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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56화 (156/184)
  • 환생의 정석 156화

    시꺼먼 물체에서는 악취가 풍겼다.

    증거로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마법적 처리만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일전에 빈첸이 죽였던 ‘극독전갈’이었다.

    “보이십니까?”

    극독전갈은 성인 남성의 팔뚝 이상으로 컸다.

    모두가 극독전갈을 알아보았다.

    “대니얼이 직접 테이밍했던 극독전갈입니다. 이 극독전갈은 제 침대에서 저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냐?”

    “대륙 10대 테이머가 호락호락하게 당할 것이라고만 생각하셨습니까?”

    빈첸은 냄새나는 사체를 뒤집어서 보여주었다.

    그 아래에는 마나로 새겨진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글자는 100년 전 멸족한 자 충인(蟲人)들의 언어입니다. 충인들에 대해서는 아실 것입니다.”

    100년 전.

    기괴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던 충인들을 멸족시켰던 사건이 있었다.

    충인들은 곤충의 더듬이와 껍질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수인들이었는데, 벌레와 비슷한 특성들이 많아 인간들이 혐오하던 인종이었다.

    “장로께서는 읽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그런 기괴한 자들의 글자 같은 건 모른다.”

    빈첸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이메르 곁에 서 있던 셀비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하여 제가 해석하였습니다.”

    “너는 누구냐?”

    “빈첸의 친구이자 전 붉은 요새의 생도였습니다. 현재는 역사학자를 꿈꾸며 나이메르 경 밑에서 공부 중입니다.”

    피다넬은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빈첸이 취조하듯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화가 나는데, 이제는 빈첸도 아니고 전 붉은 요새의 생도란다.

    “빈첸! 네놈은 나와 장로원을 어디까지 능멸할 생각이냐!”

    “해석은 제가 했고, 검증은 용아인들의 어머니 나이메르 경께서 해주실 것입니다.”

    피다넬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용아인들의 어머니라면, 용아인 전체를 다스리는 수장이었다.

    용아인 정령술사들의 힘을 보건대, 용아인들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나이메르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저는 프란시스와 용왕의 시대에도 어머니였고, 현재 빈첸의 시대에도 어머니입니다.”

    조용히 취재하던 마리아는 입을 쩍 벌렸다.

    ‘용왕이라면 용왕 아벨탄?’

    아벨탄은 무려 200년 전 영웅이다.

    그렇다는 말은 나이메르의 나이가 최소 200살은 되었다는 소리였다.

    믿기 어려운 말에 나이메르가 말을 이었다.

    “이는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에 200년 동안 전시되어 있었던, 나의 아들 프란시스 에일롬이 나를 그린 초상화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꽤 권위 있다는 레일트라 상을 받았으니 공식적인 기록으로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초상화는 프란시스 미술 기념관에서 공식적으로 제게 내어준 것으로, 이는 자유연합의 로랑 경께서 보증해 주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최고 수석기자다운 눈썰미로 초상화 속 여인과 나이메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예전, 율리안은 이렇게 말했었다.

    -눈과 입 주변의 작은 주름 모양과 각도마저도 똑같아요. 저 정도면 동체 모양까지도 똑같겠어요.

    마리아는 바람소리의 정밀 판독기계를 즉석에서 사용하여 살펴보았다.

    마도공학의 산물인 판독기계는 99.99%의 확률로 동일인임을 확인해 주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제 이름은 나이메르 에일롬입니다. 저는 충인들의 언어를 알고 있고, 셀비라 양의 해석을 공증할 것입니다. 용아인들의 명예를 걸고서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또한, 저는 셀비라 양의 해석을 증명할 만한 역사적 자료들을 지니고 있으니 훗날 소명을 요구하셔도 좋습니다.”

    곧바로 셀비라가 해석을 시작했다.

    “아덴카의 장로원이 빈첸 공자를 죽이도록 사주했다. 그들은 내 딸을 인질로 잡고 있으며, 나는 어쩔 수 없이 빈첸 공자를 죽여야만 했다.”

