳤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홍련이 그리는 붉은 궤적.
헬리오스의 손이 그리는 푸른 궤적이 한데 어우러져 엉키었다.
-미친, 엄청 빠르네요.
헬리오스는 신체 강화 마법을 통해 신체를 강화시킨 것 같았다.
보법을 펼치며 거리를 벌리려는 빈첸보다 더욱 빨랐다.
‘중검첩방.’
아밀룬 제3검식.
무거운 마나로 이루어진 중검이 무형의 벽을 만들어냈다.
콰앙!
중검첩방이 깨졌다.
헬리오스의 손에 깃든 마나가 중검첩방을 무너뜨렸다.
‘위험했어.’
헬리오스의 손이 가슴팍에 닿기 직전, 빈첸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아밀룬 검식을 사용한 직후여서 검이 꽤 무거웠다.
헬리오스가 후후 웃었다.
“생각보다 느리구나.”
피가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잊고 있던 젊은 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래.’
죽는다면 이렇게 죽고 싶었다.
젊은 날의 헬리오스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세월에 무뎌져 잊고 있던 것들이 되살아나니 오히려 기뻤다.
“마법을 활용하여 육체적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마법 무투가인가.”
“뭐, 대충은 비슷하지.”
헬리오스는 과연 마탑주다웠다.
순간적인 가속을 이끌어내는 마법.
예리한 절삭력을 증폭시키는 마법.
위험요소를 인지하고 미리 회피지점을 파악하는 마법.
동체시력을 높이고 그에 따른 순발력을 강화하는 마법 등.
‘온갖 마법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그리고 가장 거슬리는 것은 바로 블링크였다.
“뒤다.”
헬리오스가 주먹을 뻗었다.
빈첸은 황급히 앞으로 구르며 헬리오스의 주먹을 피해냈다.
움직임이 검술가들의 상식과는 너무 달라서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헬리오스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쾅!
허공과 부딪친 그의 주먹에서 충격음이 났다.
그곳에 균열이 생겨났다.
‘머리에 맞으면 위험하겠군.’
허공에 균열을 일으키는 힘.
저 힘에 담긴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널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것이냐?”
헬리오스가 후후 웃었다.
그는 주먹을 회수하고서 허리를 곧게 폈다.
“내심 네가 8성 수준의 무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했었다.”
“…….”
“그러나 아닌 것 같구나.”
빈첸은 헬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이능을 느끼고 베기에는 너무 늦군.”
“흔히들 일대일 전투는 무인들이 최고라고 하더군.”
“…….”
“나는 그것이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마법사들은 다양한 마법활용을 통하여 무인들보다 더 강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꽤 기뻤다.
젊은 날에는 제대로 증명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쉽구나.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할 터인데.”
이곳은 외부와의 연결이 차단된 공간.
외부의 기자들이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없었다.
“무투 계열의 마법을 익힌 마법사가 검술가를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헬리오스가 또다시 블링크를 사용했다.
빈첸의 왼쪽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빈첸에게서 빈틈이 보였다.
‘느려!’
헬리오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은 검술가의 검보다도 날카로웠다.
빈첸의 관자놀이가 손에 닿을 듯했다.
‘오늘 죽는 자는 너다, 빈첸.’
그런데 그때, 이변이 벌어졌다.
“이제야 알겠군.”
빈첸이 슬쩍 손을 들어 올려 헬리오스의 손목을 가볍게 쳐냈다.
헬리오스가 중심을 잃었다.
빈첸은 반 발자국 옆으로 살짝 이동한 뒤, 헬리오스의 어깨를 잡고 다리를 걸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헬리오스는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서 한 바퀴나 굴러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쿨럭!
헬리오스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순간적으로 몸에 걸어놓았던 모든 마법이 깨지면서 큰 충격이 몸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어, 어떻게……!”
“피다넬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미묘한 그거. [악몽]이 네게 금제 외에 뭔가 다른 것을 걸어놓은 모양인데.”
빈첸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마탑주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겠군.”
“지금 뭐, 뭘 한 거냐?”
홍련의 검 끝이 헬리오스의 등에 맞닿았다.
헬리오스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이냐!’
전투 내내 우세했던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대니얼의 경우에는 딸을 인질로 잡혔어. 그렇다면 너도 마찬가지이려나.”
“…….”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네.”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마탑주에게는 네 명의 자식이 있고, 그들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내 예상대로, 악몽은 내 죽음보다는 네 죽음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아.”
“……뭐?”
“네가 죽어야 이게 새로워지는 것 같거든.”
빈첸의 눈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헬리오스도 반사적으로 빈첸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헬리오스는 빈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게 무슨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