    피다넬이 소리 질렀다.

    “모함이오! 저 증거는 조작된 증거요!”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 필체를 대조해 보려 합니다.”

    대니얼은 대륙 10대 테이머로 유명했던 권위 있는 테이머였고, 그의 서신이 대륙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빈첸은 서신들의 사본을 구하여 이미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빈첸이 피식 웃었다.

    “필체마저 모사하여 조작했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

    “대륙 10대 테이머가 길들인 극독전갈의 배에 이렇게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진한 글자를 새겨 넣을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존재하겠습니까?”

    “흥, 극독전갈이 죽은 이후에 조작했을 줄 누가 어찌 알겠느냐?”

    “글자를 자세히 보십시오. 패여 있는 글자들이 안쪽으로 말려 있습니다. 이는 사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즉, 글자가 새겨진 이후에 죽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계속해서 감탄했다.

    세력을 끌어모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미 피다넬 장로가 빠져나갈 구멍을 모조리 막아놓은 것 같았다.

    ‘역시…… 무력만 강한 게 아냐.’

    무력 이상의 것.

    빈첸에게는 분명 그것이 있었다.

    “10대 테이머쯤 되는 자가 뭐가 아쉬워서 저를 죽이려 든단 말입니까? 대니얼이 직접 건네준 쪽지. 그리고 대니얼의 극독전갈에 새겨진 글씨. 그리고 장로원에서 빠져나오다가 가주께 발각된 딸의 사체까지. 이래도 부정하려 드실 겁니까?”

    “그러니까, 그건 델백 장로의 일탈이었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우리도 그에 따른 책임을 지고 델백의 모든 지위와 명예를 박탈한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빈첸이 셀비라에게 눈짓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 딸을 인질로 잡아간 자는 4대 장로 중 하나였다.”

    빈첸이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저는 델백 장로의 목을 직접 베었습니다. 델백 장로가 대니얼 앞에서 대니얼의 딸을 납치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는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피다넬, 당신이라면 얘기가 다르지.”

    빈첸은 더 이상 존대를 하지 않았다.

    빈첸의 눈에도 살기가 깃들었다.

    이제는 장로로서 예우해 주는 것도 끝났다.

    피다넬은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그러니까, 나 혹은 4대 장로들 중 누군가가 대니얼의 딸을 납치하고 대니얼을 협박하여 살인을 사주했다? 우리가 왜?”

    “그러니까, 왜?”

    빈첸이 묻고 싶었다.

    장로원은 왜 이렇게 자신을 싫어하는 것인가.

    그리고 단순히 ‘싫다’는 이유로 왜 이런 대담한 짓까지 벌였는가.

    “그래서 나는 생각해 봤거든. 내가 장로원 입장에서 눈엣가시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나를 죽일 정도였나?”

    그리고 홀로 결론을 내렸다.

    답은 ‘아니오’였다.

    무엇인가가 더 있었다.

    빈첸의 말에 피다넬은 자신이 조금 생긴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동기도 정확히 모른 채 나를 지목하여 표적수사를 하고 있다는 걸 자인하는 게로군?”

    “동기는 모른다고 말했을 뿐. 찌질하고 더러운 짓을 저질렀다는 건 변하지 않아, 피다넬.”

    “헛소리 마라. 내게는 그럴 이유가 없다. 혹여 네가 제시한 증거들이 모두 진짜라 할지라도, 그건 나를 음해하기 위한 누군가의 소행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빈첸 옆에 누군가가 섰다.

    “흥, 뻔뻔하네요.”

    빈첸은 증거만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증거와 더불어 증인까지 준비했다.

    증인은 바로 빈첸을 유혹하라 명령받았던 마리엘이었다.

    “제가 누군지 아시죠?”

    “모른다.”

    “그렇게 뻔뻔해야 4대 장로쯤 할 수 있나 봐요. 나랑 종종 잤잖아.”

    순간,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주변을 휘감았다.

    마리엘은 거침없었다.

    “내가 장로원에 출입했던 기록도 버젓이 남아 있을 거고. 원한다면, 더한 증거도 내보일 수 있어.”

    그간 침묵하며 취재에만 집중했던 마리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증거라면 어떤 증거입니까?”

    “내가 이자와 잤다는 증거. 명령도 그 자리에서 몰래 내렸어. 보안유지에 엄청 신경 썼지만 이런 거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더라고. 내가 뭐 자기 애라도 낳아주길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리엘은 품 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탁한 액체가 담겨 있었고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몇몇은 시선을 돌렸다.

    충격의 도가니였다.

    “미안해요. 너무 더러운 걸 보여서. 저자가 하도 까탈스럽게 굴어서, 내가 채취할 수 있는 증거가 이것밖에 없었어요.”

    사실 말을 하고 있는 마리엘 스스로도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오늘 죽을 수는 없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오늘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빈첸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속죄야.’

    아무리 좋은 척 포장을 하더라도.

    그녀는 빈첸에게 좋지 못한 의도로 접근했다.

    빈첸의 실력이 이렇게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빈첸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 속죄까지는 마무리하고 사라지자.’

    율리안도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 더러운 걸 봐버렸어요. 근데 마리엘도 진짜 대단하네요. 저걸 저렇게 까발릴 줄이야. 본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될 텐데.

    마리엘이 말을 이었다.

    “내게는 빈첸을 유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내 친구였던 브릭에게는 대니얼을 도와 나와 빈첸을 죽이라고 했지?”

    “내가 네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하여, 이렇게 치졸한 복수극을 벌일 줄은 몰랐구나.”

    피다넬은 끝까지 뻔뻔했다.

    “내가 좋다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끈덕지게 달라붙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렇게 뒤통수를 친단 말이냐?”

    “…….”

    “신분 상승을 위하여 내게 접근할 때부터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불쌍히 여겨 잘해주었던 것이 내 화근이군.”

    마리엘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정신력의 한계까지 사용하고 있던 터라,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빈첸이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대니얼을 도왔던 생도 브릭은 마정석을 가지고 있다가 죽었다. 그 마정석의 출처를 확인해 보니, 아덴카의 적색 금고에서 나왔더군. 그때 금고를 찾았던 자가 피다넬, 네놈이고.”

    피다넬은 빈첸의 죽음을 확신했었다.

    그래서 아덴카의 적색 금고에서 마정석을 꺼냈다.

    어차피 들킬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작은 방심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

    빈첸은 홍련을 뽑아 들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푸, 푸하하하핫! 네놈이 나를 베기라도 하겠다?”

    피다넬은 크게 웃은 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그의 눈에도 살기가 깃들었다.

    “아덴카의 장로, 피다넬, 네게 목숨을 건 검투를 제안한다. 어떠한가?”

    그때 멀린이 나섰다.

    그는 스승으로서 빈첸에게 말했다.

    “빈첸. 내가 대신 하겠다.”

    “대리전을 요청할 만큼, 저는 어리지 않습니다, 스승님.”

    “비록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저자는 4대 장로 중 한 명이다.”

    “그렇기에 더욱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

    “봐주십시오. 제자의 성장을.”

    피다넬이 크게 비웃었다.

    “언제까지 쑥덕거릴 참이냐?”

    “빈첸 아덴카. 나는 아덴카의 7공자로서, 가문의 명예에 먹칠한 피다넬의 처벌을 집행한다.”

    장로라는 직책도 붙여주지 않았고, 검투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피다넬에게 지나치게 명예로운 대답이었으니까.

    “네놈이 이능을 베는 특별한 힘만 믿고 지나치게 까부는구나.”

    모두가 빈첸과 피다넬의 격돌에 집중하는 사이.

    율리안은 이면의 다른 것을 보았다.

    -피다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결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형님의 죽음이 더 중요해요.

    그저 피다넬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빈첸을 죽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뭔가가 더 있어요.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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